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경쟁 6편
<로이 온 더 로드>
장권호/2026년/59분59초/12세이상관람가
태평양에서 히말라야를 거쳐 우주로 뻗는 여정의 중심에는 서로에게 돌아가려는 두 존재가 있다. 테스트봇 로이는 한나를 만나 의식을 얻지만 그 만남은 한나의 가족에게 비극을 남긴다. 한나의 유일한 가족이 되고 싶어 인간을 꿈꾸는 로이는 신을 찾아 떠난다. 한편 한나는 반로봇 무장단체의 저격수가 되어 복수를 준비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준 존재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인간을 꿈꾸는 기계 앞에 증오를 배운 인간을 세운 <로이 온 더 로드>는 거대한 세계를 횡단하면서도 가족이 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놓지 않는 SF 우화다.
<49일의 환생 여행>
안하라/2026년/30분36초/전체관람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민석에게 49일의 여정이 주어진다. 환생문에 닿으려면 일곱 정거장을 지나며 생의 기억과 미련을 내려놓아야 한다. 뒤따르는 검은 괴물이 그가 버린 것들을 삼키는 가운데 마지막 정거장 앞에서 민석은 무엇을 놓고 무엇을 지킬지 선택해야 한다. 기억을 버려야 나아갈 수 있다는 설정은 이별의 어려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괴물의 추격보다 궁금한 것은 민석이 끝내 간직할 마음이다. 죽음 이후의 여행에 살아가는 이유를 담으려는 안하라 감독의 관심이 여기에 있다. 상실을 통과하는 이에게 건네는 판타지.
<배짱>
임예준/2026년/32분26초/12세이상관람가
월스트리트의 잘나가는 트레이더 루카스는 사실 AI가 실시간으로 만들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이다. 어느 날 이웃의 고독사로 매끈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자 그는 자신이 지나쳐온 삶을 돌아본다. 이윽고 루카스는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와 평범한 아무개가 되는 일을 택한다. 성공을 향해 달리도록 만들어진 인물이 자기 속도를 찾는 과정을 따라가는 <배짱>은 AI영화가 자신의 제작 방식을 이야기 속에 들여놓고 삶의 주도권을 묻는다. 제목의 ‘배짱’은 남보다 앞서려는 용기보다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는 용기에 가까워 보인다.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타임트리 AI 기술상 수상작.
<메아리도 없이>
오기형/2026년/58분3초/15세이상관람가
1988년 서울.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해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하루를 버틴다. 그의 위안은 미국행을 준비하는 윤희다. 어느 날 발견한 그림 한점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자 소문은 어느새 폭력으로 번진다. <메아리도 없이>는 말할 자리를 얻지 못한 마음에 귀 기울이는 작품이다. 올림픽을 앞둔 도시의 바깥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졌는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는 익숙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화가 출신 감독이 택한 그림의 모티프도 눈길을 끄는 가운데 미싱 소음과 소문 사이에 놓인 사랑이 개인의 감정을 사회의 풍경으로 넓힌다.
<그대가 팔 수 없었던 기억에 대하여>
오일석/2026년/30분22초/12세이상관람가
죽은 이들이 모두 도착하는 천국에도 등급이 있다. 망자들은 일을 하거나 생전의 기억을 팔며 살아간다. B등급의 K는 지도국에서 일하다 최하층 E구역에서 아버지를 발견한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 A등급에 오른 그는 천국의 실체를 마주하고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나선다. 사후 세계의 판타지를 연민과 화해의 이야기로 승화한 <그대가 팔 수 없었던 기억에 대하여>는 죽어서도 계속되는 경쟁을 통해 삶의 가치를 묻는 설정을 중심으로 오래 미워한 가족을 다시 이해하는 시간을 그린다. 팔 수 없는 기억이란 결국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관계의 다른 이름으로 남는다.
<에브리데이 히어로즈>
리쩌쿤/2026년/34분21초/전체관람가
초능력자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경찰관 리커의 능력은 소박하다. 박수를 쳐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다. 거창한 능력과는 거리가 먼 그는 황당한 일상의 문제들을 만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웅이 되어간다. 중국 판타지 액션 코미디 시리즈의 첫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작은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 설정이 영웅 이야기의 문턱을 낮춘다. 주어진 힘의 크기보다 그것을 쓰는 사람의 마음을 본다. 누구나 가진 사소한 재주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 제목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는 영웅을 발견하게 하는 유쾌한 출발이다.
단편 경쟁 12편
<엄마 눈에만 예쁜 얼굴>
로버트 고데트/2026년/7분50초/전체관람가
마르셀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엄마의 말을 믿는다. 당당하게 파리 거리를 걷지만 세상은 그의 얼굴을 피한다. 핼러윈 밤에 이르러 오래 그를 지켜본 여자가 곁에 앉는다. <엄마 눈에만 예쁜 얼굴>은 사랑받으리라는 믿음이 마침내 다른 마음과 만나는 이야기다. 외모에 대한 판단을 거두면 마르셀의 기다림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영화는 누군가의 눈에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은 소망을 가만히 품는다.
<드니프로 강 이야기>
왕이/2026년/12분31초/전체관람가
2026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선. 드니프로강 기슭에서 길을 잃은 병사에게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다. 자신의 앞길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이 다시 위험을 짊어져야 하는 상황, 한 병사의 막막한 자리에서 거대한 전쟁을 바라본다. AI로 구현한 전장 너머에는 실제로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그 거리를 헤아리며 낯선 땅의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걸음이 진심으로 다가온다.
<올리브나무 아래서>
박효순/2026년/24분56초/전체관람가
전쟁 속 아이들이 다친 고양이를 안고 과학자를 찾아간다. 정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에 예수의 흔적을 좇던 아이들은 올리브나무 아래서 한 존재를 불러낸다. 그는 사람들 곁에 머물며 장벽을 가리킨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는 바람으로 과학과 종교를 연결 지은, 대담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 기적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절박함이 오래 남는 가운데 작은 생명을 돌보는 마음은 전쟁의 부당함을 묻는 데까지 나아간다.
<고양이의 일생>
천진넝/2026년/11분58초/전체관람가
가족의 죽음을 마주한 소년. 그가 사는 곳에는 죽은 고양이를 산속 나무에 매다는 풍습이 있다.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의 눈에서 이야기를 시작한 <고양이의 일생>은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험과 낯선 죽음의 풍경을 어린 시선 안에 포갠다. 처음 겪는 상실 앞에서는 누구나 조금 어린 사람이 되기 마련이라 소년이 바라보는 풍경 곁에서 관객도 자신의 오래된 슬픔을 돌아볼 자리를 얻는다.
<칩타이드>
에마누엘레 다이노티/2025년/8분52초/전체관람가
구글과의 계약으로 벨기에 해안이 AI 연산을 위한 냉각장치로 바뀐다. 인류는 서버를 옮기기보다 사람들을 수몰시키는 편이 비용이 절감된다는 계산 아래, 노동자들은 몸을 개조한다. 그 와중에 예측 모델이 보지 못하는 틈이 나타난다. AI로 만든 영화가 그 기술을 떠받치는 노동을 들여다본다는 점을 흥미롭게 파고든 <칩타이드>는 기술의 편리함을 위해 누가 비용을 치르는지 날카롭게 묻는다.
<뉴먼>
김다은(킴닥스)/2026년/25분/12세이상관람가
뉴먼 코퍼레이션이 등장한 세계에서 여성은 둘 중 하나의 길을 간다. 출산을 맡거나 생식기능을 없애고 고소득 노동자가 되거나. 스테이션에 입소한 하늘은 어느 날 탈출을 부탁하는 다미를 만난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까지 남은 시간은 사흘. 몸의 문제를 생산성으로 환산하는 세계관이 서늘하다.
더 웰
도리안 & 다니엘/2026년/5분32초/12세이상관람가
눈 덮인 트레일러 파크의 우물에서 늑대가 죽은 채 발견된다. 사람들은 사고라고 말하지만 토끼가 사건을 파고들수록 설명에 틈이 생긴다. 익숙한 동화 속 동물들이 범죄 미스터리의 주인공이 됐다. 그렇게 늑대와 토끼에게 덧씌워온 역할을 바꾸자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선입견도 드러난다. 누가 위험한 존재인지는 겉모습으로 알 수 없다는 진실을 고발하는 동화는 누아르와 겹쳐져 묘한 호기심을 끌어낸다.
<세상 아래 첫 속삭임>
거다/2026년/13분8초/전체관람가
군인 선모는 쥐 떼가 도시를 뒤덮자 의식을 쥐의 뇌에 옮기는 실험에 자원한다. 시장과 신전을 갖춘 쥐의 도시가 있는 지하에서 선모는 자신의 정체를 뒤흔드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작은 동물의 몸으로 옮겨간 시선이 지상의 질서까지 낯설게 만든다. 잠입의 긴장 속에 정체성의 수수께끼를 심은 SF <세상 아래 첫 속삭임>은 버려진 실험 동물의 사연에는 쓰임을 다한 존재도 살아갈 자리가 필요하다는 물음이 담긴다.
<코너드>
오다이르 파레코·다비 무리/2026년/14분49초/12세이상관람가
브루누는 지친 몸과 마음으로 상파울루를 배회한다. 일상은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고 AI는 무엇이든 빨리 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그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자신의 상태조차 설명하기 어렵다. <코너드>는 속도를 높이는 기술로 천천히 돌봐야 할 마음을 이야기한다. 고백록에 가까운 이야기가 노동의 압박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돌리지 않아 반갑다. 지친 사람의 하루도 영화가 품을 만한 충분한 세계다.
<스탠드업 코미디>
아이버슨 왕/2026년/13분52초/전체관람가
모두가 휠체어를 타는 세상에서 발롱은 뜻밖에 두발로 선다. 그러나 긍정적인 줄 알았던 변화는 그를 사회 밖으로 밀어낸다. 휠체어에 맞춰진 세계에서 걷는 몸은 함께 살아가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제를 한번 뒤집자 배제의 구조가 드러난다. 누구의 몸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편리함의 자리도 달라진 세상. 제목의 ‘일어서기’가 새롭게 읽히는 이유다. 그리하여 <스탠드업 코미디>는 서로 다른 몸이 나란히 머물 세상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드 라 이>
김슬마로/2026년/3분57초/전체관람가
인생이 필름으로 남는 세계. 고난의 순간은 젖은 필름으로 나오고 드라이 센터는 그것을 말려준다. 등대를 향해 바다를 헤엄칠지 메마른 땅을 걸을지 저마다 선택은 다르다. <드 라 이>는 마음의 상처를 젖은 필름으로 만져보는 작품이다. 삶을 말리는 데도 각자의 시간과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회복에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태도가 위안을 주는 가운데 건조한 제목 곁에 사람을 향한 온기가 머문다.
<할머니>
마틴 하얼린/2025년/7분4초/전체관람가
어린 시절의 기억과 흐려져가는 상상력에서 출발해 감독은 실제 슈퍼8 필름과 AI 이미지를 함께 펼친다. <할머니>는 기록된 과거와 마음속에서 자라는 기억을 나란히 놓으며 사진에 담기지 않은 감정도 우리 안에는 남아 있음을 역설한다. AI를 통해 그 기억에 다시 모양을 부여하는 시도가 미덥다. 잊었던 유년을 찾아가는 길이 새로운 창작의 시작과 만나는 과정이 AI영화에 대한 많은 점을 시사한다.
백남준 특별상
<스틸 센딩>
희릿/2026년/6분17초/전체관람가
천왕성에 132년째 홀로 머무는 메이는 78년 동안 지구에 같은 신호를 보내왔다. 끝을 모르던 생활은 우주선의 수명이 세 시간 남았다는 사실을 안 뒤 완전히 바뀐다. 비로소 시간을 느끼기 시작한 메이는 자신보다 오래 남을 마지막 신호를 보낸다. <스틸 센딩>은 백남준의 작품 <천왕성>에서 출발해 소통의 감각을 우주로 넓힌 실험이다. 끝이 있다는 깨달음은 비로소 보내는 행위에 마음의 무게를 더한다. 누군가에게 닿을지 알 수 없어도 흔적을 남기는 일은 계속되고, 멀리 있는 타인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을 통해 기술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일깨운다.
<토끼가 이르기를>
김시원/2026년/5분9초/전체관람가
인간은 죽음을 견디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에서 나온 토끼가 그림으로 들어가 다시 달에 오르자, 이윽고 떠난 이들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가 남는다. <토끼가 이르기를>은 신화와 종교 및 회화를 거쳐 디지털네트워크에 이르는 이미지의 생을 따라간다. 사라진 존재가 다른 형상으로 이어진다는 아이디어는 애도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글과 그림을 함께 다뤄온 김시원 감독의 관심사가 자연스레 드러난다.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 안에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오래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