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은 평등법(Equal Act 2010) 위반으로 고소당한 적 있다. 영국 최초의 트랜스젠더(MTF) 뉴스 앵커 인디아 윌러비를 남성이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2024년 3월, 롤링은 X(트위터)에 트랜스여성의 여성 탈의실 사용을 비판하는 글을 썼고 이에 대해 한 이용자가 멘션으로 윌러비의 영상을 그녀에게 보냈다. 이후 롤링은 윌러비가 여성이 아니며 단지 “여성에 대한 여성혐오적 남성 판타지를 코스프레하고 있”을 뿐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지난 7월27일, 롤링은 자신이 여전히 같은 입장임을 강조하는 글을 올렸다: “여성은 의상이 아니다. […] 트랜스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롤링의 입장은 많은 팬들을 분노하게 했다. 일부 독자들은 쓰레기통에 처박힌 해리 포터 페이퍼백의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했다.
불현듯, 오래전 ‘초 챙’이라는 캐릭터를 보며 느꼈던 복잡한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동아시아인에게 따라붙는 멸칭 ‘칭챙총’의 연상을 피하기 어려운 작명, 남자 친구 케드릭 디고리의 죽음 이후 내내 화장실에서 울기만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이 여성 인물에게 나는 선뜻 호감을 느낄 수 없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합리화는 인종과 젠더, 장애 등의 지표를 불문하고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내’가 입은 피해와 폭력의 원인을 자신보다 열악한 지위에 놓인 이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인셀의 혐오도 같은 기제다.
롤링을 비롯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젠더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며 내세우는 명시적인 근거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 있다. 하나는 여성의 안전한 화장실 이용의 문제,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는 범주와 개념의 문제다. 이 둘은 실상 하나로 귀결되며 서로를 대리 보충하는 순환 논증을 형성한다. 페미니즘에 가해지는 백래시가 강해질수록 이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을 남성으로 분류하고 그들이 여성 혐오와 폭력의 근본적인 원흉이라고 소리 높인다. 특히 MTF들의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이 페미니즘이 오랫동안 타파하려 애써온 ‘여성성’을 다시 강화하며 여성을 억압의 역사 속으로 퇴행시킨다는 주장은 언뜻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분노의 투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논파된다. 애초에, 여성성이 과연 ‘여성’만의 것일까? 드레스와 색조 화장, 하이힐과 빛나는 장신구들은 오직 한 젠더만의 것인가? 그렇다면 바지와 슈트, 타이 또한 남성의 전유물인가?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 라펠의 검정 턱시도와 보타이를 차려입고 등장한 임수정을 떠올려보라.) 선천적인 생식기의 유무로 오직 두 종류의 젠더만 가능하다는 주장 또한 비약이다. 유엔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 인구의 약 1.7%가 인터섹스(간성)다. 성염색체가 여성(XX)의 것이어도 음경을 가지거나, 정소와 난소를 한몸에 지니기도 한다. 즉, 모든 ‘여성’이 질과 자궁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롤링이 자신의 트랜스 혐오를 처음 온라인에 공개했던 2019년, 트랜스젠더 비평가 안드레아 롱 추는 자신의 질 형성술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자매여, 나는 그대가 가진 것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갖지 못하는 방식을 원한다. 나는 그대의 풍요가 아니라 그대의 공허가 부럽다. 이제 나는 그걸 증명할 구멍을 갖게 되었다.”(<권위>, 동녘, 2026, 169쪽) 그녀가 말하는 바대로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자기 범주를 적극 거부해야 하는 역설‘구멍’을 핵심으로 지닌다. 이를 외면하는 ‘페미니즘’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혁하는 실천이 아니라 단지 이데올로기 전쟁에 참전한 하나의 진영에 불과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