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정 음악감독이 2021년에 출간한 에세이집의 제목은 ‘이토록 찬란한 어둠’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맘마미아> <영웅> <레미제라블> 등 뮤지컬을 잘 모르는 관객도 제목을 들어봤을 화려한 작품에 선율로, 리듬으로, 음색으로 창연한 생명을 불어넣었지만 그는 자신이 이끄는 The M.C Orchestra와 함께 조명이 들지 않는 구덩이(Pit) 안에서 암약한다. 그 어둠 속에서 뮤지컬 관객이 사랑하는 ‘라이브’가 찬란히 시작하고 또 끝난다. 김문정 음악감독의 첫 다운비트가 뮤지컬의 서곡을 열어젖히면 막이 오르고, 마지막 업비트가 엑시트 뮤직을 끝맺으면 막이 내리기 때문이다. 지난 25년간 수많은 뮤지컬 작품과 오디션 프로그램, 합창 예능 등에서 지휘봉을 든 그는 현재 뮤지컬 <겨울왕국>의 초연과 <엘리자벳>의 여섯 번째 시즌을 동시에 공연 중이다. 최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의 개막식 중계(KBS)까지 마친 김문정 음악감독을 만나 그의 지휘봉이 통솔해내는 소리의 세계를 물었다.
- 인생에서 처음 본 뮤지컬이 <아가씨와 건달들>이었다고. 그래도 장르에 대한 상식은 많은 이들처럼 뮤지컬영화를 통해 쌓지 않았을까 짐작하는데.
시작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땐 명절 때마다 TV에서 이 영화를 방영했는데 영어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가사를 들리는 대로 전사했다. ‘도 어 디어 오브 피메일 디어’(Doe(Do), a deer, a female deer)를 한글로 끄적인 거지. (웃음) 등장하는 모든 넘버를 달달 외우곤 했다. 같은 맥락에서 빅터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 역시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뮤지컬을 친숙하게 만들기도 했다.
- 스티븐 손드하임이나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토니 위너인 동시에 영화 주제가도 잘 만들어서 오스카 위너가 되기도 했다. 혹시 한국에서 만든 뮤지컬영화의 작곡가, 혹은 음악 슈퍼바이저 제의가 오면 응할 의사가 있나. 1990년대엔 <꿈의 궁전> <마법의 성> <덕이> 등 TV드라마 스코어 작곡에 일부 힘을 보탠 걸로 안다.
영광이지. 지금은 음악감독으로 디렉팅에 집중하지만 내 색깔을 가진 곡을 쓰는 일은 언제든 꿈꾼다. 그런데 창작의 기회는 늘 기쁜 동시에 고민과 갈등을 부른다. 뮤지컬 음악감독이 하는 일이 워낙 촌각을 다툰다. 내가 작곡한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 <도리안 그레이> <메이사의 노래>,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순신>도 그 촌각을 쪼개고 쪼개서 만들어냈다. 뮤지컬영화에 도전하려면 다른 종류의 다짐이 필요할 것 같다. ‘훌륭한 작곡가들이 만든 곡을 음악감독으로서 매만지는 작업이 내 소명이지’ 하면서 내 안의 창작 욕구를 잠재운다.
- 질문을 넓히자면 영화 취향도 궁금하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 전엔 음악영화를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막상 내 일이 되니 업무 이외의 시간엔 음악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쉴 때도 음악을 들으면 자꾸 분석하게 되어 피곤하다. (웃음) 장르로는 법정물, 의학물을 좋아하고 직접 출연한 적도 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같은 방송을 애청한다. 호러는 싫지만 스릴러는 즐긴다. 사람은 괜찮은데 귀신은 무섭거든. 개봉하는 한국 스릴러영화도 거의 다 챙겨 본다. 근래엔 영화 <눈동자>나 <얼굴>, 드라마 <결혼의 완성>을 재밌게 봤다. 인생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다. 막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일을 시작할 즈음 보았던 영화라 그때 느낀 순수함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근래 가장 충격받은 영화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인데…. 내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나 보다.
- 언급한 대로 전문가 관객으로서 뮤지컬영화를 볼 때 아무래도 직업병이 발동할 것 같다.
뮤지컬 원작을 알다 보니 솔직히 아쉬운 구간이 눈에 띈다. 그건 내가 라이브가 주는 생동감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배우가 코앞에서 노래를 하고 그 속에 즉각의 감정을 담아내는 행위에 오래 매료돼왔다. 그러다 보니 편집으로 잘 정돈된 뮤지컬영화가 라이브에 비해 감흥이 덜할 때가 많다. 하지만 무대가 상상력만으로 보완하지 못하는 영역을 영화가 채워주지 않나. 이를테면 영화 <영웅>에서 설희(김고은)가 <당신을 기억합니다, 황후마마여>를 부르던 때 다른 종류의 감흥을 느꼈다. 무대에선 그 장면이 그림자로 표현되는데 영화는 명성황후(이일화)가 겪은 참변이 생생하게 묘사되니 감동의 깊이가 다르더라. 내가 수차례 지휘한 작품인데도 영화관에서 마음이 아팠다.
- <이토록 찬란한 어둠>에서 정리한 뮤지컬 프로덕션의 크레딧에 따르면 음악감독은 무대감독, 기술감독과 마찬가지로 디렉팅팀에 속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배우와 마찬가지로 출연진에 속한다. 관객은 오케스트라 피트 내부를 볼 수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연주자들 또한 배우처럼 실연(實演)을 하므로 엄연한 캐스트다. 음악감독으로서 연주자들에게도 이 점을 주지하나.
오케스트라용 악보를 펴보면 종종 악상기호가 있을 법한 자리를 재밌는 단어가 대체한다. 이를테면 <이블 데드> 드러머의 악보엔 ‘더티’(Dirty), ‘스위틀리’(Sweetly) 등이 적혀 있다. 더럽게 드럼을 컴핑하거나 달콤하게 심벌즈를 때리라는 작곡가의 의무적 요청이 대본의 지문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 말들이 뮤지컬만의 센스다. 더럽고 달콤하게 연주하라는 장치가 있으면, 연주자는 무대 위 배우처럼 악기가 자신의 목소리인 양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나도 비슷한 디렉션을 건넨다.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이 분노에 차서 등장하다가 감정이 사그라질 때즈음 오케스트라에 “댄버스의 분노가 줄어든 게 오히려 큰 문제로 느껴지도록 연주해줘”라는 식의 요청이다. 웃는 신에선 함께 웃으며 연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무대 위아래에서 모두가 전폭적인 호흡으로 공연을 이끌어나간다. 영화는 전 구성원이 최선을 다해 만든 완성품을 상영본의 형태로 일정하게 극장에 걸 수 있지 않나. 뮤지컬은 매 공연이 라이브라 구성원의 최선이 언제나 동일한 에너지로 유지돼야 한다. 그래서 무대를 만들려면 체력이 중요하다. 내가 지치지 않고 기분 좋은 상태로 지휘봉을 들어야 오케스트라가 내 에너지를 받아 연주하고, 그 연주가 고스란히 배우에게 실려 관객에게 전달된다. 한번의 공연이 거대한 순환을 만든다.
- 음악감독의 넘버 분석은 배우의 넘버 분석과 기제가 상이할 것 같다. 어떻게 작품에 다가가나.
넘버의 구조를 먼저 공부한다. 내 고민과 같은 내용을 배우가 질문할 때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영웅>의 넘버 <영웅>을 예로 들겠다. 안중근으로 분한 배우가 왜 “우리가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에서 마지막 ‘록’을 고음으로 오래 지속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 가사가 고음을 싣기 까다롭대도 작곡가는 그 난관을 통해 독립운동가의 고통이 관객에게 전달되길 의도했다고 전해야 한다. 게다가 뮤지컬은 리프라이즈(Reprise, 이전에 등장한 멜로디를 반복·변주해 다시 부르는 극적 장치.-편집자)가 장르의 특징이라 매 리프라이즈의 존재 이유를 배우와 연주자에게 강조해야 한다. 어째서 반복이 필요한지, 어떻게 변주를 표현해낼지 말이다. 나는 연습 첫날 배우들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먼저 배우의 의사를 묻는다. 배우가 분석해온 넘버의 흐름을 충분히 듣고 음악감독으로서 내가 내린 해석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간다.
- 최근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뮤지컬 <겨울왕국>을 두고 “아무도 죽지 않아 행복하다”라고 밝혔다.
<겨울왕국>은 매일매일이 기쁨이다. 나이가 들었나 보다. 어린이 관객의 웃음소리가 극장을 메우면 내가 두 시간 넘게 남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진다. 뮤지컬엔 비장하고 처절하며 인물들이 목숨까지 거는 작품이 많은데 어린이들의 대책 없는 즐거움을 등 뒤로 느낄 때면 힐링이 된다. 어린이 관객들이 혹시 <Let It Go>를 떼창할까봐 내심 걱정도 한다. (웃음)
- 공연을 봤는데 역시 <Let It Go>가 나올 때 관객 반응이 가장 좋았다. 후렴구의 “Let It Go”를 그대로 음차한 선택도 납득이 갔고.
영화는 “다 잊어”로 번역됐다고 들었다. 혹시 대안을 생각해봤나.
- 그렇지 않아도 고민해봤다. 3음절 안에 “Let It Go”의 함의를 함축하는 게 쉽진 않더라.
<Let It Go>는 기준이 명확했다. 초등학생 관객까지 영문장 ‘Let It Go’를 알고 익숙하게 외운다면, 유지하는 편이 모두에게 수월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겨울왕국>은 한역한 가사를 다시 한국어의 의미 구조를 살린 채 영역해 디즈니 본사에 컨펌받는 과정을 동반해야 했다. 지금 버전이 번역과 역번역을 거쳐 디즈니의 최종 승인까지 받은 가사다. 번역은 매번 쉽지 않다. 단적으로 ‘The Phantom of the Opera’가 ‘오페라의 유령’이 되면 어순이 변하지 않나. “On My Own”(<레미제라블>)도 “나 홀로”가 되는 순간 장단 고저가 아예 달라진다. 이를 작가, 배우, 번역가와 맞추며 협업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영어처럼 각운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아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The impossible Dream>)쯤으로 종성과 조사를 맞추기도 한다.
- 마에스트라로서 좋은 소리의 기준이 있다고 보나.
예술은 정답이 없다. 고로 좋은 소리, 좋은 노래도 없다. 물론 나에게 좋은 소리, 내 취향의 노래는 존재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개인에게 최적화된 입맛에 불과하다. 내가 할 일은 그 좋은 소리의 객관성을 찾는 것이다. 다수가 좋아하는 소리를 알고 다듬어 구현해내는 게 내 몫의 일이다. 그 책임감이 막중하다.
- 수많은 뮤지컬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그중엔 2, 3년을 주기로 자주 한국 관객을 찾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좀처럼 재공연이 이루어지지 않는 작품도 있다. 후자에 속하는 뮤지컬 중 다시 지휘봉을 잡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원스>는 한번 더 만나고 싶다. 초연과 재연 사이에 10년 정도의 기간이 있었는데 꼭 다시 함께하면 좋겠다. 요새 고전 뮤지컬을 만날 기회가 적다. 그중 내가 코미디를 좋아해서 그런가 <프로듀서스>가 종종 그립다. 멜 브룩스가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으로, 2006년 한국 초연 이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음악을 만든 <뷰티풀 게임>도 지금 접하면 새로운 구석이 보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