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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자연의 순리에서 찾은 생명의 얼굴, 박윤희 평론가의 <지난 여름>

농번기를 맞이한 홍천군 화촌면의 농부들은 모를 심고, 벼가 잘 자라길 기다리고,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 최승우 감독은 그 기다림의 자세로 카메라를 들었다고 말한다. 농촌의 실제 삶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며, 잠시 농사를 지어봤다고 그 시간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이 겸허함은 연출자의 태도를 넘어 <지난 여름>이 시간을 다루는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카메라는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날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저 지켜본다.

영화는 논픽션과 픽션을 교차시킨다. 이 교차는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감각으로 흐른다. 감독이 영화 전반에 담고 싶었던 것은 생사의 순환이라는 진실이었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듯 다큐멘터리로 다가갈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관찰의 시간으로는 붙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기다려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픽션 파트를 들여, 그 안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마련했다. 이는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과 겹쳐 읽을 수 있는 지점이다. 지속은 균질한 시간의 토막들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며 흐르는 하나의 흐름이다. <지난 여름>이 굳이 논픽션과 픽션을 나누어놓고도 하나의 계절 안에 밀어넣은 것은, 삶과 죽음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같은 지속 안에서 함께 흐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큐 파트가 담아내는 마을의 질감도 이 지속의 감각을 뒷받침한다. 멀리서 유모차를 밀며 정자로 오는 노인, 논둑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민우 아버지, 마당에 있는 장독대와 낡은 텔레비전과 재봉틀. 이것들은 극적 사건이 아니라 그저 있음을 증언하는 사물들이다.

프레임 밖에서 걸어 들어오는 삶

<지난 여름>

<지난 여름>에는 모심기를 서로 돕고, 음식을 나누며, 장기를 두는 주민들의 일상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풍경을 도시인이 잠시 머물다가는 치유의 장소로 미화하지 않는다. 논에는 물을 대야 하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물꼬를 터야 하며, 가뭄과 장마 앞에서 인간의 계획은 번번이 수정된다. 축사는 소들에게 매일 먹이를 주고, 치우고 옮겨야 하는 노동의 현장이다. 이곳의 자연은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뜻과 무관하게 움직이면서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바꾸는 힘이다.

<지난 여름>에서 영화의 시간도 바로 그 힘을 따른다. 가뭄, 장마, 추수로 이어지는 시간은 어떤 극적인 사건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지 않는다. 여린 모가 초록을 더하고, 빗물이 논을 채우며, 벼가 서서히 황금빛으로 변하는 변화가 이야기의 속도를 결정한다. 76분의 러닝타임 안에 한 계절이 압축되어 있지만, 그 압축은 시간을 생략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은 변화를 오래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할머니의 죽음은 서사의 클라이맥스로 과장되지 않는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빈자리는 남고, 죽음은 극복해야 할 사건이라기보다 남겨진 사람의 몸과 장소에 오래 머무는 흔적이 된다.

<지난 여름>의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로 성급히 파고들어 감정을 확인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사람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기를 기다린다. 농사짓는 주민들의 동작은 극영화의 동선처럼 정교하게 통제되지 않고, 대화 역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 거리감은 무심함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함부로 소유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다. 물론 영화가 농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를 놓는 자리와 숏의 길이,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배열하는 편집에는 분명 연출자의 선택이 있다. 영화의 성취는 그 선택을 감추는 데 있지 않고, 선택의 범위를 인정하면서도 주민과 풍경을 미리 정해진 의미 속에 가두지 않는 데 있다.

흔들리는 프레임, 비와 햇빛이 함께 짓는 영화

<지난 여름>

민우(김민혁)와 아버지(문영동),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 느슨한 기록에 허구의 축을 만든다. 머리가 아파 약을 몇알씩 먹던 민우는 면사무소를 그만둔다. 그가 산소로 올라가는 장면을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담는다. 인물은 프레임 안에서 아주 작게 처리되고, 그가 걸어 들어오고 걸어 나가는 과정을 카메라는 개입 없이 지켜본다. 이 시퀀스의 중간 숏에는 무너진 흙더미에 드러난 뿌리와 그 아래 널려 있는 마른 나뭇가지들, 초록 풀 사이에 동강난 나뭇가지들, 초록 비탈에 홀로 검게 죽어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모두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영화는 민우의 행동과 그의 마음을 친절하게 해설하지 않는다. 그가 왜 직장을 그만두었는지, 왜 금붕어를 키우는지, 우의의 모자를 벗고 하늘을 보며 얼굴에 왜 비를 맞는지. 그 빈칸 때문에 관객은 민우의 감정을 ‘이해했다’라고 확신하는 대신 그의 시간을 함께 견디게 된다. 자연은 민우를 치유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가 세계의 유일한 중심이 되지 않도록 곁에서 계속 움직이는 현실이다. 새 지저귀는 소리, 닭 울음소리, 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 빗소리, 농기계와 발걸음 소리가 별도의 음악 없이 장면의 리듬을 만든다. 자연의 소리는 이 영화에서 사람의 감정보다 먼저 세계를 채운다. 사람이 말을 멈춰도 세계는 침묵하지 않는다. 이 소리는 농촌의 사실감을 높이는 장식이 아니라 자연의 또 다른 층위다.

트럭에 소를 싣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잠시 흔들리는 순간은 이 영화의 태도를 압축한다. 소의 몸이 예상한 동선을 벗어나 카메라쪽으로 밀려오자 안정되어 있던 프레임도 함께 뒤로 물러난다. 그 흔들림을 작품에 그대로 담는다. 그것은 거친 현실감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도,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표식도 아니다. 인간과 동물,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 무너지고, 영화가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의 힘과 맞닥뜨린 흔적이다. <지난 여름>의 카메라는 세상을 장악하기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움직임 앞에서 흔들릴 줄 안다.

마을 주민의 말처럼 농사는 사람이 모두 짓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애써 논을 갈고 모를 심어도 비와 햇빛, 바람과 시간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실에 이를 수 없다. <지난 여름>은 영화 만들기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감독은 프레임을 정하고 기다리며 편집하지만, 날씨와 주민들의 몸짓, 소들의 움직임과 빛의 변화가 영화의 다른 절반을 만든다. 여기서 ‘순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운명에 맡기는 체념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되 끝내 통제할 수 없는 몫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영화는 그 태도를 대사로 가르치기보다 기다리고 실패하고 다시 찍으며 남겨진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그래서 제목의 ‘지난’ 여름은 완전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그 여름은 황금빛으로 익은 벼 속에, 비어 있는 가족의 자리 속에, 산소로 이어지는 길과 민우가 올려다본 하늘 속에 남아 있다. 계절은 되돌아오지만, 같은 여름은 반복되지 않고, 일상은 계속되지만 죽음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 여름>이 건네는 위로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는 말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사라지는 대신 지금의 삶 속에 다른 형태로 머문다. 그리고 사람은 그 흔적을 품은 채 다시 밥을 먹고 논에 물을 대며 하루를 살아간다. 이것이 <지난 여름>이 오래 바라본 생명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