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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리의 태도를 질문하는 영화들, 문제없는영화제 심사위원 대표 안재훈 감독

2011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소개된 <소중한 날의 꿈>으로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열었던 안재훈 감독은 이후 <소나기><메밀꽃 필 무렵>등 한국문학을 스크린에 애니메이션의 언어로 옮기고, 한국 무속신앙의 풍경을 흡수한 <무녀도>로 다시 한번 안시에서 도약한 바 있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원대한 꿈을 펼치는 신작 <아가미>의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는 요즘, 그를 잠시 작업에서 물러나 열렬한 관객의 자리에 데려다놓은 작품들이 있으니 문제없는영화제의 출품작들이다. 수상작 선정 후 시상식을 앞둔 시점에 심사위원 대표로 안재훈 감독이 <씨네21>을 찾았다. “사회문제에 관한 폭넓은 관심사를 바탕으로 특히 돌봄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 2025 문제없는영화제 수상작들과 안재훈 감독이 곱씹은 질문들을 전한다.

- 원래 영화제 심사를 잘 안 맡는다고.

특히 애니메이션 심사는 안 하려고 한다. 심사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정부기관 심사는 아예 안 한다. 1등을 가리는 게 아니라 축제처럼 하는 영화제의 심사는 기회가 되면 한다.

- 문제없는영화제를 어떻게 알게 됐나.

권오중 배우가 적극 독려하고 안내해줘서 정보를 찾아봤다. 첫 만남에서 영화제 구성원들의 분위기가 작은 마을의 사람들 같았달까. 나는 거절을 잘하는 편이라 그 자리에 갔다고 해서 무조건 하는 건 아닌데, 이번엔 느낌이 좋았다.

- 숏폼 부문과 단편 부문 통틀어 총 11편이 당선되었다. 각 부문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을 이야기해본다면.

먼저 숏폼 <남매의 수레>는 폐품을 파는 결손아동 남매를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클레이애니메이션이 주는 감동이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선 하나하나를 그려낸, 완벽하지 않은 것이 주는 감동,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태도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단편 부문에서는 <무국>이 여운을 남겼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 일부러 잊게 하는 영화는 잘 안 보게 된다.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시간을 잊게 하는 영화보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웃을 바라보게 하고 삶의 태도를 고민하게 하는 작품을 본다. <무국>은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소수자를 포용하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영화였다. 특히 <무국>이 무용담 같은 과장 없이 인물과 주제를 담백하게 표현하는 방식도 좋았다. 단편의 매력은 전부 다 보여주지 않고 관객이 직접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데 <무국>에도 그런 미덕이 있었다. 그외에도 가족과 돌봄노동, 아동권과 양육환경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이 다채롭게 선정되었다.

- 숏폼 심사는 처음이었나.

그래서 확실히 겁났다. 숏폼 하면 아직은 주로 광고성이거나 자극적인 작품 위주로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제 심사에 앞서 내 태도와 기준을 세우는 시간에 꽤 공을 들였다. 이를테면 우선 어떤 방식으로 작품들을 볼 것인가. 러닝타임이 짧은 만큼 여러 작품을 한번에 균등하게 쭉 몰아보고 첫인상을 판단하는 게 좋을지 등등.

-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사회문제에 관한 유효한 의식을 불러일으킨 작품도 있었을까.

층간소음을 다룬 작품이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규정이 모호한 순간이 오고 예측하기 어려웠던 방식으로 이웃간의 오해가 다루어지는 방식이 참신했다.

- 문제없는영화제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한 주제를 품은 작품들을 공모했다. 영화제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와 영화들을 심사하고 난 이후 영화제의 이름에 관한 감상은.

흥미롭게 반문하게 된다. 문제가 없다는 게 어떤 것일까. 제목 자체부터 영화제처럼 화두를 던지는 느낌이 있다.

- 이번 심사를 통해 개인적으로 관심 갖게 된 주제는.

요즘 살면서 하는 생각과도 연결되는데, 나도 이제 60살을 바라보면서 60살 이전까지는 애니메이션으로 열심히 하고, 그 이후엔 제2의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하고 있다. 거창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의 쓰임이 세상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면 좋겠다. 이번에 영화제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여러 가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애니메이션은 마음을 치유한다고 한다. 이제는 영화에서 나아가 현실에서 실용적으로 효과가 있는 일, 확실하게 누군가의 흙을 털어주는 일도 하고 싶다.

- 내년에 나올 장편애니메이션 <아가미>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가미>에 관해서 들려준다면.

구병모 작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관객들이 꼭 극장에 가서 확인하고 싶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이길 바라며 작업했다. 살다보면 자기 몸에 난 상처들을 숨기고 싶어진다. 그런 상처가 늘어갈 때마다 이러다 자신이 죽겠구나 싶은 시점도 오는데, 결국 어느 때에 이르면 그 모든 상처들이 자신을 숨 쉬게 하는 아가미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함께하는 스태프들이 먼저 이 작품을 선택하고 추천해주어서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로 고맙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우리 제작진이 모두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가 특히 뭉클하고 좋았다. 영화제 관계자들도 이렇게 많은 스태프가 다같이 영화제에 참석한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이 기운 그대로 마지막까지 세심히 만져서 내년 중순이나 하반기 즈음 선보이려고 한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아직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름다운 일들은 선명하다. 그 아름다움이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하도록, 흥행하는 애니메이션이 되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