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자 에이미 파스칼은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새로 출발할 때마다 두 주연배우를 따로 불러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제발 사귀지는 말라고. 소용없었다. 토비 맥과이어와 커스틴 던스트도, 앤드루 가필드와 에마 스톤도, 그리고 톰 홀랜드와 젠데이아도 보기 좋게 그 당부를 어겼다. 3세대의 피터 파커가 하나같이 자신의 MJ와 사랑에 빠졌으니 저주라면 퍽 낭만적인 징크스다. 이 세 번째 커플은 약혼 소식에 이어 올여름 아예 극장가를 통째로 접수했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와 <오디세이>, 어느 상영관에 들어가도 이 연인을 마주친다. 번외로 연말엔 젠데이아가 출연할 <듄: 파트3>가 베일을 벗을 예정인데, <오디세이> <더 드라마> <듄: 파트3>까지 이어지는 젠데이아와 로버트 패틴슨의 동반 캐스팅 조합도 흥미롭다.
주말에 극장을 찾았다가 놀랐다. 발권기 앞에서 상영 시간을 고르는 가족들과 데이트 나온 연인들, 혼자 온 관객까지, 이렇게 북적이는 로비를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엊그제까지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를 걱정하고, 메가박스와 롯데시네마의 합병 무산 소식에 한숨을 쉬며, 티켓 지원 사업 소식이 뉴스면을 채우고 있었는데, 이제 사람들은 극장으로 몰려든다.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시원한 극장을 찾은 발걸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호프>에서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오디세이>로 이어진,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분명한 영화들의 연이은 개봉이 만든 흐름을 부정하긴 어렵다.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을 모은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필요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좋은 영화들의 반가운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감독이 궁금한 영화들이 있다. 김미조 감독의 <경주기행>이 마침내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고, 흉내낼 수 없는 영화만 만들어온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의 신작 <오크 스트리트의 마지막 날>도 궁금하다. 오리지널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소식은 더욱 반갑다. 제2의 ‘케데헌’을 꿈꾼다는 <고스트 밴드>의 음악이, 손끝의 감정을 그려온 안재훈 감독의 <아가미>가 전할 감성이 자못 기대된다. 마침내 국내 개봉하는 고전 호러 <위커 맨: 파이널 컷>과 올해의 호러라 불리는 <옵세션>을 겹쳐 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 경험일 것이다. 그리하여 9월 추석 연휴엔 <타짜: 벨제붑의 노래> <암살자(들)> <부활남: 더 레드> <가능한 사랑>까지 한국영화가 같은 시기 경쟁할 예정이다. 스크린에는 영화가 넘치고 극장에는 사람이 넘치는 상황. 위기라는 말을 꺼내기 머쓱해질 지경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고, 진실은 종종 막간에 깃든다. 상반기를 돌아보면 한국영화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하는 중이고 극장 산업의 침체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여름 극장에 사람이 몰리는 건 더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이 성황이 계속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현상이 아니라 구조를 봐야 한다. 개봉작이 이토록 몰리는 건 어쩌면 올해 안에 털어내야 한다는 압박의 결과, 그러니까 추석 이후의 전망을 업계 스스로 낙관하지 않는다는 방증인지도 모른다. 관객이 극장으로 돌아온 것인지, 몇편의 흥행작이 관객을 잠시 초대한 착시인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성수기의 함성이 클수록 비수기의 적막은 깊은 법이니, 축제의 소음에 가려진 그 고요를 듣는 것이 아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당장은 이 계절의 소란스러움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면 가장 가까운 피서지는 언제나 극장이었다. 표 한장이면 뉴욕의 마천루에서 3천년 전의 에게해까지 한달음에 다녀올 수 있다. 필요한 건 두어 시간의 어둠과 약간의 설렘뿐. 그 어둠 속을 실컷 떠돌다 나오면 어느새 한풀 꺾인 저녁 바람이 마중을 나와 있을 것이다. 주말 극장에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떠오른 문장. 여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가을을 준비한다. 이번주 상반기 한국 영화산업 결산이 그 길잡이 중 하나가 되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