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지금도 망설여지는데 메카닉 전투 신만큼은 에스카플로네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갑주형 로봇 가이멜레프의 검을 맞부딪칠 때의 무게감은 물론이고 검격의 각도와 장갑이 구겨지는 질감까지 일일이 손으로 그려낸, 가히 변태적인 작화는 지금 다시 봐도 경탄이 새어나온다. 와, 저걸 어떻게 그렸지? 돌이켜보면 그 시절엔 <아키라>처럼 80년대 버블 시대의 돈과 인력을 갈아넣어 만든 전설의 애니메이션들을 찾아보며 똑같은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경이의 순간은 그렇게 세대를 건너 대물림된다.
오늘날 동아시아 애니메이션 시장은 겉보기엔 유례없는 성장세다. 중국에선 <너자 2>가 비할리우드영화 최초로 단일 시장 흥행 10억달러를 돌파하며 자국 역대 1위에 올라 여러 기록을 갈아치웠다. 일본은 또 어떤가. 지난해 일본영화 흥행의 절반 이상이 애니메이션의 몫이었다. 흥행 100억엔을 돌파한 네편 중 세편이 애니메이션이었고 은 일본영화 역대 1위를 다시 썼다. 2024년 기준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규모가 3조8천억엔을 넘겨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는데 무엇보다 그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였다는 점에서 재패니메이션의 도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놀라운 숫자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성취는 우리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벽 너머의 일이다. 자국 시장 안에서 완결되는 저 거대한 내수는 부럽긴 하지만 우리의 활로가 될 순 없다. 일본의 사정은 다른 의미로 서늘하다. 흥행 상위작 전부가 TV시리즈와 만화 IP의 극장판, 즉 확장판이다. 지난해 흥행 10억엔을 넘긴 애니메이션 14편 가운데 순수 오리지널 극장판은 정확히 0편. 오리지널 극장판은 절멸 직전이다. 호소다 마모루의 야심작 <끝이 없는 스칼렛>은 6억엔대에 그치며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7년에 걸쳐 작화 10만장을 그려넣은 스튜디오 4°C의 <ChaO>는 2025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지만 정작 개봉 첫 주말 1500만엔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한국은 이런 걸 이야기할 상황조차 못된다. 이번 여름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이 전작의 124만 관객 신화를 이어받아 극장에서 선방하고 있지만 한손에 꼽을 성공 사례를 빼고 나면 오리지널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기획조차 드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새로운 제작의 물결은 쉬지 않고 이어진다. 홍대 앞을 누비는 밴드 애니메이션 <고스트밴드>에 이어 손끝의 감정을 그려온 안재훈 감독의 <아가미>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13년 <사이비> 이후 13년 만에 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염규복 감독의 <긴긴밤>과 허범욱 감독의 유작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도 궁금하다. 수년의 시간과 수만장의 그림, 불투명한 미래와 실패의 위험을 담보로 잡히고서야 겨우 시작할 수 있는 도전을 목격한다. 척박하고 적대적인 시장 환경에도 불구하고 손끝에 깃든 애니메이션의 꿈은 기어이 이어진다.
애니메이션은 애초에 셈이 맞지 않는 예술이다. 1초를 위해 24장을 그리는 동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질감을 위해 긴 밤을 지새우는 일이다. 1초면 AI가 딸깍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는 시대에도 기꺼이 먼 길을 돌아가는 밤. 그 무모한 낭비가 스크린 위에서 경이로 바뀌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은 결국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숫자가 낭만의 반대편에서 서운하게 계산기를 두들길 때도 할 수 밖에 없는 일과 해야 할 일은 계속된다. <아가미>의 개봉을 앞두고, 이 꿈을 상속해온 건 결국 시장의 숫자가 아니라 낭만의 기억이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꿈을 향한 밤이 극장의 어둠 속에서 영원히 이어지길 소망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