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AFF] 갱신하는 질문, 확장하는 춤 - <동궁> 장혜림 안무감독

넷플릭스 시리즈 <동궁>의 태(態)가 남다르다고 느낀 건 2화 후반부다. 귀의 세계의 불당, 원귀가 된 13인의 궁녀가 대비(장영남)를 에워싸고 있다. 대비의 명으로 억울하게 소금광에 갇혀 화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다. 불길에 휩쓸려 누더기가 된 차림새인데도 궁인의 품위는 여전하다. 이들을 저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불당을 찾은 구천(남주혁)에게 일제히 달려들 때조차 기품 어린 위압감이 흐른다. 궁녀 역을 무용수들이 맡았으리라 짐작한 순간이다. <동궁>의 안무를 맡은 건 한국 전통 춤 창작 단체 99아트컴퍼니다. 2014년 창단 이후 전통 춤을 창작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며 국내외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총괄은 안무가인 장혜림 대표가 맡았다. 해가 졌는데도 30도를 웃돌던 8월 초 저녁, 예술의전당 인근에 자리한 99아트컴퍼니를 찾았다. 장혜림 대표의 안내에 따라 지하 연습실로 들어서자 차가운 기운에 숨이 트였다. 이곳에서 굳이 의자를 사이에 두고 질문과 답을 주고받을 필요는 없었다. 매트를 펴고 마주 앉아 <동궁>과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궁>은 장혜림 안무감독의 첫 시리즈 작업이다. 처음 섭외 연락을 받은 뒤 동료들과 적잖이 고민했다. “무용수는 1년 단위로 정해진 공연과 학업 일정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만큼 외부 프로젝트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동궁>은 지나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왜 반드시 우리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제작진의 진심이 믿음을 줬다. 전체 대본을 읽고 나니 안무로 풀어낼 지점들이 선명하게 보였고, 제작진이 왜 우리를 찾았는지도 이해됐다.” 그렇게 장혜림 안무감독은 조감독 두명과 무용수 48명으로 한 팀을 꾸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동궁>이 “안무라는 단어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회상한다. “무용에서 말하는 안무와 시리즈 현장에서 말하는 안무가 다르다는 걸 체감했다. 서로 방향을 맞춰가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무대에서는 긴 호흡 안에서 자기 기량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상에서는 해당 장면이 요구하는 움직임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몸을 마음껏 쓸 준비가 된 무용수들에게 절제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 차이를 이해시키는 것 역시 시리즈 안무감독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라는 걸 배웠다.”

‘13인의 궁녀’ 시퀀스에서 제작진과 안무팀의 방향성이 맞아떨어졌다. 장혜림 안무감독은 “안무가 들어간다고 해서 대뜸 각 잡고 춤을 추는 방식은 장면에도, 작품 전체에도 어울리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대신 액션배우와 무용수의 신체언어를 구분하는 데 집중했다. “엄격한 규율이 몸에 밴 궁녀들의 태도를 연구하면서 이를 어떻게 안무적으로 표현할지 고민했다. 구천의 칼에 찔려 쓰러졌다가 일어나는 순간, 치맛자락을 들어 걷는 동작 하나에도 궁녀다움이 드러나길 바랐다.” 불이라는 핵심 소재도 적절히 녹여냈다. “불에 타들어가는 상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내적으로 느껴지도록 안무를 구성했다.”

7화에서 세자(곽동연)가 불러들인 역병귀들로 귀의 세계가 아비규환에 빠지는 시퀀스는 시리즈 문법에 적응하며 안무 영역을 넓힌 결과였다. 원래 무용수 출연이 예정에 없었으나 안무팀과의 협업에 만족한 감독이 추가 작업을 제안했고, 장혜림 안무감독은 신속하게 안무를 설계했다. “당시 가장 먼저 한 질문은 ‘이 장면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구현되는가’였다. CG 비중이 큰 작품인 만큼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느새 현장에 익숙해지면서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던 것 같다.” 그는 역병으로 죽은 몸의 쇠약함과 통제력을 잃은 상태를 걷고, 기고, 넘어지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담았다. 무용수들의 조화가 빛을 발하는 장면은 역병귀들이 몸을 겹겹이 쌓아 돌무더기 같은 형상을 만드는 순간이다. 그 꼭대기에 세자가 올라서면서 왕이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응축적으로 드러났다.

장혜림 안무감독은 한편의 시리즈로 담아도 될 만큼 다채로운 무용인의 삶을 살아왔다. 조용한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맡은 무용부에 들어가면서부터 춤추는 재미를 알았다. “아버지를 따라 판소리 공연을 보고 우리 문화 이야기를 들으면 자부심이 샘솟던” 아이였기 때문일까. 민요에 맞춰 춤출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꼈고, 선화예중·고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자연스럽게 어느 무용단의 한국무용수로 활동하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그는 독자적인 안무가의 길을 택했다. “돌이켜보면 내 안에 질문이 많아서였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한국 춤 안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까.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전통 춤의 깊이를 어떻게 내 몸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다.”

당시에는 이례적이었던 개인 창작 단체 99아트컴퍼니를 설립하며 새로운 길을 열었다. “무용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나와 뜻이 같은 가까운 동년배 무용수들과 지속할 수 있는 작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만들었고,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그는 99아트컴퍼니 대표로서 ‘영혼에 울림을 주는 춤’을 모토로 <숨그네> <침묵> <심연> <제(祭), 타오르는 삶>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 5월에는 영국, 7월에는 크로아티아 무대에 올라 “국경과 상관없이 진심이 통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 춤에 대한 남다른 사명감은 비전문가를 위한 클래스를 여는 등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장혜림 안무감독이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는 뜻밖에도 정적인 실내극 <아무르>가 있다. “미하엘 하네케의 치밀한 세계를 좋아한다. 나 역시 창작자이자 연출자다 보니 보통 영화를 볼 때 영화감독이 자기 시선을 어떻게 펼쳤는지 탐구하고, 배우와 스태프와는 어떻게 소통했을지를 상상한다. 흡수하듯 많은 영화를 본 시기가 있었는데, 아이 엄마가 된 지금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 100번 넘게 본 것 같다. (웃음)”

장혜림 안무감독의 무대 작업이 궁금한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 하반기에도 다양한 공연이 예정돼 있다. 10월에는 <심연 & 에카>(은평문화예술회관), 11월에는 <피안의 여행자들>(서울무용창작센터), <제(祭), 타오르는 삶>(인천 트라이보울)이 이어진다. 특히 “‘한’을 중심으로 한 레퍼토리인 <심연 & 에카>는 공연을 로비에서 시작해 무대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성을 준비 중이라 가까이서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동궁>에서 안무로 작품의 밀도를 높인 그를 다시 시리즈, 나아가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까. “물론이다. 피부에 스미듯 잘 맞는 작품의 제안이 온다면 또 책임감을 가지고 도전해보고 싶다.”

ITEM

괄사와 아로마 오일

“해외 출장에도 함께하는 동반자다.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준다.”

FILMOGRAPHY

시리즈

2026 <동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