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세라 영화의 촬영 방식은 독특하다. 3대의 카메라를 위계 없이 사용한다. 3명의 촬영감독은 서로가 무엇을 찍는지 모른다. 알베르트 세라도 그들이 촬영하고 있는 이미지를 모니터링하지 않는다. 주어진 대본에 맞춰 편집의 용이성을 확보하기 위해 3대의 카메라가 숏을 나누어 찍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각자 알아서 담아낼 뿐이다. 알베르트 세라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 1대의 카메라로 촬영되었다고 생각했다. <퍼시픽션>은 25일 동안 3대의 카메라가 540시간 분량을 촬영했다고 한다. 자주 등장하는 대화 장면을 보면 인물 컷은 편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사이즈의 차이가 없이 대화 장면 안에 나타난다. 편집 소스를 중심으로 촬영하는 멀티 카메라 시스템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투우를 다룬 <고독의 오후> 역시 3대의 카메라로 찍혔지만 카메라 1대로 촬영된 것처럼 보인다. 3대의 카메라가 같은 사이즈를 잡는 경우가 많고, 다른 사이즈를 잡아도 그 차이가 크지 않아 3대의 카메라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세라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망원 줌렌즈를 사용한다. 카메라 3대가 피사체와 거리를 둔 채 각자 알아서 촬영할 때 가장 용이한 렌즈 선택이다. 물론 이 방식은 비효율을 낳기도 한다. 일반적인 제작 시스템이라면 과정의 낭비로 여겨질 중복이 반복된다. 그러나 세라의 영화는 바로 이 중복 위에서 성립한다. 3대의 카메라가 서로 다른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 하나의 세계를 반복해서 응시한다. 카메라는 정보를 분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3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움직이지만 어느 카메라도 중심이 되지 않는다. 1대의 카메라가 끝없이 세계를 더듬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퍼시픽션>은 3명의 촬영감독이 각자의 이미지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해 작고 가벼운 블랙매직 6K 포켓카메라를 선택하고 슈퍼16 센서용 방송용 줌렌즈를 장착하여 촬영한다. 이 렌즈의 이미지 영역은 카메라의 센서 크기보다 작아 실제 촬영 시 크롭 모드로, 센서의 40% 내외의 영역만 촬영이 가능하다. 이 기술적 조건이 망원렌즈와 함께 세라의 미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미지가 기록되는 면적이 작아질수록 심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망원렌즈가 인물을 배경으로부터 분리한다면 세라의 망원렌즈는 오히려 인물과 풍경을 하나의 덩어리로 압축한다. 타히티의 풍경과 주인공이 분리되지 않고 한 프레임 안에 모두 선명하게 포착된다. 세라는 카메라의 센서를 작게 사용하여 깊은 심도를 만들고, 동시에 망원렌즈로 인물과 타히티의 자연 풍경을 밀착해 붙여놓는다. 거대한 자연 풍경과 인간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 거대한 위험과 고도의 정치가 섬을 둘러싸고 있지만 세라가 보여주는 것은 짙고 붉은 석양과 높은 파도가 치는 바다, 눅눅한 습기, 클럽의 불빛과 음악뿐이다.
이런 배치는 영화의 주요 색감인 핑크와 마젠타의 인위성과 맞물린다. 세라의 말처럼 타히티의 풍경은 현실이 아닌 하나의 ‘엽서 이미지’가 된다. 인위적인 카메라 필터로 분산되는 낮의 빛, 부서지고 번지는 밤의 실내등, 인간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이질적인 노을빛은 현실의 장소를 낙원의 이미지로 변환하면서, 그 낙원마저 인공적인 환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결국 세라의 타히티는 실제 공간과 관광 엽서, 현실과 환상, 낙원과 권력, 환상과 폭력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분위기로만 존재한다. 세라는 크롭 센서의 깊은 심도와 망원 줌렌즈의 압축, 인위적인 색보정을 통해 드 롤레와 타히티의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묶어버린다. 인물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서로 구분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서사는 소거되고 오직 ‘분위기’라는 감각만이 스크린에 남도록 만든다. 드 롤레는 공간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권력이 아니라, 그 분위기 속에서 부유하다가 자연의 일부로 전락하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고독의 오후>에서도 깊은 심도와 3대의 카메라, 극단적인 망원 줌렌즈로 투우사와 황소, 경기장의 펜스를 하나로 압축한다. 영화의 시간 순서는 인과적 선후관계를 배반한다. 영화의 시작, 밴 안에 투우복을 입고 땀을 흘리며 앉아 있는 안드레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투우장으로 가는 긴장된 모습처럼 보였던 장면은, 이후 호텔 방 안이 비치며 투우가 끝난 이후의 상황임을 알게 된다. 타이틀 등장 후 카메라는 다시 밴 안으로 들어간다. 긴장된 표정의 안드레스가 보이고, 이어서 투우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역전된 편집 순서, 자동차 안과 투우장의 반복 구조는 어느 시점부터 영화 전체의 선후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선형적 시간성을 무너뜨리며 영화 전체를 인간의 보편적 의식 체계로부터 떼어놓는다. 투우사와 황소, 경기장을 구별 불가능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린다. 투우사 안드레스는 황소에 몸을 들이받히고 짓밟혀도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참고 견딘다. 황소 역시 투우사의 창과 칼에 찔려 붉은 피를 쏟아내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오로지 인간의 신체와 소의 신체, 두 물질성만이 남아 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안드레스는 인간의 표정이 아닌 황소와의 기싸움에서 이기려는 듯 성난 소의 표정을 짓는다. 반면 황소는 칼과 창에 찔렸지만 표정은 평온 하다.
첫 번째 투우에서 입장부터 퇴장까지 관객들을 투우의 현장에 참여하도록 길게 보여준다. 반면 이어지는 두 번째 투우는 투우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배치되어 있다. 첫 번째 투우를 마친 후, 영화는 반복적으로 밴 안에서 파란색 거즈 옷을 입은 안드레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오프닝처럼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컷은 경기장 안 빨간 스타킹과 검은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투우복을 입은 투우사의 신체를 발끝부터 얼굴까지 클로즈업으로 훑어 올라간다. 컷의 끝에 도달한 얼굴은 안드레스다. 경기를 마친 뒤 고통스러워하는 ‘블루’의 상태에서 다시 새 경기를 시작하는 ‘레드’가 스크린에서 충돌하며 연결된다. 대기실에서 비 오는 경기장 안을 바라보는 안드레스의 얼굴 뒤로, 이미 경기가 한창 진행되어 창에 찔려 쓰러지기 직전의 황소를 보여준다. 결국 쓰러진 황소는 끌려나간다.
첫 번째 투우와 달리 두 번째 투우는 더 짧게 다뤄진다. 숏 사이즈 역시 다르다. 클로즈업 컷을 교차로 배치하며, 황소가 투우사에게 창과 칼에 찔리는 장면은 생략하고 그 자리에 움직임을 멈춘 황소의 발 클로즈업이 들어온다. 두 번째 투우의 시작이 안드레스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기 속에서 황소의 ‘발’ 클로즈업은 대칭을 이루며 서로 연결된다. 죽은 황소가 경기장 밖으로 끌려가고 관객들의 환호가 들려온다. 안드레스가 손을 흔들며, 세 번째 투우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두 번째 투우 끝과 세 번째 투우의 시작을 클로즈업 컷으로 매치컷하여 두 경기 사이의 구분을 잠시 흩뜨려놓는다. 세 번째 투우에서야 앞선 두 번째 투우에서 생략된 황소와의 마지막 싸움이 온전히 묘사된다.
네 번째 투우. 안드레스가 황소에게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하고 뿔에 받히고 짓밟힌다. 다시 일어서는 안드레스는 투우에 임하지만, 이번에는 더 거칠고 세게 들이받는 황소에 의해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투우복은 찢어지고 한쪽 다리를 절뚝거려 걷기조차 불편해 보인다. 그의 머리에는 황소의 피가 엉겨 붙어 있다. 황소 역시 피를 계속 흘린다. 둘이 경기장 가운데 다시 마주 선다. 안드레스의 얼굴에 묻은 피가 황소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 그의 옷이 원래 붉은색인지 황소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든 것인지, 검은 황소의 등은 흘러내리는 피로 더 붉어지고 안드레스가 황소를 자극하기 위해 흔드는 붉은 천은 황소의 핏자국들로 군데군데 더 검붉게 보인다. 마치 안드레스의 투우복처럼 말이다. 붉은 피를 가득 흘리며 황소가 쓰러진다. 이어지는 컷은 극단적 망원의 안드레스 미디엄숏이다. 그가 손을 들어올린다. 경기장의 붉은 배경과 붉은 복장, 피로 얼룩진 투우사의 얼굴 위로 피 흘리는 황소가 겹친다. 과연 누가 황소이고 투우사인가.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설명하며 인간을 재현하는 인물이 아니라 감각을 전달하는 형상으로 이야기한다. 세라의 영화 역시 인간과 황소를 이야기의 등장인물로 다루지 않는다. 투우사와 황소는 더 이상 심리와 서사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충돌하는 힘과 감각의 형상이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가 아니라, 두 신체가 하나의 장 안에서 어떻게 뒤엉키고 변형되는가이다.
네 번째 투우는 러닝타임의 정확히 절반 부근에 있다. 투우가 끝나면 안드레스가 숙소에서 투우복을 입는다. 투우복 안의 옷은 눈부시게 하얗다. 양말을 신고, 바지 밑단을 채우는 클로즈업 컷들은 앞서 투우장에서 보여줬던 발의 클로즈업과 붉은 양말을 상기시키며, 이미 지나간 경기를 앞으로 당겨오기도 하고 앞으로 만날 경기를 예견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 이후의 투우들은 점점 더 짧아지고 서로의 경계를 잃는다. 동일한 복장과 색보정, 안드레스의 얼굴을 매개로 한 연결 편집은 각각의 경기를 하나의 연속된 사건처럼 묶어낸다. 후반부로 갈수록 화면은 붉음에서 황금빛으로 이동하며 투우사와 황소, 경기장 바닥을 하나의 색채 덩어리 안에 놓는다. 마지막에 이르면 어느 투우가 어느 날의 경기인지, 안드레스의 시선이 어떤 순간을 바라보는지조차 확정할 수 없게 된다. <고독의 오후>가 지닌 핵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건들의 구분뿐 아니라 시간의 구분마저 지워버린 것이다. 인간의 의식으로 보지 말 것, 어떤 경계나 틀로 나누지 말 것, 피아를 구분하지 말 것, 인간의 보편적 인식이나 인간 중심적 자의적 판단에 영화를 두지 말 것.
알베르트 세라는 촬영 전까지 한번도 투우를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사전조사조차 하지 않아 백지상태였기에, 투우를 인간의 가치판단 너머 오직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눈을 통해 ‘날것의 물질 덩어리’로 포착했다.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카메라의 물질적 지각으로 영화를 구성한다. 세라의 망원렌즈는 공간 내 여러 사물 중 창작자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대상만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이미지들을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사체나 대상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배경과 피사체, 또는 피사체와 피사체간의 간격을 없애며 둘 사이 구분이 불가능한 지점으로 안내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세라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세계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를 설명하고 분류하고 판단하려는 습관을 정지시키는 장치다. 낙원과 식민, 인간과 황소, 과거와 현재, 배경과 피사체, 승자와 패자라는 구분이 무너진 자리에서 카메라는 물질성으로 우리의 감각을 열어준다. 세라는 카메라의 지각으로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함께 발견하고 만나는 여정 자체가 영화임을 증명해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