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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체념으로 봉인된 비극, 최재혁 평론가의 <어떻게 해야 했을까?>

후지노 도모아키의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조현병을 앓는 감독의 누나와 그 부모의 모습을 2001년부터 20년간 기록한 사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2000년대 초 일본의 열악한 정신의학 체계와 질병을 수치로 여기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 가족이 외부와 담을 쌓은 채 삼켜야 했던 오랜 마모의 시간을 담아낸다.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GV에서 감독은 수십 년간 이어진 갈등 끝에 누군가를 책망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히며, 특정 대상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감독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화는 한 가족이 겪은 고통의 처절함을 가식 없이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만, 책임 모색의 포기라는 연출적 선택에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이 현상의 맥락을 성찰하기보다 더 이상의 탐구를 멈춰 세우는 닫힌 수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멈춰 선 자리

<어떻게 해야 했을까?>

영화는 오프닝 자막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밝히거나 조현병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명시한다. 다큐멘터리에서 피사체의 구술과 구성의 방향은 연출자가 던지는 질문과 프레임의 선택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상대가 말하고 싶은 것과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연결하는 것이 인터뷰의 기술”이라고 말하자, 연출자는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살피며 질문하곤 한다”라고 응답한다. 피사체의 결을 따르겠다는 대화법은 얼핏 상대를 향한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태의 맥락을 파고들어야 할 탐구 자체를 유예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연출자가 설계한 질문과 편집은 스크린 위 날것의 증상을 고통의 실감으로 전달하는 것에 머무른다. 관객에게 전달되는 자극적인 정서적 효과가 질병과 피사체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로 확장되지 못한 채 누나의 존재를 출구 없는 비극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원되는 것이다.

연출자가 누나에게 질문을 던지며 소통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이전까지 쓰지 않았던 타이트한 숏으로 누나의 얼굴을 밀착 포착하며 시각적 중압감을 자아낸다. 질문 속에서 불안해하던 누나가 자리를 피하자, 연출자는 뜬금없는 말을 남기며 달아나는 누나를 패닝으로 집요하게 쫓아간다. 뒤이어 이어지는 식사 자리에서 연출자는 누나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에게 과거 뇌진탕을 겪었던 상황을 재차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프레임은 아버지의 물리적 상처를 클로즈업하면서 같은 공간에 있는 누나를 외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파악 불가능한 영역에 남겨진 누나와 달리, 아버지의 고통은 인과관계가 명확한 언어를 통해 이해와 공감이 가능한 영역으로 포섭된다. 카메라는 경청의 형식을 빌려 대화를 시도하는 듯하지만, 실상 누나를 언어를 지닌 주체가 아닌 불가해한 존재로 고착시킨다. 아버지에게는 명확한 인과를 부여하면서도, 누나의 질병 앞에서는 원인 규명을 유예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조현병을 다가가기 힘든 심연의 상태로 신격화하며 당사자를 소통의 영역 바깥으로 내몬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연출적 태도는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온 이후 등장하는 5분가량의 스테디캠숏에서 정점에 달한다. 암전 속에서 누나를 온전히 돌본 것은 자신뿐이라는 어머니의 진술이 지나간 뒤, 잠든 누나를 깨워 설탕물을 건네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는 그저 지켜본다. 연출자는 안 깨우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말만 나지막이 건넬 뿐 어머니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며, 직후 방 안에서 누나의 절규가 터져나올 때조차 카메라는 이를 프레임 안으로 수용하지 않은 채 화면 밖의 음향으로 남겨둔다. 치매 상태의 어머니가 누나의 증상을 마약중독으로 오해하며 혼란을 드러낼 때조차 연출자는 그 말을 수정하지 않는다. 두 질병이 충돌하는 고통의 현장에서, 연출자는 사태에 개입하는 적극적 주체라기보다 고정된 관찰자의 자리를 지킨다. 창작자가 렌즈 뒤로 후퇴한 채 개입을 유예할 때, 침묵하는 카메라는 비극의 내막을 짚어내기보다 사태의 불가항력성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데 그친다. 질병을 파악 불가능한 영역에 가두는 연출적 태도는 사건의 맥락을 성찰할 계기를 차단하며 영화 전체의 감상을 한 가족에게 닥친 운명적 슬픔으로 수렴시킨다.

20년의 기록이 도달한 곳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머니와 누나가 세상을 떠난 뒤 연출자가 아버지를 대면하는 엔딩 시퀀스는 개입을 유예해온 관찰자의 위치가 지닌 내적 한계를 보여준다. 연출자는 화면 안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들여놓으며 아버지와 대치하는 시각적 구도를 형성한다. 표정을 감춘 뒷모습은 지난 세월의 과오를 따져 묻는 심문자의 위상을 확보하는 동시에 사태의 내막을 대면하기 두려워하는 인물의 무력함을 감추어주는 시각적 방어막으로 기능한다. 자신을 프레임 안에 포함하는 구도는 창작자 스스로를 성찰의 피사체로 세우려는 시도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확인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과거 누나를 치료의 영역으로 이끌거나 어머니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왜 부족했는가를 짚어내는 질문은 지난 세월을 “어쩔 수 없었다”는 불가항력의 영역으로 정돈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판단을 신뢰했을 뿐이라 답하며 세상을 떠난 이에게 책임을 넘기고 다시 기회가 와도 실패라 생각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지난한 기록이 끝맺어질 때, 영화는 그저 무력함의 순환을 확인하는 데 그치게 된다. 이윽고 영화를 공개해도 되느냐는 마지막 질문 끝에 들려오는 연출자의 “컷, 컷” 소리는, 더이상의 탐구를 멈춘 채 사태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며 지나간 비극을 하나의 정돈된 내러티브로 매듭짓는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은 20년의 고립을 견뎌온 감독이 도달한 무력한 체념의 고백이다.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깊은 고통 앞에서 사태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무게를 지닌다. 그러나 한 인간의 사적 체념이 스크린 위에 구조화되는 순간, 현실은 성찰이나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숙명적인 비극의 상태로 굳어진다. 사적 다큐멘터리가 지닌 고백적 형식이 윤리적 면죄부로 작동할 때, 연출자는 피해자라는 고통의 위치와 관찰자라는 시선의 위치 사이를 왕복하며 자신을 비판적 검증 바깥에 둘 통로를 얻는다. 앞서 대상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거나 그저 관찰자로만 머물러 있던 연출적 선택이 이미 닫혀버린 질문과 결합할 때, 영화는 조현병과 그 돌봄의 현실을 어쩔 수 없었던 운명적 심연으로 봉인한다. 다큐멘터리가 타자의 고통을 마주할 때 필요한 직시는 지난 사태를 불가항력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위 피사체를 어떤 시선으로 포섭하고 대면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데서 비롯한다. 지나간 비극이라는 이유로 피사체의 실존을 현재의 시선으로 대면하기를 멈추는 순간, 영화는 의도와 상관없이 타자의 고통을 접근 불가능한 영역에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