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상처로 두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지우려고 할수록 짙어지는 자국도 있다. 그 대신 살이 벌어진 틈 사이로 숨쉬기를 택한다면 어떨까. 여전히 괴롭겠지만, 타인의 고통까지 안아줄 수 있는 품이 생길지 모른다.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영화 <아가미>의 주인공 곤(정해인)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일으킨 사고로 인해 익사할 뻔한 그에게는 신비로운 흉터가 남았다. 수생동물의 호흡기관처럼 기능하는 얼룩은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동시에 고립시킨다. 어느 날 곤은 그 능력을 발휘해 다리 위에서 발을 헛디딘 해류(이청아)를 구하고, 해류는 자신을 도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호기심에 응답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곤을 거둔 노인(유재명)과 그의 손자 강하(강하늘)의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세상에 나온 책을 스크린에 데려온 이는 안재훈 감독이다. 그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에서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소나기>(2017), <무녀도>(2021) 등 한국문학에 기반한 작품을 연출해왔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의 추천으로 집어든 <아가미>를 밤새 읽으며 “내가 받은 상처보다 준 상처를 더 많이 생각”했다는 그는 예감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동료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완성한 결과물이 9월9일 극장에 당도한다. 그 협업의 기억을 복기하기 위해 <씨네21>과 만난 안재훈 감독은 손바닥만 한 수첩에 그림을 그려가며 우리의 질문에 답했다. 실개천 같던 스케치를 넓은 바다에 영사하기까지의 열의를 여기 옮겨둔다.
Scene 01 - 물속은 밤처럼 아득히
안재훈 감독은 <아가미> 콘티를 짜면서 목욕탕 단골손님이 되었다. 사무실 근처 호텔에 수영장이 있는데, 스태프들과 그곳 목욕탕을 자주 들르며 물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지 고민한 것이다. 틈만 나면 탕에 자리 잡고 앉아 자문했다. “이렇게 그리는 게 맞나?” 처음에는 “예쁘게” 그리는 것에 집중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안될 것 같았다. 아니, 곤이 처한 환경이 예쁘게 보여서는 안될 것 같았다. “찬란한 콘티를 다 갖다버렸다.” 수면 아래 잠겨 있을수록 그 속은 빛보다는 어둠에 가까워 보였고, 곤이 보낸 세월 또한 낮보다는 밤의 정서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속이 아름다워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고요해서 들어가는 게 아닐까?” 그 발견이 곤이 헤엄치는 물의 색깔, 그 곁의 물고기는 물론 곤의 머리카락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Scene 02 - 상처인 동시에 숨 구멍인
물과 함께 곤을 상징하는 테마인 아가미와 비늘은 안재훈 감독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요소다. 아가미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니 더 중요했다. 관건은 하나였다. “어떻게 해야 상처인 동시에 숨구멍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 소설에는 곤의 아가미가 “덜 닫힌 마가린 통 덮개처럼 살짝 벌어지며” 물을 흘린다고 적혀 있는데, 안재훈 감독에게는 애니메이션화할 수 있는 더 명확한 이미지가 필요했다. 먼저 물고기의 아가미를 세밀하게 촬영한 사진들을 참고해 여러 모양의 아가미를 상상했다. 평소에는 매끈하다가 특정 상황에서만 도드라지는 형태, 빈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형태, 보글보글 공기가 퍼져나가는 형태 등을 구상하다가 결정한 지금의 아가미는 누군가가 할퀴고 간 듯한 흔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붉게 칠했다.
Scene 03 - 클로즈업하기 좋은 눈동자, 충돌하기 좋은 캐릭터
안재훈 감독이 <아가미>의 캐릭터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눈이다. 그는 이번에 “원래라면 절대로 그리지 않았을 눈”들을 그려냈다고 고백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에 잘 드러나듯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 눈동자의 하이라이트를 단계별로 세밀하게 작화한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리는 데다가 넓은 의미의 표절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주로 단순한 표현을 해왔다. 그러다보니 클로즈업하기에는 아쉬웠는데, 스태프들이 이번만큼은 눈을 원 없이 클로즈업할 수 있도록 브러시 표현을 섬세하게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할 수 있겠냐고 묻자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더라. (웃음) 결과적으로도 모두의 마음에 든 눈동자들이 탄생했다. 일본풍 작화보다는 옛날에 세공한 보석처럼 예쁘게 빛나게 하고 싶었다.”
그 눈동자들이 들어선 곤의 얼굴은 미소년의 부드러움이 살도록, 강하의 얼굴은 각진 인상으로 다듬었다. 곤은 곱슬머리, 강하는 직모이기도 하다. 둘의 차이는 옷차림에서도 알아챌 수 있도록 했다. 곤이 입은 옷들은 모두 강하가 어린 시절 입던 것들이라고 설정했는데, 곤은 아가미를 가리기 위해 모자가 달린 상의를 입게 했다.
곤의 목소리는 배우 정해인, 강하의 목소리는 배우 강하늘이 맡았다. 정해인 배우를 캐스팅하는 데는 류승완 감독과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가 한몫했다. <아가미>를 감상한 부부가 <베테랑2>를 함께한 정해인 배우가 곤과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권한 것이다. 강하늘 배우에게는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홍보대사로서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보고 연락했다. 그만의 독특한 발성과 익히 알려진 선량한 캐릭터가 강하라는 거친 인물과 흥미롭게 충돌할 것 같았다고.
Scene 04 -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가는 인물들
관객에게 곤과 강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해류는 이청아 배우가 연기했다. 그는 대본 한장 한장에 밑줄 쳐가며 이야기를 자세히 분석해와 구병모 작가 특유의 문체에 생활감을 입혔다고 한다. 해류는 안재훈 감독이 특히 아끼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류 같은 성격을 지닌 분들을 좋아한다. 알맞은 거리감을 갖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분들이라고나 할까. 해류도 곤과 강하에 대한 궁금증을 부담스럽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을 뿐이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다. 그들을 떠올리며 해류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유재명 배우의 중후한 음성이 스민 노인은 어떨까. 안재훈 감독은 곤과 강하를 돌봐온 노인의 키를 어느 정도로 할지 정하는 것부터가 과제였다고 전했다. 처음 캐릭터디자인을 맡은 외국인 디자이너와 한국인 스태프들이 내렸던 전제가 조금은 달랐던 탓이다. 논의를 거쳐 지금의 사이즈로 수정했고, 수염의 변화로 세월의 흐름을 나타냈다. “동화(動畵) 작업이 까다로워 끝이 살아 있는 수염 표현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해냈다!”
노인의 딸이자 강하의 어머니인 이녕은 뮤지컬 배우로 잘 알려진 김선영 배우가 소화했다. 안재훈 감독은 김선영 배우를 보며 그가 전작 <무녀도>에서 뮤지컬 배우 소냐와 작업한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대사에 음가를 부여해 인식하는 것이 뮤지컬 배우들의 특징인 듯하다. 말도 텍스트보다는 음악처럼 이해해서인지 캐릭터에 맞는 톤을 캐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Scene 05 -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소설 <아가미>를 읽은 독자들에게 영화 <아가미>는 제법 이국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소설이 이내촌이라 이름 붙여진 한국의 호숫가 마을에서 펼쳐지는 것과 달리 영화는 유럽 시골의 고즈넉한 풍경을 주요 무대로 삼기 때문이다. 안재훈 감독은 그동안 그려온 익숙한 공간을 탈피해보고자 이런 선택을 내렸는데, 스틸 이미지로 공개된 강하와 해류의 대화 신의 배경은 이탈리아 베르나차를 모티프로 삼았다. 이곳은 픽사 애니메이션 <루카>가 모티프로 삼은 동네이기도 하다. “장소는 똑같을지 몰라도 그림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극 초반부는 프랑스 파리를 떠올리며 작업했다. “이때 등장하는 레스토랑도 실재하는 곳을 변형해 그렸는데, 그 레스토랑의 주인에게 허락도 구했다. 그분은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며 내 전작을 다 본 뒤, 자기 가게를 내줄 수 있어 영광이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안재훈 감독은 여기에 “우리만의 구름”을 찾고자 애썼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구름 표현과 다른 연필로 명상하기만의 구름을 말이다. “테두리가 딱 떨어지는 구름, 몽실몽실하게 마무리되는 구름이 아닌 하늘에 번지듯이 퍼지는 구름을 그리기로 했다. 제작이 편한 방향은 아니었다. 다만 <아가미>에 더 잘 어울리는 모양을 고수하고자 했다.”
Scene 06 - 시간이 고인 웅덩이처럼
노인의 손길이 밴 집에도 오래 공을 들였다. 노인이 난파한 배를 수거해 먹고살아온 만큼 집 안에도 마치 유람선에서 주워온 듯한 골동품들이 배치돼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 “노인이 집을 꾸미는 데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을 아닐 것이다. 그저 쓸 만한 것들을 가져다 채워놓으며 강하와 곤을 키우지 않았을까. 남들에게는 쓰레기처럼 보이고, 귀한 것은 눈에 잘 띄지도 않게 해두고 살았을 것만 같다.” <아가미> 속 소품들에 관해 설명한 안재훈 감독이 덧붙였다. “한 영화제 관객은 그런 얘기도 하더라. <헤어질 결심>을 좋아한 사람이라면 <아가미>도 좋아할 것 같다고. <헤어질 결심> 속 가공된 색감, 독특한 벽지 같은 것들을 <아가미>에서도 엿봤다는 얘기였다. 류성희 미술감독에게도 <아가미>를 보여드리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