주황색 탁구공은 맥거핀이었을까? <마티 슈프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디온이 창문 밖으로 주황색 탁구공을 쏟아내는 순간이다. 혼란이 극에 달한 가운데, 플라스틱 공이 폭포처럼 떨어져 거리 위로 튄다. 모두가 내내 말을 멈추지 않는 이 시끄러운 영화에서 이 장면은 안식처럼 느껴진다. 마티 마우저의 이름을 새긴 공은 조용히 탁탁거리며 흩어진다.
그런데 주황색 탁구공 이야기는 영화 속 주인공에게 영감을 준 실존 인물 마티 라이스먼의 삶과 관련이 없다. 실제 역사에서 유색 탁구공 도입은 1960년대 후반 독일의 스포츠교육자 마틴 스클로르츠가 브라운슈바이크공과대학교에서 진행한 시인성 연구와 연결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영화는 가상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선구자적 기질을 지닌 마티가 주황색 공을 발명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 공로는 영원히 묻혔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 설정은 서사 전략 측면에서 꽤 영리하기도 하다. 탁구에 문외한인 관객이라도 탁구공에 흰색과 주황색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영화가 주황색 공과 관련된 서브 플롯을 밀어붙이면 관객은 잠시나마 ‘혹시 이 사람이 우리가 아는 그 주황색 탁구공의 숨은 발명가인가’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영화는 그 작은 착각을 이용해 언더도그 스포츠물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동력을 만든다. 마티가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허세 가득한 인물임이 명백한데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그가 ‘폰지 사기꾼’이 아닌 ‘진정한 혁신가’일 가능성을 온전히 놓지 못한다.
따라서 주황색 공을 창문 밖에 내던지는 장면은 곧 마티의 헛된 욕망이 추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에 이름을 새긴 위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가 만든 주황색 공은 시대를 바꾼 혁신이 아니라 사기극에 불과하다. 마티 슈프림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문자를 새긴 공은 이 초라한 인간이 세상에 박아넣고 싶은 욕망을 물질적으로 드러낸다.
이 점에서 마티는 조시 사프디가 천착한 인물 군상의 연장선에 있다. 사프디 영화 속 인물은 대개 무언가에 중독된 상태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의 도벽, <헤븐 노우즈 왓>의 약물이 이를 대놓고 그렸다면, <굿타임>과 <언컷 젬스>의 거짓말과 편집증, 도박은 이를 더 우회적으로 그렸다. <마티 슈프림>에서도 중독 대상은 탁구 자체가 아니다. 마티는 불확실한 자기 미래에 중독됐다. 이에 마티는 언제나 가불로 살아간다. 그는 지금 가진 돈이 아니라 앞으로 얻게 될 명성을 담보로 움직인다. 아직 우승하지 않았지만 우승자처럼 말하고, 아직 부자가 아니지만 사업가처럼 군다. 아직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자기 이름을 새긴 주황색 공을 주문한다. 그가 당겨쓰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인정, 사랑, 민족성, 지위, 심지어 미래의 전기적 서사까지 모두 현재로 끌어온다. 마티에게 삶은 현금 거래가 아니라 신용 거래다. 문제는 그 외상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 “나중에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뿐이라는 데 있다.
이때 <마티 슈프림>이 되살리는 것은 “그들만의 제국”(닐 가블러) 할리우드를 세운 유대인이 오래전부터 반복한 인간형이기도 하다. 초기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주로 유대계 이민자와 그 후손이 세운 산업이다. 이들은 동부의 WASP(앵글로 색슨계의 개신교도) 중심 산업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비교적 천대받던 오락 산업에서 자신들의 길을 만들었다. 유대계 창업자들은 로스앤젤레스를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바꿔 스크린 위에 아메리칸드림을 아로새겼다. 이를테면 (사프디가 이번 작품에 영향을 줬다고 언급한) 버드 슐버그의 <What Makes Sammy Run?>에 등장하는 새미 글릭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새미가 할리우드로 달려갔다면, 마티는 탁구장과 도쿄로 달려간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고, 이름과 이미지와 허세를 팔아 중심부로 들어가려 하는 이야기는 할리우드영화가 오래도록 개체 반복한 할리우드라는 계통의 발생 과정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영화 속 마티 역시 선수라기보다 작은 스튜디오 보스처럼 행동한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요소를 내기에 걸 자산으로 본다. 경기장은 그에게 스포츠의 장소이기 전에 무대다. 상대는 경쟁자이기 전에 관객이고, 공은 도구이기 전에 상품이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승리가 보도되고 판매되고 기억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할리우드의 오래된 유산이다. 할리우드는 늘 비범함을 팔았다. 그러나 그 비범함은 대개 인정받고 싶다든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든가 하는 평범한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때 아메리칸드림은 성취가 아니라 신용이다.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미래를 현재에 당겨쓰게 해주는 신용이야말로 ‘아메리칸드림’의 핵심이며, 마티가 만든 주황색 공은 이 꿈을 담은 사채 증서다. 그러나 사프디는 이 꿈을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마지막 경기에서 마티는 엔도를 이기지만, 이 경기는 이벤트일 뿐 공식 대회가 아니다. 그는 챔피언이 되지 못하고, 부와 명예도 얻지 못한다. 이 승리는 일반적인 스포츠물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오히려 꿈을 청산하는 의식에 가깝다. 마티는 아메리칸드림의 궤도에서 이탈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전작과 달리) 아메리칸드림의 실패가 곧 비극적 결말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앞서 마티가 하얀 공이 하얀 옷 위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했을 때, 윌리는 “네 얼굴은 어떻고?”라고 받아쳤다. 그런데 영화는 오프닝 몽타주를 통해 불평의 대상이 됐던 그 하얀 공을 마티의 정자와 레이첼의 난자가 만나 형성된 ‘수정체’와 이어 붙였다. 결국 윌리가 던진 피부색 농담은 마지막에 짓궂은 진실로 돌아온다. 마티는 하얀 간호사 옷 위에 안긴 하얀 아기를 본다. 그것을 누구보다 또렷하게 보며 마티는 너무나도 상투적으로 운다. 그 눈물은 구원의 눈물이라기보다 당혹에 가깝다. 아기에게는 주황색 스프레이를 뿌릴 도리가 없다. 아기는 이제부터 마티가 갚아야 할 현재다. 마티는 처음으로 저당잡히지 않는 세계와 마주했다. <마티 슈프림>은 꿈을 이루지 못해도 삶은 계속된다는, 혹은 아메리칸드림이 아닌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불편한 사실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