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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아무도 아닌 자가 간절히 귀향을 원하여, 유선아 평론가의 <오디세이>

<오디세이>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 시퀀스에는 생략된 원전의 내용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이름을 묻는 폴리페모스에게 ‘아무도 아니다’(Nobody)라는 뜻의 이름을 거짓으로 지어낸다.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렀을 때 거인이 우레와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구르자 다른 외눈박이 거인들이 몰려와 이유를 묻는다.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다가 나를 죽이려 한다’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는데 고통스러워하는 폴리페모스의 답을 듣고 필시 제우스가 내린 병을 앓는다고 여긴 거인들은 이내 그의 동굴을 떠난다.

‘아무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Nobody is killing me)의 올바른 번역과 오디세우스의 장난으로 의미가 비틀린 ‘아무도 아니다가 나를 죽이려 한다’의 문장처럼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의 플롯은 문장의 시제와 서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귀환을 기다리는 페넬로페(앤 해서웨이)와 텔레마코스(톰 홀랜드)의 위기, 갈등, 해소는 현재로,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거치는 모험은 과거, 트로이전쟁은 대과거로, 대과거보다 앞선 시점의 과거에서 페넬로페가 오디세우스에게 제안한 플래시포워드는 그것이 실현되기 전까지 미래의 가정법이다. 서로 다른 시간의 플래시백과 현재의 서사는 앞서 그것을 읊는 인물이 다음 인물을 불러내는 편집술로 시간 선이 이어진다. 만개한 꽃잎처럼 동시에 펼쳐진 현재와 과거, 대과거, 대과거-과거의 플래시백을 붙잡고 있는 그 중심부에는 놀런의 인물에게 유산처럼 대물림되고 있는 죄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일부 현대 해석은 폴리페모스에게 내려졌다고 의심되는 병을 흔히 정신적 병증과 연결짓는데 영화에서 이 병증은 폴리페모스가 아니라 오디세우스에게서 발현되는 증상이다. 현란하게 오가는 동일 사건을 바라보는 다른 시점과 흩트려놓은 시간은 때로 트로이전쟁의 여파에 놓인 여러 등장인물의 집단적 신경쇠약을 대변한다. 한신 안에서 충분한 지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단절되듯 이어지는 숏은 <오디 이>에서도 님프 칼립소(샬리즈 세런)의 섬에서 7년간 기억을 잃은 오디세우스가 겪는 혼란과 피로를 강화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물을 해석하는 방법을 구태여 빌려오지 않더라도 밀림을 헤매고 물 위를 떠도는 표류자의 서사에서 물과 정신적 병증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아귀레 신의 분노>의 아귀레는 광증에, <자마>의 자마는 신경증에 사로잡힌다. 엘도라도 정복을 꿈꾸는 아귀레에게 범람하는 강물은 미지로부터의 경고와 위협이며, 정박지를 떠나고 싶어 하는 자마에게 물은 속박과 미련이다. 아귀레와 자마 모두에게 흐르는 물살은 식민 지배의 업보처럼 밀려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끝으로 이들을 밀어넣는다. 그러나 바다 위를 10년 동안 떠돌다 마침내 고향 땅을 밟는다는 영웅담을 원안으로 삼은 영화라고 하기에 <오디세이>의 바다는 평범하고 진부한 속성을 드러내는 데 그친다. 난폭한 풍랑이 이는 바다는 섬에서 섬으로 가는 경로에 불과하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난 후 오디세우스가 남긴 감상이 오히려 그의 모험에 생생한 성격을 부여한다. 같은 맥락에서 트로이전쟁 시퀀스는 거친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포말과 물방울의 질감이나 파도의 운동성도, 전장을 삼킨 화마와 함성도 스크린에 담으려던 게 아니라면 크리스토퍼 놀런이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귀향을 선택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오디세이>

아이맥스 필름은 광대한 현실을 스크린에 확대해 보여주면서도 세부의 선명함을 잃지 않으므로 멀리 보이는 장관을 관객의 눈앞으로 끌어온다. 그래서 고대 문학 속 항해담의 원전은 거대한 파도의 스펙터클을 먼저 기대하게 하지만 영화는 그 기대를 다른 종류의 것으로 비껴간다. 여기에 괴물과 마녀의 주술을 더하면 알려진 대로 놀런이 선호하는 VFX의 의존도를 가능한 낮추는 작업 방식에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대체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놀런은 인간의 기술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구현하려는 연출자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능력이 허용하는 만큼의 실재를 카메라 앞에 놓아두고자 하는 연출자다. 동굴에서 오디세우스의 부하를 먹어 치우며 호러적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키클롭스 폴리페모스는 실물 퍼핏으로, 살아남은 부하들을 모두 돼지로 변신시키는 마녀 키르케의 주술은 애니매트로닉스로 구현된다.

이것은 그의 수공예적 제작 방식을 향한 찬미가 아니다. VFX에 완전히 기대지 않은 숏이 반드시 연출적 역량을 보증한다고 믿는 것 또한 아니다. 이미지의 사실감을 해치지 않는다면 (혹은 근래의 다수 SF영화가 그러하듯 연극 분장처럼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외계인이 이미지의 사실감을 해치는 듯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괴물의 형상이나 변신의 작업 과정이 손으로 빚었는지 VFX로 구현했는지의 차이로 영화적 성취를 가를 수 없다. <오디세이>에서 중요한 것은, 비실재의 물리적 구현과 실재하는 풍경이 맞닿아 발생하는 지대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핍진성이 자아내는 신화적 풍경이 끌어내고 있는 영화의 화법이다.

아무래도 <오디세이>는 항해와 전쟁의 원전을 가지고 물과 불의 원소가 가진 성질에 몰두하는 대신 경이와 경이를 목격하는 오디세우스를 담아내는 데 주력하려 한 것 같다. 경이의 시퀀스는 야생동물에서부터 실재하는 바다에 폴리페모스의 형상이 뛰어드는 광경까지는 오래도록 바라보지만 컴퓨터그래픽이 만들어낸 대양 한가운데의 소용돌이는 직시하지 않는다. 님프 칼립소의 고해를 듣고 기억을 되찾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부감과 앙각으로 과장되게 축소하거나 확대한 구도 또한 <오디세이>가 구사하고자 하는 문법이 영화의 옛 어투에 있다고 보게 한다. 은빛 갑옷의 라이스트리곤족과 마녀 키르케가 지배하는 섬은 경이를 목격하는 숏이 느릿하게 지나가는 환상의 무대다. 이 영화가 플롯의 배치에서 다양한 시제를 구사하듯 마술적 뉘앙스를 반복 구사하는 경이의 시퀀스에서만큼은 인간의 언어가 사라져 무성영화적 표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경이가 눈앞에 펼쳐지고 오디세우스는 그 광경을 바라본다. 그 끝에는 신탁에서 주어진 대로 부하의 죽음과 희생이 매달려 있다. 반복되는 경이는 그의 안에서 죄의식을 쌓아 올린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험에서 자신을 ‘아무도 아닌 자’로 명명하고 아무도 아닌 자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귀환하여 가장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는 존재(개 ‘아르고스’)에게 처음 정체가 드러난다. 승전의 주역이 몸을 낮추고 성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성의 정당한 주인이 마침내 돌아와 아내의 구혼자라는 이름의 정적과 변절자를 물리친다는 또 다른 승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다. 지략을 갖춘 호메로스의 영웅이 죄의식에 사로잡힌 놀런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그 죄의식의 기원을 텍스트 안에서 찾아내고자 했으나 이 의문은 적어도 <오디세이>에서 잠시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오디세우스의 죄의식에는 스크린 안에 선명하고 위엄 있는 광경을 응축하려는 창조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제스처가 겹쳐 보여서다.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오디세이>는 익스트림롱숏으로 펼쳐 보이는 공간보다 오디세우스의 몸과 얼굴, 그가 탄 배에 밀착해 경이와 희생, 죄의식과 속죄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니 이 영화에 ‘압도적’이라는 수사는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현실에서 정말로 장대한 것은 아이맥스 스크린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지 않고 너무 멀어서 손을 뻗으면 마치 잡을 수 있을 듯 작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