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부문이 신설된 지 두 번째 해, 부산국 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에는 총 13편의 영화가 선정됐다. 빛나는 데뷔작을 발표한 신예 들과 오랜만에 메가폰을 든 베테랑들의 신작이 두루 초청됐으며 13편 중 11편이 월드 프리 미어다. 올해 경쟁부문은 심사위원장 장이머우 감독을 필두로 비간 감독, 배우 사말 예슬라모 바, 이시카와 케이 감독, 정주리 감독, 쩐 티 빅응옥 프로듀서, 최희서 배우가 심사한다. 축제의 끝에서 수상작이 호명되기 전 13편의 면면을 두루 살폈다.
주목해야 할 신예의 행보
어떤 말을 믿을 것인가. 어떤 현실을 받아 들일 것인가.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괴로워하던 대학원생 태주(박한솔)가 돌연 여행을 떠나 고 그곳에서 마술사 만혁(김우겸)을 만나며 계획에서 벗어난 하루를 보낸다. 임하연 감독은첫 장편 <그날의 태주>에서 태주의 하루를 두번 반복한다. 미묘한 균열과 함께 태주와 만혁 사이에 깃든 감정에도 변화가 인다. 우즈베키 스탄의 보티르 압두라흐마노프 감독의 데뷔작 <힐롤>도 부산을 찾았다. 남성으로 길러진 힐롤은 태권도 챔피언을 석권했음에도 아버지를 돌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기 삶을 잃은 채 살아온 여성이 마침내 주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담히 묘사된다. 염규복 감독은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거머쥔 원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첫 장편 <긴긴밤>을 완성했다. 경쟁작 중 유일한 애니메이션인 이 영화는 인간의 욕심으로 모든 것을 잃은 흰바위 코뿔소 노든이 자신이 품어 부화시킨 펭귄 ‘나’ 와 함께 한 여정을 그린다. 우정과 사랑, 연대로 이어진 둘의 깊은 관계가 유려하게 담겼다. 다나카 미키 감독의 데뷔작 <실버 익스프레스> 는 영화가 끝난 뒤로도 길게 논의를 이어가게 만들 영화다. 누구에게도 호감, 성적 끌림을 느껴본 적 없는 치에리(오카모토 유이)가 그와 비슷하게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쇼야(쿠리 하라 하야토)와 가까워진다. 그러나 육체적 욕망을 느끼는 쇼야와 자신 사이의 간격을 느끼고 치에리는 절망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무성애, 무로맨틱의 감정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점이 눈에 띈다.
타인과의 관계성을 탐구하는 여정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극작가, 연극연출가로 활동한 가토 다쿠야 감독은 <일요일 다음날>에서도 본인의 특기를 가감없이 발휘한다. 마이(쿠로키 하루)와 고이치(하시모토 아쓰시) 부부는 산전 검사를 기다리며 호텔로 여행을 떠난다. 호텔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마치 무대에 오른 듯 두 인물은 오가는 대화를 통해 가족의 균열을 응시한다. 데뷔작 <푸춘산의 삶>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상영된 후 두 번째 장편 <드웰링 바이 더 웨스트 레이크>로 구로사와 아키라상을 역대 최연소 수상한 구유 감독은 <처음 만난 외로움>으로 산수영화 3부작을 완성한다. 할아버지이자 아버지, 남편을 잃은 세 세대의 여성들이 상실과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신작 <사토코는 언제나> 또한 15살, 35살, 55살 등 각기 다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세 '사토코'의 삶을 다룬다. 같은 이름을 지닌 세 여성이 스스로에 관해 서술한 글을 통해 관객 또한 잠시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다. <마이 마더>에서 에디 차효노 감독은 자신이 꾸준히 탐구해 온 족자카르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미망인 수미아티(크리스틴 하킴)는 남편이 남기고 떠난 빚을 갚기 위해 외동딸을 혼인시켰고, 남편의 폭력에 지친 딸은 해외의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수미아티는 딸이 살인죄로 사형 선고받았다는 소식에 그를 만나러 떠난다. 족자카르타 여성들이 속한 비극의 굴레를 가감 없이 담은 작품이다. 요셉 앙기 노엔 감독이 추도리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다에 새겨진 이름>은 주인공 비루 라웃(레자 라하디안)이 토론 모임을 통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운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가 공권력에 의해 실종된 뒤 영화는 생존한 채 그를 기다리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민주화운동에 희생된 청년과 더불어 남겨진 주변인들의 슬픔을 통해 거대한 정치사를 직시한다.
다시 카메라를 든 베테랑
데뷔작 <여명>, 다큐멘터리 <책 종이 가위>를 연이어 발표했던 히로세 나나코 감독이 7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전작에서 인물을 설명하기보다 관찰자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그는 <비트윈 투 러버스>에 이르러 그림책 작가 우타(나가사와 마사미)가 남편 모리오(에모토 타스쿠), 편집자이자 연인인 준나(이시바시 시즈카)와 함께 가정을 꾸리는 상황을 묘사한다.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전작보다 훨씬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에 주력한다. <천국의 아이들> <참새들의 합창> <태양의 아이들> 등을 연출한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 다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빵과 책>의 주인공 솔란(알리 바게리안)은 비정규직 교사로 일하며 어머니와 지낼 집을 마련하려 한다. 정규직 전환을 받아야 대출 승인이 가능하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학교의 급식 배식이 멈추고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한다. 솔란은 학급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사회적 약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면서, 일상 속 작은 선의에서 감독은 다시 한번 인간의 존엄을 발견한다. 장편 데뷔작 <인어공주와 구두>로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대만의 리윈찬 감독이 오랜만의 장편 연출작과 함께 부산을 찾는다. <평범하기 위하여>는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던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며 본격적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아픔을 딛고 다시 가족과 일상을 되찾은 듯 보였으나 이들에게 무탈한 하루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과한 연민이나 자극적 묘사 없이 대만의 한 가족의 삶을 인내심 있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돋보인다. <들개> 이후로 13년 만에 김정훈 감독이 독특한 에너지를 품은 작품으로 돌아왔다. <면도>라는 간결한 제목처럼, 수연(노정의)의 연인 신지(가사마쓰 쇼)는 면도날에 베인 이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연인을 외면할 수 없는 수연의 두려움이 신지의 감정과 사납게 맞부딪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