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번아웃의 시대에 <마녀배달부 키키>가 재개봉한다. 마녀는 13살이 되면 수습 마녀로 거듭나 1년 동안 고향을 떠나야만 한다. 동족이 없는 타지에서 생활하며 수행을 쌓는 것이 마녀들의 규칙이다. 이제 막 13살이 된 키키는 아주 맑은 날 밤, 보름달 아래서 빗자루를 타고 수련을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웬걸, 천둥번개와 함께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며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수행 과정도 녹록지 않다. 언젠가부터 하늘을 날지 못하고 검은 고양이 지지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늘 습관처럼 해오던 일인데. 당연하게 여겨온 일들인데. 삶의 의욕이 소진된 마녀는 난생처음 무기력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고군분투의 시간을 아이맥스의 거대 화면으로 끄집어낸 이가 있으니, 바로 오쿠이 아쓰시 촬영감독이다.
현재 스튜디오 지브리 집행임원이자 영상부 부장, 이그제큐티브 이미징 디렉터인 오쿠이 아쓰시 촬영감독은 1982년 아사히 프로덕션에 입사하며 카메라 앞에 섰다. 극장판 <더티페어>로 첫 촬영감독을 맡은 후, <붉은 돼지> <바다가 들린다>를 통해 외부 스태프로 스튜디오 지브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가 스튜디오 지브리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건 1993년. 촬영부를 발족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모노노케 히메> <벼랑 위의 포뇨> <귀를 기울이면> <코쿠리코 언덕에서> 등 대중이 ‘지브리 작품’으로 인식하는 대표작 대부분을 바로 그가 작업했다. 이번 4K 리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아이맥스로 구현된<마녀배달부 키키>는 키키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관객들도 그와 함께 공중을 가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전반적으로 푸른 색상이 많이 등장하고 수직적 구도가 잦은 작품 특성을 살리는 것 또한 중요한 과업이었다. 오쿠이 아쓰시 촬영감독은 이를 두고 “필름에 담긴 정보를 남김없이 최대한 끌어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고 회상했다. “필름으로 제작한 작품을 리마스터링할 때엔 그레이딩을 활용한 색채 조정을 면밀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며 <마녀배달부 키키>도 바다와 하늘, 숲과 나무, 각 캐릭터의 피부 톤까지 풍부한 색감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아이맥스는 특히 스크린의 크기뿐만 아니라 콘트라스트와 질감 또한 일반 스크린과 다르다. 그 광활한 화면 위에 지브리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를 위화감 없이 재현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9월 <모노노케 히메>가 스튜디오 지브리 재개봉작 최초로 아이맥스 상영을 진행했다. 여기서 문득 질문이 생긴다. 왜 아이맥스여야만 할까. 스튜디오 지브리는 왜 작품 상영의 무대로 아이맥스를 선택하기 시작한 걸까. “4K 마스터 작업을 처음 착수한 것은<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때부터였다. 당시 영화관에 4K 레이저 프로젝터 도입이 확산되고 있었고, 2K 마스터 그대로는 우리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2K 마스터링 당시에는 아이맥스 스크린에 이를 올리는 게 굉장히 망설여졌다. 거대한 아이맥스로 상영하기에 충분한 정보량이 확보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4K 마스터를 제작해본 스튜디오 지브리의 경험. 그게 변환점이 됐다. 이 경험을 기점으로 우리의 구작 역시 4K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오쿠이 아쓰시 촬영감독이 꼽은, 가장 리마스터링이 잘된 장면은 바로 우르슬라의 집에 찾아간 키키의 모습.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낙담한 키키가 산속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아름답고 장엄한 우르슬라 그림 앞에 서 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마녀배달부 키키> 이후에도 <귀를 기울이면>과 <마루 밑 아리에티>가 북미로 4K 리마스터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많은 작품을 거쳐왔지만 독특하게도 <마녀배달부 키키>의 촬영은 맡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이(거의 유일하게) 작업하지 않은 지브리 영화의 4K 리마스터링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은 작품의 마스터링을 책임지게 된 부담이 컸다. 동시에 보람도 느낀다. 나는 필름 촬영 경험이 있는 오랜 촬영감독이기 때문에 그것에 담긴 시간을 잘 읽어낸다. 당시 제작진이 작품에 담았던 의도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촬영감독으로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일까. 필름을 매만지고 프레임 안에 생동하는 캐릭터를 성장시키며 그가 느낀 것은 ‘종합예술의 미덕’이었다. 애니메이션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공정을 거치며 함께 만들어가는 종합예술이다. 그중에서도 그림 제작의 최종 공정인 촬영은, 이전 공정의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들이 잘 쌓여야만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비칠 영상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디지털 제작 전환 이후에는 레이아웃, 원화, 동화 등 이전 공정의 점검 과정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가치관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이 아마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였던 것 같다. 항상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염두에 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촬영감독으로서 보낸 시간이 만 44년. 새로운 세대의 도약과 교체가 반복되는 순환 안에서 그는 다각도의 변화를 체감했다. 실제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경우 애니메이션 제작이 디지털로 전환된 지 약 30년을 지나는 중이다. “현장 스태프의 상당수는 필름 촬영 같은 아날로그 제작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과도기에는 필름에서 가능했던 것들이 디지털에서 구현되지 않는다는 딜레마도 있었다. 반대로 필름에서 불가능했던 것들이 디지털에서 가능해지면서 이러한 장점이 애니메이션 영상에 크게 반영되고 있다.” 오쿠이 아쓰시 감독은 디지털 제작의 가장 큰 문제로 ‘다이내믹 레인지의 한계’를 말했다. “오랫동안 해결 방법이 없었지만 10여년 전부터 HDR(High Dynamic Range의 약어,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최대한 가깝게 밝기 범위를 확장하는 기술) 워크플로가 확립되면서 실사나 3D CG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D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는 아직 도입 사례가 많지 않다. UHD나 대응 극장용으로 제공하는 작품도 더러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를 충분히 활용한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현실이다. 또 현실 스태프들도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도입 자체가 이뤄지기 어렵다. 촬영감독을 포함해 촬영에 관여하는 모든 공정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기술에 도전하고 영상 표현의 표현을 넓혀가야만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스터피스를 탄생시켜온 촬영감독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일까. 오쿠이 아쓰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꼽았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제작 방식을 디지털로 전환한 이후 두 번째 작품이었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서는 첫 사례여서 사실상 시스템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색 관리부터 필름 변환까지 모든 체계를 새롭게 쌓는 동시에 작업을 착수했기 때문에 잠 한번 제대로 못 잤다. (웃음) 영상적 측면에서도 디지털 표현을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친 기억이 난다. 2D에서의 수면 표현이나 작화로 표현한 증기 디테일 등 당시 장비 환경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데 그걸 또 해냈다. 일본 국내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전세계 영화제에서 수상을 거두면서 우리 모두의 고충을 상쇄시켜준 소중한 작품이었다.”
ITEM
1993년 지브리 촬영부를 발족할 때 개발한 촬영대(애니메이션 스탠드)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부터 <모노노케 히메>까지 모두 이 촬영대를 이용했다. 디지털 제작으로 전환하면서 디지털카메라로 개조하고, 현재도 배경화 같은 아날로그 소재를 디지털화하는 데 사용한다. 우리 모두의 시간이 여기에 담겨 있다.
FILMOGRAPHY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17 <메리와 마녀의 꽃>
2014 <추억의 마니>
2010 <마루 밑 아리에티>
2008 <벼랑 위의 포뇨>
2004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1997 <모노노케 히메>
1995 <귀를 기울이면>
1992 <붉은 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