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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과감할 뻔했던, 하지만 결국 통념에 갇혀버린 – 심용환 역사학자가 본 <왕과 사는 남자>

명하여 송현수(宋玹壽)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나머지는 아울러 논하지 말도록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 <세조실록>9권, 3년 10월21일 기사 중

삼촌(세조)의 권력욕에 희생된 노산군, 즉 단종에 관한 기사는 단출하다. 장인어른 송현수가 죽자 노산군이 자살을 했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라는 내용이다. 참으로 모진 구절이다. 어린 나이에 국왕에 즉위해 자신을 돕던 수많은 사람들이 삼촌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생을 다했는데 사관은 그 죽음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예를 다했다는 말로 국왕을 변호하고 있는 모양새다. 실록의 기록이 단출한데 반해 중종 이후 등장한 문헌에는 당시의 사정이 좀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살이었다. 통인이 미처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박종우의 <병자록> 중

통인(通引)은 관아가 파견한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다른 기록에서는 공생(貢生)으로 쓰여 있다. 기록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남아 있는 문헌을 살펴보면 당일날 금부도사 왕방연(王邦淵)이 사약을 가져왔고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단종이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왕방연은 차마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얘기하지 못하며 시간을 지체했고, ‘노산군의 시중을 들던 이’가 앞장서서 활시위를 이용해 노산군을 죽게 했다는 이야기다. 남아 있는 문헌 기록의 대부분은 실록과는 다르게 노산군이 ‘타살’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상세해진다. 엄흥도(嚴興道)에 대한 기록이 대표적이다. 그는 노산군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곡을 다하고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엄흥도에 관한 기록은 숙종 때부터 상세해지다 영조와 정조 때가 되면 수차례 실록에서 반복되고 있다. 남겨져 있는 기록을 분석하면 이렇다. 첫째, 작성자가 대부분 양반 사대부라는 점. 둘째, 따라서 세조의 권력 찬탈 행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는 점. 셋째, 노산군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를 돌보았던 이들의 충절을 높이 산다는 점이다. 조선은 국왕을 통해 유교의 이상을 설파하는 국가이다. 특정한 정책을 비판하거나 연산군같이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왕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산군이 어린 나이에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게 죽었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일. 더구나 노산군은 국왕으로 즉위했던 인물 아닌가. 따라서 그의 죽음은 하층 신분이었던 통인 혹은 공생에 의한 타살로 규정됨이 마땅하다. 그래야 세조도, 단종도, 금부도사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니 말이다.

더구나 조선 후기로 가면 갑자기 ‘의인 엄흥도’의 비중이 높아져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왜? 숙종 때는 소위 조선판 ‘과거사 청산’의 시대였다. 사육신이 복권되었고 이순신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의 영웅들이 국가적으로 기림을 받기 시작했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을 주장했지만 결국 왕권 강화를 가장 중요시 여겼던 인물들이다.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은 국왕을 향한 고결한 충절 아니던가. 이처럼 단종에 대한 기록은 놀라울 만큼 정치적이다.

노산군이 유배를 간 곳은 강원도 영월. 이곳에서 전해지는 설화, 즉 구비문학에서는 흥미롭게도 ‘노산군의 자살’이 강조되고 있다. 개를 잡기 위해 통인에게 줄을 잡아당기라고 시켜놓고 본인의 목을 걸었다는 말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측면에서 문헌 기록보다는 적극적이지만 이 역시 단종의 비통한 죽음을 애도하는 수준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만큼 당시 노산군의 처지는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성삼문 일파를 처리하면서 세조의 권력 기반은 더욱 탄탄해졌고 유배를 간 금성대군은 기껏해봤자 몇몇 측근들과 교류를 시도하다 사약을 마셨으니 말이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악인으로 묘사된 통인과 의인으로 인정받은 엄흥도를 한 사람으로 묶었고 금성대군의 비루한 시도를 군사 반란으로 과감하게 그려냈으며 비참한 최후를 존엄한 죽음으로 묘사하였으니 소위 ‘정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꽤 과감한 선택을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기록에 대한 존중, 정사가 그려놓은 선을 따라가다 보니 뻔한 결론에 이른다는 아쉬움 또한 부정할 순 없다. 어차피 기록이란 지배층의 서사. 이왕에 금성대군이 군사를 일으켰다면 한양까지는 못 가더라도 여주 일대에서라도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보고 단종 또한 전장에서 장렬히 죽었다면 어땠을까? 결국 장 감독의 해석이란 1920년대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 즉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힘없는 국왕 같은 착한 국왕 콤플렉스에서 멀지 않으니 말이다.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연출의 사실성’이다. 한명회가 직접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였을까? 단종을 기리는 이들 수십명이 찾아와서 유배지에 음식을 던지면서 애통함을 표현했을까? 단종이 목숨을 끊을 때 백성들이 모여서 엉엉 울었을까? 대부분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기록에 세조는 노산군의 유배길에 각 고을에서 얼음을 바치도록 명했고 과일, 수박, 참외 등을 올리게 했다. 영화는 이런 모습보다는 ‘흰 쌀밥과 고깃국’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조선 전기 강원도 민중의 염원이 쌀밥과 고깃국이었을까? 이는 가난했던 해방기의 정서에 가깝다. 조선 후기가 되어도 닭보단 꿩사냥이 일반적이었고 돼지고기를 거의 안 먹었고 누린내 때문에 통돼지 바비큐를 만드는 모습 또한 전혀 역사적이지 않다. 더구나 방금 꺼내 입은 것 같은 고운 한복으로 가득 채워진 화면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인위적이다.

남겨진 기록을 따른다고 그것이 곧 정사는 아니다. 또한 스토리를 넘어 이제는 연출 또한 기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기록과 해석, 사실과 연출 사이에서의 고뇌. <왕과 사는 남자>는 사극에 대한 현재적 고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