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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극도의 현재 몰입과 초근거리 미래, 최선 평론가의 <애정만세>

1990년대의 타이베이는 빠르게 팽창하는 도시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새 건물이 올라가고 집값은 급등했다. 주택은 거주 공간인 동시에 시세차익을 기대하는 투자자산이 됐다. 실거주 수요와 주택 공급 사이에 간극이 생겨 완공된 뒤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도시 곳곳에 발생했다. 차이밍량 감독은 그 빈집 하나를 골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주인공 세 사람이 드나드는 고급 아파트다. 주인이 정해지지 않아 비어 있는 장소. 영화는 그 공간에 사람의 몸부터 집어넣는다. 세 주인공은 그곳에서 자고 씻고 쉬고 사랑을 나누며 생활한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시공간과 행동만을 보여줄 뿐.

느림으로긴박함을 만드는 방식

<애정만세>

1980년대 대만 뉴시네마를 이끈 허우샤오셴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보면 개인의 삶이 가족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인물을 보여줄 때 그가 통과해온 시간도 함께 들어온다는 뜻이다. 허우샤오셴의 인물 뒤에는 가족사와 대만 현대사가 따라오고 에드워드 양의 인물 주변에는 급변하는 타이베이의 사회적 관계망이 촘촘하게 펼쳐진다. 한 사람의 현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과 연결되었는지 영화 안에 다 들어 있다. 차이밍량은 그 뒤와 주변을 대폭 비워낸다. 세 인물의 가족사와 성장 과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한 사건도 배제한다. 과거 서사가 차지할 자리를 머무는 공간과 인물의 행위로 채운다. 과거를 비워냈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어 있는 공간에 인물이 처한 상황을 빈틈없이 배치해서다. 사실 관객에겐 그들의 과거를 궁금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공간은 비어 있고 인물은 셋뿐이며 사건은 느리게 흐르고 대사도 거의 없는데 관객의 머릿속은 분주하고 마음은 초조하다. 인물들에게 닥칠 몇초 후, 몇분 후가 염려돼서다. 과거를 몰라서 그들을 이해 못할 순간은 오지 않는다. 결여가 아닌 생략이므로.

생략과 결여는 이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제거한 이유가 명확히 존재하느냐의 문제다. 샤오캉(이강생)이 왜 자살하려는지, 아룽(진소영)이 어떤 시간을 거쳐 지금의 생활에 이르렀는지, 메이(양귀매)가 왜 자신의 집을 두고 매물 아파트에서 몸을 뉘는지 정보를 주지 않는데도 관객은 지금 당장 벌어지는 상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어느 방에 누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될는지도 살펴야 하니까. 누군가가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지의 문제가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정보가 된다.

여기에서 서스펜스의 고전적인 원리가 작동한다. 등장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관객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예상한다. 아파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침대 밑에 또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관객만 안다. 이 정보의 비대칭이 긴박함을 만든다. 방과 방 사이, 침대 위와 침대 밑이라는 짧은 거리가 오래 유지되면서 사고하는 속도와 장면 속도가 다르게 움직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장면은 느린데 머릿속에서는 다음의 상황을 빠르게 계산하며 달려간다. 샤오캉이 자살에 성공한다면 흥건한 피와 사체는 누구에게 발견될지, 자살에 실패하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침대 밑에 있다는 걸 들키게 될지 어떨지를 생각한다. ‘왜?’보다 ‘어떻게?’가 먼저다. 몇초나 몇분 뒤의 초근거리 미래.

과거를 불러올 자리도, 의미도 없으므로 생략할 이유가 충분하다. 먼 미래를 내다보지도 않기에 현재가 점점 두꺼워진다. 차이밍량은 현재를 오래 지속시켜 초근거리 미래가 지나가지 못하게 붙잡아놓는다. 문이 늦게 열릴수록 문 너머를 더 오래 상상하게 되는 것과 같다. 세 사람의 사적인 욕망은 금세 버려지고 머무는 공간 또한 일시적이지만 그 현재를 최대한으로 느리게 흘려보내 불안한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도록 구속한다. 영화는 느리고 관객은 숨차다.

머물되 깃들지 못하는 사람들

<애정만세>

이들이 매물 아파트에 숨어드는 건 익명성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공간에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므로 사회적 시선이 차단된 만큼 자기검열도 느슨해진다. 샤오캉이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거나 메이가 성적 욕망을 마음껏 충족하는 행동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틈새에서 일어난다. 자기와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장소에서 평소 감춰온 자아를 꺼내는 것이다. 익명의 시공간이 열리는 동안만, 함께 엮일 미래가 생기지 않는 현재에 잠시 머물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먼 미래가 샤오캉의 직업에서는 구체적으로 설계된다. 그것도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의 미래로. 납골당 영업 사원인 샤오캉은 망자가 머물 공간을 판매한다. 가족과 함께 들어오면 적적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들어오면 마작을 하며 놀 수 있다는 식으로 죽은 자의 미래를 설계한다. 샤오캉과 메이, 아룽의 현재와 대비되는 지점으로 구천을 떠도는 건 오히려 산 자들임을 강조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현재와 미래가 다른 국면을 맞는다. 아파트를 나와 공원을 걸어가던 메이가 벤치에 앉아 울기 시작한다. 아주 오랫동안 운다. 이제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 들킬 일도 없으며 당장 수습해야 할 상황도 사라진다. 관객의 사고를 지배했던 초근거리 미래가 처음으로 힘을 잃는다. ‘어떻게?’가 사라지고 그동안 밀려나 있던 ‘왜?’가 비로소 그 자리에 들어선다. 도대체 메이는 왜 우는가.

아룽 때문일 수 있고 외로움 때문일 수도 있다. 살아온 삶 전체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때 영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본 현재를 꺼내놓게 한다.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쉬었는지, 서로에게 다가갔다가 다시 혼자가 되는 그들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눈물범벅인 메이의 얼굴에 아침 햇빛이 닿는다. 울든 말든 시간은 흐르고 현재는 새로 도착한다고 통보하는 것만 같다. 빈집을 팔고 빈집에서 쉬는 빈 몸들의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순간.

차이밍량은 빠르게 건설되는 도시 미래와 설계되지 않는 인물들의 미래 사이에 생겨난 틈, 사회적인 자아와 사적인 자아 사이에 마련된 공간, 현재와 미래 사이에 일시적으로 열린 세계에 세 사람과 관객을 가둔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도착함과 동시에 현재가 돼버리므로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미래는 세 인물을 염려하느라 내다보는 몇초, 몇분 정도뿐, 팝업처럼 열렸다 사라지는 현재를 우리는 극도의 집중력으로 최대한 몰입해야 한다. 앞선 대만 뉴시네마에서 인물의 뒤로 뻗어나가던 역사의 시간과 사회적 관계를 따라 옆으로 확장되던 세계는 <애정만세>에 이르러 현재의 빈 몸과 공간을 통해 안으로 깊어진다. 애정은 찰나에 발생하고 ‘만세’는 영원을 가리킨다. 제목은 극단적으로 다른 두 시간의 단위를 한데 묶어 세 사람의 사랑이 놓인 시간적 간극을 보여준다. 발생하자마자 스러지는 찰나의 애정에 ‘만세’라는 영원한 시간을 붙여놓은 제목. 세 사람은 ‘애정’과 ‘만세’ 사이에 놓인 아득한 틈에 깃들지 못한 채 잠시 머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