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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여전히, 명백한 마법의 시대

고백하자면 나는 신도, 외계인도, 귀신도, 사후 세계도 믿는다. 무슨 영험하고 특별한 체험이 있었던 건 아니다. 실은 내가 믿는 건 딱 하나다.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세상에 무수히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 모르는 것을 서둘러 ‘없음’의 서랍에 넣어버리는 대신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다. 믿음이란 증명이 아니라 결심이고, 지식이 아니라 태도다. 내가 모르는 자리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앞에서 기꺼이 겸손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오디세이>를 극장에서 영접한 후 그 믿음을 새삼 확인했다. 감독의 이름만으로 관객을 극장까지 불러 모으는 영향력, 그 고집을 기어이 감당해주는 할리우드 시스템, 극장 영화를 향한 존경과 집념. 그 교차점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결과물이, 3천년 묵은 이야기를 사상 최초로 전편 아이맥스 필름에 담았다. 이런 유일한 영화들을 좋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극장의 위기라는 말이 인사말처럼 굳어진 시대에, 관객들은 3시간짜리 고대 서사시를 보겠다고 접속 경쟁을 하며 표를 구한다. 극장 산업이 변곡점을 지나는 지금, <오디세이>의 아이맥스관 경쟁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이번호에는 크리스토퍼 놀런박찬욱, 두 거장의 대담이 실렸다. 서로의 영화를 디테일 단위로 기억하는 두 거장이 마주 앉은 풍경을 지면으로 옮기며 여러 번 웃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잡지를 만든 보람이 있다. 대담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화의 첫 자막을 물었다. “명백한 마법의 시대가 있었다.” 놀런의 대답이 오래 남는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에게 아침의 태양은 신이 건네는 인사였고 천둥과 번개는 신의 언어였을 텐데, 오늘의 우리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며 사는 이상 우리는 그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디세이> 속에서 신은 얼굴을 드러내는 대신 폭풍과 벼락의 모습으로만 말을 건넨다. 파도 하나, 구름 하나가 대사 없는 배역이 되는 셈이니, 4층 건물만 한 스크린은 그 배역을 위해 마련된 무대였을 테다.

신화의 현대적 각색을 둘러싼 이런저런 지적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뚜렷한 비전이 있다. 죄책감과 성찰. 오만한 영웅의 무용담은 신의 그림자를 벗어나 죄를 지고 걸어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다시 쓰였다. 트로이의 그 밤에서 단 하루도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이 정지해버린 오디세우스와 낮에 짠 수의를 밤마다 풀어내며 스스로 시간을 정지시킨 페넬로페. 한 사람은 공간을 표류하고 한 사람은 시간을 표류한다. 여성 캐릭터를 온전히 쓰지 못한다는 비판 역시 이 영화가 피해 가지 못하는 대목이지만, 그럼에도 강렬한 인장처럼 박히는 얼굴은 다름 아닌 아테나와 페넬로페다. 살해당한 무녀의 얼굴로 곁에 앉는 여신이라니, 은총과 유령이 한몸이 되는 이 형상보다 죄의식을 정확하게 그린 그림을 나는 알지 못한다. 고백하건대, 매혹되었다.

대담의 끝자락에서 박찬욱 감독은 영화 속 열린 문의 숏을 두고, 신들이 제 역할을 마치고 떠난 자리에서 인간이 책임을 자각하는 새 시대의 암시를 읽어냈다. 놀런은 거기까지 의도하지는 않았다면서도 그 해석에 강하게 끌린다고 답했다. 한 감독이 놓아둔 숏을 다른 감독이 마저 완성해주는 순간. 나는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관객을 만나 비로소 살아나는 방식의 가장 아름다운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우리의 일을 떠올렸다. <오디세이>의 오프닝에서 딱 한 단어만 고치고 싶다. (여전히) 명백한 마법의 시대, 다. 극장의 마법이 끝났다는 소문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 증명이 아니라 결심이라면, 나는 기꺼이 극장쪽에 걸겠다. 어두운 객석에 낯선 이들과 나란히 앉아 같은 파도에 휩쓸리는 체험은 아직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늘도 잡지라는 오래된 제단에서 이 체험의 신탁을 전한다. 극장이라는 마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