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집] 서글픔이 읽히는 그의 흰색 도포 - 프로듀서, 미술·의상 감독이 전하는 <왕과 사는 남자> 제작기

<왕과 사는 남자>가 그리는 단종은 세조에 의해 폐위된 비운의 어린 왕 이상이다. 백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나란히 앉아 평안하게 웃는다. 활쏘기에 능하며 불굴의 얼굴로 세력에 저항한다. 박윤호 프로듀서는 박지훈 배우를 섭외할 때 이 굴곡을 가장 먼저 기대했다. “그간 역사 속 단종은 유약하고 힘없는 존재로만 그려졌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속 단종은 마을 사람들에게 동화되면서 주군으로서의 면모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박지훈 배우의 슬픈 눈빛을 알기에 단종 초기 느낌은 제대로 매칭될 거라 생각했다. 다만 개혁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힘 있는 장면을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됐는데 기대 이상으로 더 잘해줬다. 불가역적인 분노가 박지훈에게 보였다.”

광천골이라는 빈곤한 오지의 촌장 엄흥도(유해진). 그가 쓰고 다니는 귀여운 둥근 모자는 탕건 계열의 모자를 기본 삼아 캐릭터 설정에 맞게 변주한 결과다. 심현섭 의상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의상 자체는 최대한 소박하고 생활감 있게 가져가되 심플한 소품이나 장식을 활용해 캐릭터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며 주요 컨셉을 설명했다. “특히 노루골 이장(안재홍)의 모자는 같은 탕건의 형태를 유지하되 극 중 설정처럼 귀향한 양반의 도움으로 마을이 점차 부유해졌다는 점을 반영해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착용하게 했다. 같은 전통 모자라도 소재만 달리해 두 인물의 환경과 위상을 구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캐릭터성이 드러나 귀여운 인상이 완성됐다.”

단종 유배의 실제 배경지인 강원도 영월. <왕과 사는 남자>의 프리프로덕션이 시작하는 동시에 헤드 스태프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청룡포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청룡포는 관광지로 거듭난 지 오래고 단종의 유배지로서 고립된 그림을 구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박윤호 프로듀서는 청룡포를 대신할 지역을 찾기 위해 전국구를 떠돌았다. “북한강, 남한강 상류부터 정선, 평창, 동강 부근, 문경, 제천, 단양까지. 태백산 줄기로 내려오는 강들부터 전국을 다 찾았다. 그런데 청령포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선돌이라는 유명한 절벽이 있다. 강이 굽이치고 땅을 품에 안은 느낌. 높은 절벽이 있어 접근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고립감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고 돌아 다시 영월이었다.”

단종의 얼굴을 한 박지훈 배우에게 가장 어울렸던 의복은 무엇이었을까. 심현섭 의상감독은 “홍위가 처음 귀양 떠날 때 입었던 흰색 도포”를 꼽았다.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한 장면이었다. 설정상 귀양 복장은 면이나 마직 소재보다 초라한 차림이 맞다. 하지만 한양에서 출발해 영월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 동안 흰색 도포가 점차 해지고 망가져가는 과정이 이홍위의 심리를 대변해줄 거라 생각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흰색 도포는 단순히 예쁜 옷이 아니라, 홍위의 내면과 서사를 함께 품은 의상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홍위의 서글픔을 그린 박지훈에게 가장 아름다운 의복으로 남아 있다.”

화려한 궁궐의 전경을 보여주기보다 일상적이고 소박한 백성들의 터전을 보여주는 <왕과 사는 남자>. 소소한 풍경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배정윤 미술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현실성을 올리는 디테일이었다. “광천골과 노루골이 등장하는 마을은 기존 초가를 모두 걷어내고 너와를 다시 세팅했다. 널빤지를 올린 다음 누름목과 누름돌을 올렸다. 곰팡이 색도 하나하나 올렸다.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판자 사이사이에 이끼도 전부 붙였다. 깊은 산속에 있는 노루골은 사냥을 위주로 하고, 강을 낀 광천골은 수렵까지 하는 마을이라고 설정했다. 그래서 노루골엔 사냥 도구와 동물 가죽을 널었고, 광천골엔 그물과 어망을 세팅하고 산나물을 말렸다. 소품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

아무도 찾지 않은 배소에 덧대진 작은 둥지. 사람 없는 건물에 필히 둥지가 있을 것이라 판단한 배정윤 미술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앵글에 잡히든 잡히지 않든 작은 디테일이 모여서 공간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생명력을 넣어준다. 이런 디테일은 영화를 즐기는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배소 담벼락 디자인만큼이나 드레싱에도 공을 많이 들였는데 오래된 집이라는 설정을 보여주기 위해 담벼락 사이사이에 죽은 넝쿨들을 박아넣었다. 군데군데 이파리도 달아줬다. 사실 황토 돌담 위에 갈색의 얇은 넝쿨 줄기라 인지가 잘 안되지만 그런 것들이 쌓여서 돌담의 밀도를 높여준다.”

엄흥도의 아들 엄태산 역을 맡은 배우 김민은 <리바운드>에서부터 장항준 감독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극 중 유일하게 활을 다루는 두 인물 엄태산과 이홍위의 설정에 따라 각 배우는 서로 다른 활쏘기 방식을 익혀야만 했다. “박지훈 배우가 사전에 트레이닝받은 사법은 왕족의 자세다. 하지만 태산의 경우 강원도 산골에 지내는 일반 백성이라 일반 사냥용으로 하는 사법이 다르다. 김민 배우는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말투, 활쏘기 등 다양한 시간을 익히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두 배우는 동갑내기라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하게 지냈다.”(박윤호)

마을 사람들의 돌봄과 애정이 느껴지는 밥상. 배정윤 미술감독은 지역성과 계절성에 맞춘 메뉴 선정부터 자체 제작한 그릇과 밥상까지 섬세하게 공들였다. “광천골 촬영과 배소 촬영을 나눠서 진행했는데 촬영 시기가 다르다보니 구할 수 있는 생선 크기가 달랐다. 제작부가 몇 시간 멀리 떨어진 어시장까지 찾아가 비슷한 크기의 생선을 공수해온 적도 있다. 따로 밥을 준비해온 뒤 가마솥에 옮겨 촬영한 적 있는데, 전기밥솥에서 해온 밥을 가마솥에 옮겼을 뿐인데 윤기가 좌르르 흐르면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니 너무 맛있어 보였다. 진짜 흥도의 눈빛으로 전 스태프가 흰 쌀밥을 바라봤다. (웃음)”

광천골은 현실적이면서도 어딘가 동화적인 정서를 지닌다.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한편으로는 환상적으로 보이길 바랐던 심현섭 의상감독은 이를 위해 마직과 삼베 같은 자연 소재를 사용해 전체 염색을 진행했다. “새 옷처럼 보이기보다 실제 삶에서 입어온 듯한 생활감을 더했다. 또 모자, 가방 등 소품 역시 기성품에 의존하기 보다는 대부분 수작업으로 제작해 인물 각자의 성격과 마을 분위기가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했다. 이런 디테일이 쌓여 작품 전체의 무드를 아늑하고 살갑게 만들었고, 그것이 <왕과 사는 남자>만의 개성이 됐다고 믿는다.”

사진제공 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