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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지도 위의 세 가지 단서

여섯 번째 키워드 - 미래의 이야기(들)

<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시네마 오디세이: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키워드는 ‘이야기’다. 영화 매체에 관한 이야기,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 영화의 형식을 두고 꺼내는 이야기, 21세기 영화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지금의 연재까지, 우리는 영화를 말하며 온갖 이야기의 방식을 탐색할 수밖에 없다. 연재의 첫째와 둘째 이야기는 각자의 고다르론을 겸비한 일본의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평론가, 이윤영 영화학자 겸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가 책임졌다. 다음은 김병규 영화평론가의 차례다.

지도 위의 세 가지 단서

잃어버린, 만들어진, 가능한 것들

시네마가 서사의 위기와 변형, 해체와 불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는 진단이 당연시되는 21세기의 환경에서도 한 편의 영화는 여전히 크고 작은 단위의 이야기를 토대로 움직인다. 이것은 영화에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탄생부터 불순했던 영화는 전통적 서사의 규범을 향한 커다란 의심이 제기되던 시기에 태어난 예술이며 모든 요소를 균질한 이야기의 질서로 흡수하려는 재현 체계와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려는 분산적 운동과 형상의 체계 사이의 긴장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잘 짜인 인과율과 사건의 연쇄로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하는 픽션의 규범과 일관된 행동으로 그 체계를 실어나르는 캐릭터의 힘은 약화된 지 오래다. 전통적 서사와 인물의 결속력을 의심하고 우회하며 그 체계의 유효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모더니즘의 실천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적 영화에 부여된 주요한 과업 가운데 하나는 고전적 계율의 결속력에 의존하지 않고 모더니즘이라는 비판적 실천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면서 서사의 역량이 희미해진 영화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 영화는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고 운용하는 발명의 야심을 아직 간직하고 있을까? 하지만 곤경에 처한 영화의 이야기를 갱생하려는 실천은 어느 장소에서 어떤 형태로 고안될 수 있을까?

화면에 담기는 이야기, 인물, 시공간의 통일성과 결속력이 약화된 영화에게는 지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의 지도에는 언제나 선명한 방향과 좌표가 그려지지 않는다. 그곳에는 임의적이고 제한적인 신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지도 위에 새겨진 점과 점 사이의 연결은 흐트러지고 간격, 공백, 지워진 흔적만이 일부 남아 있다. 21세기 영화에 닥친 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한 연출자들은 대부분 세계의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조건 아래서 각자의 제한적인 지도를 그리는 자들이며 그들이 상상한 지도는 픽션의 세 가지 장소, 혹은 몸짓을 제한적으로나마 공유하고 있다. 21세기 영화의 위기와 대안을 증언하는 존재란 모두 이 지도의 단서를 손에 쥐고 표류하는 작가들이다. 스크린을 마주하는 우리는 영화의 지도에 잔존하는 세 가지 단서를 따라간다. 그것은 잃어버린, 다시 만들어진,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가능한 영화의 허구적 힘이다.

첫 번째 단서는 파편적인 세계의 단서를 가지고 배회하는 탐색자의 발걸음에 있다. 21세기 영화의 선명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여정이 전면화되고 있다는 측면이다. 영화 속의 인간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향과 목적지를 잃어버리며, 눈앞에 마주한 경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따라서 21세기 영화에 빈번히 나타나는 것은 남겨진 시청각적 단서를 조합해 현실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무능한 탐정들의 몸짓이다. 다만 그들의 궤적은 쉽게 목적지에 가닿는 대신 끝없이 유예되고 지체되면서 다른 것으로 뒤바뀌고 만다. 영화는 희박한 단서로 세계의 단면을 더듬어보지만 탈출할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떠도는 무지한 탐정의 자리에 선다.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이 계열의 양 극점에 있는 영화들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한 여자와 그녀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심연의 세계로 향하는 다른 여자의 여정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와 그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과거의 필름을 돌아보는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로 이중의 삶을 이룬다. 기억을 잃은 영화는 몇 가지 단서로 변형 중인 세계의 질서를 감지한다. 두 영화는 하나의 서사에서 또 다른 서사로 탈바꿈하는 이행의 과정, 영화에 잠재한 누구의 것도 아닌 비인칭적 기억, 모든 분열과 기억을 투사하는 스크린의 빛과 극장 장치의 어둠이라는 공통 단서를 조합해 영화의 유령적 기원을 환기하지만 도착지는 정반대다. 데이빗 린치가 한 가지 서사에서 탈선해 완결되지 않는 영화적 픽션에 잠재된 세계의 팽창으로 향한다면, 빅토르 에리세는 필름이 상영되는 어두운 극장에 도착해 영화가 간직했던 한 가지 서사의 가능성이 사라져버렸으며 그 경험의 복원이 불가능하다면 새로운 픽션의 출발점을 설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극도로 팽창된 자유와 극도로 수축된 부자유의 세계가 두 편의 영화를 관통한다. 이 자리엔 영화를 지탱하던 신호들이 부자연스럽게 정지해 있다. 소리의 침묵(<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실렌시오’)과 시각 체험의 부재(<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눈을 감는 훌리오), 그만큼 역할과 기능이 모호해진 영화의 얼굴. 하지만 이것은 결코 곤경이 아니다. 20세기 중반의 장 뤽 고다르가 “나는 영화의 종말을 즐거운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21세기 영화의 이면화처럼 주어진 두 영화는 한 가지 세계의 중단과 종결을 자유로운 이행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특유의 희극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눈부신 그림자들>

두 번째 단서는 세계의 규칙을 다시 만드는 자들의 손짓에 있다. 그들은 몇 가지 재료를 수집하고 규칙을 덧입혀 카메라 앞에 만들어지는 작은 세계를 수없이 생성한다. 임의로 정해진 규칙 아래서 영화가 비추는 인간은 특정한 놀이에 몰두하거나 몇 가지 행동을 주고받고 반복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며 카메라 앞에 놓인 평범한 공간은 규칙을 매개로 특별한 경험을 산출하는 ‘디스포지티프’의 장소이자 극도로 작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발생하는 픽션적 지각의 장소로 탈바꿈한다. 2010년대 이후 제임스 베닝이나 차이밍량의 영화처럼 극도로 단순한 상황이 벌어지는 한 장면에 오래 머물러 영화 내적 요소들의 물질적 변화와 속도를 관측하는 형식에서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불러모아 특정한 활동이 발생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워크숍 영화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광학적 활동을 매개로 주어진 세계를 다시 구축하는 작업에서 카메라에 담긴 영화적 시공간은 물리적으로 한정되는 동시에 상상적으로 확장된다.

데이비드 개튼의 <눈부신 그림자들>은 아주 단순한 원리로 평범한 시공간 안에 새로운 영화적 세계를 생성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세계는 다음과 같다. 어느 서재의 책꽂이가 보인다. 책을 비추던 카메라의 시선 앞으로 투명한 유리가 설치된다. 연출자는 붓을 들고 카메라와 책꽂이 사이에 있는 유리 위에 물감을 칠한다. 발라진 물감이 화면을 뒤덮어 형체가 사라지면 여러 문학 작품의 인용구가 일정 시간 동안 삽입되고 사라진다. 데이비드 개튼은 물감을 칠하는 손짓과 텍스트를 삽입하는 선택만으로 카메라 앞에 기록된 현실을 대체하고 갱신하는 묘사의 상태를 광학적으로 구성한다. 이것은 확장된 미장센이자 가능한 몽타주이고, 하나의 쇼트가 종결 없이 지속되는 과정이자 수없이 많은 쇼트가 충돌하는 광경이다. <눈부신 그림자들>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으면서 무한정하게 확장되는 놀라운 영화적 공간의 탄생 과정에 카메라와 관객을 끌어들인다.

세 번째 단서는 앞선 두 가지 단서와 비교하면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영화의 역량을 되짚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어진 허구의 세계 위에 어쩌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가능한 세계의 조각을 겹쳐두는 것이다. 고다르가 20세기의 끝자락에 완성한 <영화의 역사(들)>에서는 언젠가 영화의 역사 속에서 가능했을 법한, 그러나 결국 현실로 실현되지 못한 사건을 향해 가정법을 제기한다. 무르나우가 할리우드에서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더라면, 소비에트 몽타주가 혁명의 이념을 지속해서 실현했더라면, 두 차례의 전쟁이 영화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았더라면, 영화를 만드는 행위와 사회주의가 성공적으로 결탁했더라면, 영화는 다른 모습으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다르의 시각에서 영화는 실현된 역사와 실현되지 못한 역사가 이중인화된 채로 존재하는 세계다.

고다르의 가정법을 따라 21세기의 영화는 복잡하게 뒤얽힌 다중적 운명의 가능성에 투신한다.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막론하고 그들이 영화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장소는 과거로부터 온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오래된 집, 혹은 도서관과 아카이브 자료실이다. 그곳은 비밀스러운 통로와 함정으로 가득한 공포 영화의 무대처럼 세계 내부에 숨겨진 또 다른 구역으로 안내한다. 숨어 있던 책과 영화, 사진과 편지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기억의 세계로 통하는 창구이며 이 매개를 통해 영화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끊어졌던 연결 고리를 되찾고 현실로 구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에 근접한다. 고다르를 필두로 알랭 레네와 아네스 바르다, 샹탈 아커만과 필립 가렐과 같은 감독들은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과업을 받아들여 지나간 영화의 그림자를 되짚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영화를 가능한 다른 세계로 전송하던 작가들이다. 전송된 영화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하고 지나온 세계를 먼 거리에서 응시할 수 있게 된다. 거기서 영화의 다른 운명이 산출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부부를 연기하던 두 남녀는 기나긴 말다툼의 끝에서 신혼여행의 오래된 기억이 깃든 낡은 숙소로 향한다. 그들은 현실에 존재한 적 없는 허구의 기억을 통해 불화와 균열로 가득한 현실을 화해시키려고 한다. 침대에 누운 아내는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가정법을 건넨다. “만약에 우리가 서로의 단점을 감싸줬다면 덜 외로웠을까?” 남자는 떠나지 말라는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고 방문과 창문 앞에 선다. 이 순간에 하나의 현실은 실현되지 않은 가능한 현실과 더불어 존재했다가 슬며시 자취를 감춘다.

지금까지 현대적 스토리텔링의 돌파구로 검토한 세 가지 지도 그리기의 방법을 하나의 영화적 신체에 이식한 모험적인 시도가 있다. 호세 루이스 게린의 <실비아의 도시에서>는 지도를 손에 든 남자의 이야기다. 어느 이름 없는 남자는 오래전에 만났던 여인 ‘실비아’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녀의 도시에 찾아온다. 도시에 체류하는 3일 동안 남자는 날마다 서로 다른 유형의 현대적 픽션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자신이 바라보는 현실에 투사한다. 영화 속에 담긴 그의 기록은 잃어버리고, 새로 만들고, 상상하는 단계를 거쳐 세 가지 픽션의 단서가 영화에 미치는 효과를 기록한 체험이 된다. 첫 번째 날, 남자는 지도를 들고 숙소 밖으로 나선다. 그는 지도의 세부를 들여다보며 과거에 기록된 도시의 단면과 현재 시점에 비치는 현실의 차이를 가늠한다. 남자는 과거에 마주한 ‘실비아’를 잃어버렸고 그녀를 되찾을 만한 단서를 모아 현재를 더듬거리는 무능한 탐정이다. 하지만 채집과 탐색의 단서는 실패한다. 그는 카페에 앉아 옆자리 여인에게 말을 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가 첫날에 시도한 잃어버림과 탐색의 서사는 지도 위에 음료를 쏟는 작은 파국으로 끝난다.

둘째 날에 남자는 카페에 앉아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본다. 수많은 여성의 얼굴과 목소리가 그에게 전달되고 남자는 공책에 여인의 초상을 그리며 ‘그녀(Elle)’라고 적은 단어를 ‘그녀들(Elles)’이라고 고쳐 쓴다. 단수형의 기억과 복수형의 초상이 뒤얽히는 장소로서의 영화. 수많은 얼굴을 공책에 그리던 남자는 마침내 유리창 너머로 ‘실비아’로 추정되는 한 여인을 바라본다. 남자는 카페에서부터 도시의 거리와 골목을 지나쳐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카페에서부터 거리를 지나쳐 그녀를 뒤쫓던 남자는 그녀가 타는 버스에 뒤따라 탑승한다. 남자의 시선 속에서 여인은 6년 전에 만난 ‘실비아’로 받아들여진다. 둘째 날의 그는 첫날처럼 세계를 관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의 규칙으로 여인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의 규칙 속에서 유리창 너머로 비친 어느 여인은 ‘실비아’가 된다. 남자는 현대적 픽션의 두 번째 단서인 허구의 규칙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보며 실비아와 재회하는 이야기를 형성한다.

<실비아의 도시에서>

남자는 실비아가 올라탄 버스를 탄다. 기나긴 추적 끝에 마침내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완전히 좁혀져 사라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건다. “실비아?” 하지만 그녀는 실비아가 아니다. 남자의 기억 속에 있던, 술집에서 만나 냅킨에 지도를 그려준 실비아가 아니다. 그녀는 술집에서 남자를 만난 적도 없고, 이 도시에 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남자가 여인에게 투사한 규칙이 파괴되는 순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는 가운데 말없이 얼굴을 지켜보고 뒷모습을 따라가는 것으로 형성되던 하나의 허구적 세계 또한 사라져버린다. 남자는 대체 무엇을 뒤쫓은 걸까? 그는 과거에 만난 여자를 현재 시점에 찾는다. 그는 불투명한 과거를 현재에 투영한다. 그의 눈앞에 있던 여자에겐 ‘실비아’라는 정체성이 덧씌워지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남자에게 현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 덧씌워진 과거와 가능한 미래가 겹쳐진 세계다. 기나긴 시간을 돌아 실비아를 뒤쫓아온 남자의 서사는 그 거리가 좁혀져 사라지는 순간 소멸되고 그가 투사하던 세계의 규칙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게 두 번째 픽션의 단서가 영화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리고 세 번째 날이 찾아온다. 남자는 노면전차 정류장에 앉아 그곳을 오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실비아의 도시에서>의 마지막 10여 분은 정류장에 앉은 남자의 시선과 그의 시선에 보이는 서로 다른 여자들의 얼굴이 교차하는 쇼트와 리버스 쇼트의 연쇄로 채워진다. 남자의 시선, 혹은 카메라의 관찰로 여자들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가고 반사된 형상 위에 남자가 뒤쫓던 실비아, 그러나 실비아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 여인의 얼굴이 디졸브된다. 남자의 시선은 모든 픽션의 세계를 바라본다. 그는 눈앞에 비친 여자들의 얼굴과 공책 속에 그려진 초상과 상상된 여인의 형상을 위계 없이 교차시킨다. 그의 눈빛에서 현실에 기록된 가시적 세계와 허구적으로 가능한 비현실의 세계는 공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연속적인 평면 위에 주어진다. 그 틈새에 우연한 만남과 필연적인 사라짐, 탄생과 부재를 포함한 영화의 모든 픽션적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다. 영화는 그 사이에서 매혹되고 오인하고 사라지는 경험의 모든 것이다. 이 장면에 <실비아의 도시에서>가 도달한 픽션적 단서의 한 성취가 깃들어 있으며 이것이 곧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