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경찰에게 총구를 겨눈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동료 모건 로이스턴에게 약 5초 동안 총구를 겨눈 경찰 도미닉 게이너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로이스턴이 게이너에게 <탑건: 매버릭>을 스포일러하려 했기 때문이다. 게이너는 방아쇠에 손을 대지도 않았으며 로이스턴을 위협할 의도가 없었다고 증언했지만 총구가 주는 공포는 의도와 무관할 것이다. 3년 전 호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스포일러가 단지 반전과 서스펜스의 해석을 침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포일러는 미지의 상태에 놓인 관객의 초기 상태를 훼손한다. 텍스트에 관한 첫 경험을 박탈당하는 일이 무의식적으로 총을 들게 할 만큼 두렵고 싫은 일이라는 것, 얼마간 이해가 될 것도 같다고 말한다면 나 또한 범죄자의 심리를 가지고 있는 걸까?
OTT 플랫폼으로 영화를 보는 환경과 SNS 생태계는 섬네일 한장만으로도 우리의 경험 세계를 손쉽게 물들인다. 초고속으로 온라인화되어가는 세계에서 ‘스포’ 당하지 않고 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스포 금지’라는 문구가 스포일러가 되는 흔한 아이러니). 하여, ‘최초’의 경험은 희소해짐에 따라 더욱 신성화된다. 선택과 의지와 무관하게 갖가지 텍스트에 노출되는 세계에서 관객은 텍스트의 물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나’만의 고유한 신체적 경험을 예술로 의미화한다. 즉 서사를 아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 앎은 경험 속에서 체득되지만 그것이 곧 경험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사를 아는 상태에서도 반복이 생성하는 새로운 ‘처음’을 과정으로서 얼마든지 낯설게 경험할 수 있다.
삶과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절묘하게 겹친다. 삶은 ‘스포’ 이후-최초의 경험을 상실한 상황에서 전개되는 텍스트다. 인간은 이미 죽음이라는 결말을 아는 채로 각자의 서사를 살아가지만, 삶의 의미는 결말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향해 가는 궤적으로부터 연유한다. 작품의 가치 역시 범인의 정체와 반전을 아는 순간 실제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삶과 영화를 대우하는 우리의 자세에 따라 정해진다. 가령, 타이태닉호가 1912년에 침몰했다는 사실의 인지와 무관하게 <타이타닉>은 볼 때마다 진득한 감동을 선사한다. <세계의 주인>에 나오는 인물이 친족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미리 안다 해도 영화가 선사하는 정동의 경험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진정으로 텍스트와 밀착하는 시간은 실상 플롯이 그것의 미래를 상실한 이후의 자리에서 시작한다.
최초의 관람, 최초의 경험이 주는 자극과 충격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텍스트가 우리에게 주는 좋음의 전부가 아니며 본질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삶은 비가역적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은 우주에서 오직 단 한번뿐이다. 그러나 그 유일함은 물리적인 것일 뿐, 플롯의 미래가 종결되고 나서야 비로소 들리는 목소리와 보이는 표정, 지나간 뒤에야 이해하는 침묵과 이미지가 있다. 삶을 살아가는 일은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행위, 이미 상영된 세계 안에서 현재를 거듭하여 다르게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녕 해로운 스포일러란 누설된 줄거리가 아니라 ‘읽기’의 종결을 손쉽게 선언하는 오만한 태도일 것이다. 이미 끝난 세계를 ‘나’의 눈으로 몇번이고 다시 보는 일-그것이야말로 텍스트를 읽는,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가장 정확한 형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