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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없이 깊고 어두운 삶 속으로, ‘화란’ 송중기
송경원 2023-06-02

해사한 아이처럼 맑은 표정 뒤편에 한 자락 어두운 기운이 스쳐 지나간다. 배우 송중기는 타고난 미소년의 얼굴로 스크린을 누벼왔지만 그저 해맑기만 한 적이 없었다. 그의 밝음은 순수와 무지가 아니라 정황을 다 꿰고 있는, 오히려 너무 많이 아는 자의 씁쓸함을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드라마 <빈센조>나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다소 차갑고 무거운 면모를 선보였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처럼 보인다. <화란>은 배우 송중기의 가장 무겁고 암울한 영화로 기억될 작품이다. <화란>에서 그가 연기한 치건은 욕망마저 메말라버린, 텅 빈 인물이다. 송중기는 그 지독한 허무를 표현해보고 싶다는, 배우로서의 강렬한 열망으로 이번 작품을 택했다. 영혼마저 가라앉을 어둠을 갈망하는 배우의 눈망울이 실로 아이러니하게 반짝인다.

- 처음으로 칸의 레드 카펫을 밟았다.

= 다들 이럴 때 ‘영광이고 실감이 안 나고 떨린다’고들 하던데, 그런 뻔한 표현들을 왜 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다. 그 말 그대로의 심경이다. 칸에 출품한다고 했을 때 그냥 그렇구나 하고 의식도 안 했다. 솔직히 ‘설마 칸에 갈 수 있겠어?’ 하는 생각이 컸다. 2월 초부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로기완>을 찍고 있었는데 한창 촬영 중에 칸의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화란>으로 올 수 있어 너무 감사하고 보람을 느낀다. 정말 어렵게 찍은, 의미 있는 작품이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특히 미래의 거장을 소개하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어 너무 좋다. 칸에서 처음으로 보고 싶어서 아직 시사도 안 봤다.

- <화란>에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어떻게 출연을 결심했나.

= 정식으로 대본을 제안받았던 건 아니다. 지인과 이야기하다가 작품 제안을 받았는데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럼 너는 어떤 영화 해보고 싶냐”고 묻길래 정말 깊고 어두운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주인공은 아니야’라며 읽어보라고 주신 게 <화란>이었다. 처음 버전의 대본은 정말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정말 어른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썼을지 궁금해졌다. 그게 시작이었는데, 새삼 뒤돌아보니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떡밥을 시원하게 문 셈이다. (웃음)

- ‘낚인다’는 게 영화에서도 중요한 행동 중 하나인 만큼 과정도 범상치 않다. 그렇게 만난 감독의 첫인상은 어땠나.

= 만나자마자 얼마나 힘들 게 사셨냐고 물었다. (웃음) 다행히 감독님 본인의 경험담은 아니라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 신기하게도 극 중 등장인물의 모습이 조금씩 다 있는 분이었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연규(홍사빈) 같기도, 배다른 오누이인 하얀(김형서) 같기도 한 분이다. 본인 안의 여러 모습을 섬세하게 끄집어낼 수 있는 감독님이라는 인상이었다.

- 치건은 어떤 인물인가.

= 표면적으로는 동네 건달들의 중간 보스다. 우연히 연규를 본 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고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게 진짜 연규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촬영하면서도 이 부분을 계속 고민하면서 찍었다. 치건은 욕망이 거세된 것처럼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이다.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살고 있는 사람.

- 극 중에서도 ‘살아 있는 시체’라는 표현이 나온다.

= 맞다. 삶의 허무에 찌들어 만사가 무기력하다. 입력된 일만 수행하는 기계 같다고 해야 할까. 연규는 치건을 만나 변하지만 치건도 연규를 만나서 변한다. 그런 지점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답은 시나리오에 있더라. 시나리오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충실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 선의를 기반으로 한 행동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 영화의 매력인 것 같다. 치건에게 정말 궁금했던 질문은 ‘왜 끝까지 도시를 떠나지 않는가’다. 어느 정도 힘도, 돈도 있는 만큼 떠나지 못할 상황도 아닌 것 같은데.

= 현장에서 감독님, 홍사빈 배우와 가장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눈 부분이 바로 그 질문이었다. 치건과 연규의 가장 큰 차이는 희망의 유무다. 연규는 ‘화란’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그게 설사 잘못된 정보,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라도 상관없다. 고향을 탈출해서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게 중요하다. 반면 치건은 이미 끝난 사람이다. 닳고 닳아서 어디로 떠나고 싶다는 욕망도 이제 없는 사람. 연규가 고향을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면 치건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긋지긋한 곳에 찌들어서 이젠 떠날 용기도 내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장 비겁한 형태의 탈출을 시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매우 자학적인, 변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얼마나 사실적인지, 말이 되는지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차라리 ‘영화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 치건은 저수지에 갇힌, 어쩌면 이미 죽은 물고기 같다. 영화에서도 낚시터, 낚싯바늘, 생선찌개 등 같은 상징물들이 반복된다.

= 사빈 배우와 동태찌개를 먹는 장면이 있는데, 연규와 치건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새벽 2시경부터 찍어서 밤새도록 동태찌개를 먹었는데 끝날 때쯤엔 비린내에 전 기분이었다. (웃음) 고생한 만큼 장면이 잘 나온 거 같아 보람있었다.

- 호러영화 현장이 화기애애하다는 말이 있다. <화란>은 바닥에 달라붙을 것 같이 무겁고 어두운 영화인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 치열하면서도 평온했다. 태풍 한가운데가 고요한 것처럼. 다들 쉽지 않은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그러면서도 찍을 땐 불안감이 들지 않았다. 감독과 주연배우 모두 신인이라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적지 않았다. 노 개런티 기사가 많이 나갔는데, 사실 그것보다 얻는 것들이 훨씬 많은 현장이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숨구멍을 틔워주는 영화였다고 할까, 현장에서 힐링되는 것들이 많았다. 상업영화를 할 때 느꼈던 갈증을 해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진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 영화다운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책임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이렇게 완성된 영화가 최대한 많은 분들에게 소개되었으면 한다. 홍보를 위해 어디든 나갈 수 있다. 낚시 잡지나 낚시 TV에 나가야 하나? (웃음)

- 무척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던 것 같다.

= 만족도를 점수로 준다면 93점 정도? 내심 마음속 점수는 90점에 살짝 못 미치는 89점이었는데, 이렇게 칸까지 왔으니 4점 추가! (웃음) 배우에게 최고의 선물은 좋은 작품을 만나는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실감한 작품이다. 이렇게 칸에서 관객과 만나는 것까지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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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