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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연인과 싱크의 문제, 김예솔비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

니컬러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고 도망친 보위는 집으로 돌아와 키치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그 시계는 범행을 치르기 전 은행 답사를 하기 위해 골동품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보위가 키치에게 능청스럽게 묻는다. “지금 몇시지?” 키치는 답한다. “모르겠어. 이 집에는 시간을 맞출 다른 시계가 없어.” 보위가 다시 묻는다. “손목시계 시간은 몇신데?” “2시5분 전.” “그럼 얼추 맞네.”

레이의 영화에서 연인들은 시간을 갖지 않는다. 시간은 시계를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적어도 멀쩡한 시계 하나 이상을 가진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빈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 하나뿐일 때, 시간은 ‘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연인 사이의 상징적 약속이 된다. 시계를 받아든 키치는 수배자가 된 보위를 따라 야반도주에 나선다. 레이의 영화는 곧 도주해야 할 연인의 운명을 예고하기 위해 일단 그들을 시간적으로 고립시킨다. 연인은 사회적 시간에서 이탈해 도주자의 시간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보위가 키치를 향해 지금이 몇시인지 묻는 순간, 서로가 같은 시점에 동기화되어 있음을 확인한 연인의 비밀스러운 구두계약이 성립한 셈이다. <자니 기타>에서 “내게 거짓말을 해줘”가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허구를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주문이었던 것처럼, 키치의 손목시계는 두 사람이 만든 임시적 허구 속에서 (거짓) 작동한다.

보위의 “지금 몇시지?”가 상기시키는 건 연인과 싱크(로나이즈드)의 문제다. 니컬러스 레이는 연인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싱크의 순간을 어떤 ‘합일’이나 교환의 순간으로 만들지 않고, 공동의 거짓을 ‘공모’하는 순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거짓이 별도의 허구가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지닌 현실의 한축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의식하게끔 한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싱크의 문제”란 연인의 취향이나 외모의 합이 잘 맞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만든 허구의 임시적 구조를 향해 영화가 현실을 열어두고 있는지의 문제다.

<슈퍼 해피 포에버>

<슈퍼 해피 포에버>는 기묘하게도 니컬러스 레이가 제시한 싱크의 문제에 대한 응답처럼 보인다. 표면적으로 영화의 플롯은 사노가 친구와 함께 휴양지의 호텔에 묵는 전반부와 죽은 나기와의 만남을 회상하는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사노는 5년 전 8월19일 아내 나기를 처음 만났던 호텔에 묵으면서 그날을 복기한다. 한편 그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그날 잃어버렸던 빨간색 모자다. 자세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빨간색 모자는 그의 죽은 아내인 나기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기는 사노와 첫 만남을 회상하면서 호텔 로비에 앉아 잠든 사람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지던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다. 심지어 두 사람은 같은 시간에 같은 배를 탄다. 그뿐만 아니라 이름도 똑같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같은 메뉴를 시키고 똑같이 맛을 느끼지 못한다. 두 사람은 기적처럼 싱크가 맞는다. 사노는 빈티지 가게를 구경하다가 가게 근처에 떨어진 모자를 줍는다. 빈티지 가게 앞 골목에 버려져 있던 모자는 애초에 가게 안의 물건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는 이미 버려져 있던 모자를 여자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2부에서 여자는 사진을 찍다가 모자를 잃어버린다. 모자에는 분실된다는 숙명이 주어져 있는 것처럼 자꾸만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오랫동안 사라져 있던 사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자의 눈앞에 나타난 모자도 누군가가 잃어버린 채 오랫동안 사라져 있던 모자일 수도 있다. 결국 모자가 사라진다는 속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현실은 모자를 중심으로 공회전한다. 나기가 죽은 뒤의 사노를 보여주는 1부와, 나기와 사노가 첫 만남을 가졌던 8월19일을 보여주는 2부는 과거와 현재, 원인과 결과라는 선형적인 관계로 확정 지을 수 없는 모호한 구멍이 생긴다는 것이다.

<슈퍼 해피 포에버>에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요소들이 일치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일한 요소들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나기와 사노가 처음 만난 날은 8월19일. 나기가 묵은 숙소의 호수는 819호다. 나기는 여행에 함께 오지 못한 친구가 그녀의 생일을 맞아 일부러 이렇게 예약해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의 생일과 호텔 숙소 번호, 두 사람이 첫 만남을 가진 날 모두 8월19일인 것이다. 펍에서 맥주를 마시던 나기는 갑자기 무대에 나가 <Beyond the Sea>를 부른다. 그 노래는 2부에서 베트남 직원이 호텔 연회장에서 부르던 노래다. 이건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연출자가 의식적으로 1부의 요소들과 2부의 요소들 사이를 동기화시키고자 한 흔적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1부와 2부는 현재와 과거라는 인과의 관계로 정립되기보다는 요소들간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복수의 현실로 이중화된다. 극 중에서 ‘슈퍼 해피 포에버’라는 이름의 세미나를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미야타는 사노에게 “현실이 하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상실은 단일한 현실이 아니다. 상실한 것에는 이미 상실한 것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슈퍼 해피 포에버>는 영화의 구조를 통해 드러낸다.

한편 <슈퍼 해피 포에버>는 홍상수의 영화나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영화가 그런 것처럼 이중화된 현실을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앞선 두개의 현실을 봉합하는 듯한 3부가 등장한다. 3부의 중심인물은 호텔에서 일하던 베트남 소녀다. 호텔은 곧 문을 닫을 예정이고, 오늘은 그녀의 마지막 근무일이다. 소녀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캐비닛을 열 때, (설마 했지만 역시나) 그 안에는 연인이 잃어버린 빨간 모자가 들어 있다. 소녀는 모자를 쓰고 호텔 바깥으로 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기와 사노 두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보였다고 말하고 싶다.

허구가 만들어낸 여정

<여행과 나날>

<슈퍼 해피 포에버>와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은 나란히 두고 이야기하지 않기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우선 국내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접점은 제외하고서라도 두 영화에는 모두 낯선 곳으로 향한 여행자와 이방인이 등장한다. 여행자의 목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걸려있다. 앞서 <슈퍼 해피 포에버>가 빨간 모자의 행방을 중심으로 1부와 2부로 나뉘었다면, <여행과 나날>은 계절을 중심으로 대비되는 두개의 여행기가 나란히 놓인다. 차이가 있다면 <여행과 나날>에는 연인으로 확정지어지지 않는 두명의 남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연인과 싱크의 문제는 <여행과 나날>에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 이 영화에는 자신의 일상을 허구와 관계맺고 싶어 하는, 그럼으로써 허구가 일상의 경계가 거의 희박해질 때까지 둘 사이를 맞붙이려는 사람이 있다. <슈퍼 해피 포에버>의 빨간 모자만큼이나 눈여겨보게 되는 사물은 극 중에서 각본가인 ‘이’(심은경)가 쓰고 있는 공책과 연필이다. 각본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음에도 불구하고 연필과 공책을 고집한다. 사각거리는 연필이 공책을 가로지른다. “S #1. 여름, 바다.” 그러면 화면에 여름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바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써내려나가는 글이 영상화되거나 ‘영화 속 영화’라는 액자식 구조로 등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행과 나날>의 특별한 점이라고 한다면 허구로 진입하는 수단을 특권적 사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종이에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 정갈하고도 소탈한 글씨. 영화적 현실은 그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감각적으로 전환된다. 한편 작가가 써내려간 이야기 속에서 한 섬에서 시간을 보내는 소년과 소녀는 끝내 익명으로 남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을을 배회하다가 터널 너머에서 펼쳐진 인적 드문 해변에서 만나는 두 남녀의 재회와 동선은 각본 속의 지문처럼 극히 정제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 공책에 글을 끄적거리고 있던 여자가 써내려간 허구다. 하지만 도중에 영화는 이것이 꼭 바로 ‘그’ 허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저 하나의 여정으로 제시된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액자식 구조를 만드는 영화들도 있지만 <여행과 나날>은 허구를 쓰고 있는 자의 자아가 허구 속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는 이야기의 안쪽을 향해 좀처럼 개입하지 않는 슬럼프를 겪고 있는 작가의 무기력 자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행과 나날>

만화를 배경으로 여름의 각본을 다루고 있는 1부와 ‘이’가 직접 한겨울의 마을로 여행을 나서는 2부 사이에는 죽음이 가로놓여 있다. 1부의 상영회가 끝나고, 영화에 대한 평을 들려주던 교수의 얼굴이 돌연 영정 사진으로 변한.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눈앞에 나타난 것은 죽은 교수의 쌍둥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터널의 구조처럼 살아 있음의 뒤편에는 죽음이 붙어 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 2부의 겨울로 향하기 위한 하나의 터널이었던 셈이다. 미야케 쇼는 영화 곳곳에 터널을 배치해둔다. 이때 터널은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보이는 단 하나의 빛 같은 구원을 마주하게 되는 통로가 아니다. 1부의 두 남녀가 향하는 터널 너머의 바다처럼, 새로운 세계의 뒤편에는 언제나 그 세계를 무화할 어둠이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세계에 도착했다는 건, 우리의 뒤편에 우리가 지나친 터널이 있다는 의미다.

2부에서 ‘이’가 묵는 외진 마을의 여관은 어딘가 현실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지금이 아닌 것만 같다. 긴 터널을 지나 다른 시간대로 당도했던 <지구 최후의 밤>처럼 시공의 여행을 가능케 한 초현실적인 기운이 있는 걸까. 그러나 <여행과 나날>은 그런 초월성의 순간을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일은 일상의 변주 속에서 일어날 뿐이다. 여관에는 남자의 일상이 있고, ‘이’는 그 남자의 일상에 녹아들거나 녹아들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요즘 시대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 같은 화로를 가운데에 두고 두 사람은 칸막이도 없이 하나의 방을 나눠 쓴다. <슈퍼 해피 포에버>에서 과거와 현재로 여겨지는 시간의 질적 차이가 실은 동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한 복수의 현실이었음을 열어두고 있다면, <여행과 나날>에서 시간은 철저히 진공상태에 가깝다. ‘이’가 그 공간에 존재하는 한, 그가 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모두 창작의 암묵적인 재료가 된다. 따라서 그 여관에서 시간은 허구 그 자체다. 어느 날 남자가 이 여관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써보라고 제안하자 ‘이’는 이 여관의 세간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알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남자는 입을 다물고 더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이야기, 혹은 허구란 물에서 물고기를 낚아채듯 건져올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결국 얼어버린 잉어처럼 물 밖으로 나온 이야기는 더 이상 허구로서 존재할 수 없다. 허구란 따로 떼어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여정의 형식 속에서 임시로 축조된 세계다. 여자가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여자의 여행과 남자의 일상이 일종의 공모 관계를 성립해야 한다. 우정이라 불리는 것들. <여행과 나날>은 그렇게 특정한 이야기를 확정 짓지 않으면서 허구의 구조를 향해 영화를 개방해둔다. 공책 위에 글자를 적어내려가듯이, 새하얀 눈밭 위로 한발 한발 조심히 발을 파묻으며 나아가는 여자의 뒷모습은 이제 막 긴 터널을 빠져나온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쓰고 있는 걸까?

<슈퍼 해피 포에버>

어느덧 ‘프런트라인: The Passeur’ 지면에 글을 쓰게 된 지도 반년 가까이 지났다. 그간 이 지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가급적 미뤄왔지만, 이런저런 결산이 이루어지는 연말을 틈타 잠시 제동을 걸어보고 싶다.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함께) 쓰고 있는 걸까? 공동의 지면에는 공동의 의제가 있어야 할까? 지금 시점에서 섣부른 결론이나 그저 보기 좋은 의미를 도출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느샌가 동시대 영화, 그리고 동시대 영화에 대한 비평은 같은 시간선 위에 링크되는 것에 그치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

아르테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제작된 샹탈 아케르만의 <60년대 말 브뤼셀에서의 소녀의 초상>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60년대 말의 브뤼셀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가 제작된 건 90년대 말의 브뤼셀에서다. 영화 속 거리는 전혀 60년대의 외양을 하고 있지 않다. 빅터 버긴은 극 중에서 두 사람이 듣는 소니 플레이어가 당대에는 아직 발명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샹탈 아케르만은 68혁명 직전의 어지러움, 무언가가 터져나올 것 같지만 아직 무엇인지 모른다는 앎의 시차 속에서 발생하는 혼란스러움을 90년대 말의 거리에서 발견한다. 그의 영화가 전적으로 알려주듯이 동시대적 영화에 대한 비평이나 감각이 꼭 동시대에 ‘제작된’ 것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평의 싱크’란 정확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허구에 ‘공모’하는 일이다. 하나의 시계만으로도 모험은 충분히 성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