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제목의 ‘모험’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모험>(1960)을 연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한국에서는 <모험>이라는 원제 대신, <정사>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말이다. 중심인물의 변화와 이동의 측면에서 두 영화는 수상할 만큼 유사한 궤적을 그린다. <꿈꾸던 모험>에서 주인공처럼 보였던 사이드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인물인 베스카가 중심에 들어온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도 초반 중심인물이던 안나(레아 마사리)가 실종되면서, 모니카 비티가 연기한 클라우디아가 화면을 장악한다. 물론 차이는 있다. 안나가 영구적인 실종 상태에 빠진 것과는 달리, 사이드는 갑자기 사라질 때 모습 그대로 다시 나타난다. 베스카 역시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그리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는 듯이 대한다. 사이드가 주인공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도, 베스카의 모험이 중단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하는, 이 돌아옴이 흡족하다.
불가리아의 국경지대라는 영화의 배경은 사이드의 기이한 동선에 사실성을 더한다. 발레스카 그리제바흐 감독은 전작 <베스턴>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튀르키예와 인접한 불가리아 국경지대를 탐색한다. 인종과 언어, 노동과 암거래가 교차하는 이곳에서는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나타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전작에서 불가리아로 이주한 독일 노동자 이야기를 통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위치를 새기는 듯 보였던 발레스카 그리제바흐는 <꿈꾸던 모험>에서는 서로 다른 욕망과 목적을 지닌 인물들이 부딪치는 이야기를 통해 전보다 깊숙이 지역에 발을 디딘다. 국경지대는 현실적으로 묘사되지만,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가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프레임에 각인되는 창백한 초록색 풀이 듬성듬성 자란 메마른 땅의 풍경은 우리 시대의 빈곤한 웨스턴을 돌아보게 한다. 다만 이 풍경 위에 존재하는 이들은 풍경을 딛고 돋아난 강렬한 캐릭터가 아니다. 풍경이 그대로 인물이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보호색을 띤, 자연 풍광과 밀착된 인물이다.
자연과 밀착된 인물이라는 인상은 출연진 대부분이 비전문 배우로 꾸려졌다는 점으로 인해 강화된다. 발레스카 그리제바흐는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주인공 베스카를 비롯해 현지의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했다. 이것은 프로덕션의 한계나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을 위한 장치이기보다는 장소와 자연을 캐스팅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배우는 이야기 대신 풍광으로 남은 장르의 현재를 증명한다. 현실에 맞닿은 얼굴이 장르의 선명한 얼굴을 흩트리며, 장르의 먼지를 떨고 새로운 얼굴을 새긴다.
손길의 고고학
20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 사이드는 ‘까마귀’라 불리는 사람을 찾는다. 이를 통해 그가 무언가를 찾는 남자라는 인상이 새겨진다. 하지만 남자는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자동차를 도난당한 채 홀로 거리에 선 사이드는 허공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검은 새의 무리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을 때, 사이드의 시선에 오랜 친구 베스카가 들어온다. 베스카는 사이드의 원경에서 흐릿한 형체로 등장한 뒤, 카메라와 가까워지면서 점차 선명해진다. 사이드의 시선을 통해 검은 새와 베스카가 연결되면서 그가 찾던 인물이 바로 베스카임을 드러낸다. 베스카는 사이드가 사라지면서 중단될 위기에 처한 거래를 이어 나가기에 이는 헛된 가설만은 아니다.
사이드는 사라지기 직전, 한 주점에서 낯선 여자와 부둥켜안고 춤을 춘다. 중단된 밤 장면은 발굴 작업 중인 베스카의 얼굴이 담긴 낮 장면으로 이어진다. 베스카는 국경지대에 묻힌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다. 베스카의 작업은 고고학이 풍기는 낭만적인 기운과는 거리가 멀다. 그와 동료들에게는 수리가 필요한 낡은 금속 탐지기가 있을 뿐이고, 탐사 장소로 향하는 도로는 정비가 되지 않아 타이어에 구멍을 내기 일쑤다. 마을의 시장은 반복된 요구에도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고고학은 무언가를 찾는다는 발굴의 기운을 이야기 사이사이에 흩뿌리며 진득하고 미묘한 방식의 낭만을 가능하게 한다.
고고학자는 영화를 위한 그리 매력적이거나 신선한 캐릭터는 아닐지라도, 야나 라데바가 연기한 베스카를 통해 표현되는 고고학적 몸짓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몸짓은 발굴 현장보다 현장 바깥에서 도드라진다. 어둑한 시간 출몰해 마을을 들쑤시는 불한당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베스카는 차 열쇠를 몰래 빼내어 풀밭에 던져버린다. 금속을 발견하고 수집하는 발굴 작업과 금속을 감지하고 폐기하는 정반대의 동작이 한 사람의 몸을 나란히 통과한다. 이는 다층적인 전복처럼 느껴진다. 버려진 열쇠는 훗날 누군가가 발굴하게 될 어떤 것을 상상하게 만들면서, 고고학은 미래에 발견할 누군가를 기다리는 작업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불한당들이 한 노부부의 집에 들이닥쳐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잔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고고학적인 손길이 감지된다. 깨진 유리 조각 사이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유리컵을 건네받을 때, 베스카는 그것을 마치 소중한 유물처럼 다룬다. 관객의 눈에도 그것은 우연한 기적처럼 느껴진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은 작고 납작한 오래된 동전처럼 쓸모없는 것들이다. 물론 아무리 무가치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18세기의 흔적을 담고 있는 동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전은 오래전 인플레이션을 기억하고 증명한다. 그 역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을 미약하게나마 가리킨다. 마을 이곳저곳을 감지하는 베스카의 시선과 느리게 지속되는 이동을 통해 영화는 사람들의 삶을 발굴한다. 낮이 고고학의 시간이라면, 밤은 공동체를 탐사하는 시간이다. 낮과 밤의 선명한 이동 속에서 고고학은 사람들 사이에 남은 비밀스러움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옮겨진다. 공동체는 때로 성별이나 인종으로 분류되며, 친밀하거나 적대적인 집단으로 구성된다. 베스카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그들 사이에 자리한다. 그가 듣는 이야기 중에는 다리 곳곳에 총알 파편이 박힌 남자의 이야기도 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맨몸으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해도 경고음이 울릴 거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남자의 사연은 한 사람의 몸속에 발굴하고 탐지해야 할 고고학이 새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 총성이 울릴 때
이 미묘한 여정에서 총은 낯선 긴장감을 불러온다. 베스카는 투숙객인 폴란드 여성 노동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텅 빈 모텔에 잠입한다. 의자를 밟고 서서 손으로 천장 속을 더듬는데, 마치 베스카의 손이 금속 탐지기라도 된 것처럼 보인다. 곧이어 무언가가 손에 닿는 소리와 함께 권총이 모습을 드러낸다. 베스카의 손에 총이 들어온 순간, 총이 어떻게 쓰일지를 긴장하며 바라보게 된다. 총으로 누구를 쏘고, 어떤 사건을 만들 것인가. 베스카가 맞닥뜨리는 폭력과 적대의 순간마다 긴장감이 인다.
감독의 전작에서도 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스턴>에서 마인하드(마인하르트 노이만)는 어느 날 사라졌던 말이 풀숲 사이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채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말의 운명을 맡기는 대신, 직접 말에게 총을 겨눈다. 이때 총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쓰였다. 이번 작품에도 말과 관련된 순간이 짧게 삽입되며, 전작과 모종의 연결을 그린다. 까마귀를 찾던 사이드는 작은 말을 기르는 소년과 만난다. 전작에서 말을 잃은 주인공을 통해 장르의 상실을 돌아봤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짧은 만남을 통해 장르의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총의 쓰임은 종결부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베스카는 이웃의 젊은이 마리야(데니슬라바 요르다노바)를 일리야(스토이초 코스타디노프)가 주최한 파티 장소에 데려다준다. 자리를 뜨지 않고 잠시 머물던 중 오래된 악연 관계의 일리야와 마주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시선에서 과거를 추억한다. 일리야는 과거를 사나이들의 시대라며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베스카는 여성들에게 한 일을 상기시키며 부끄러운 기억이라 말한다. 이후 베스카는 마리야의 손을 이끌고 귀가를 재촉한다. 마리야를 초대한 무리는 마리야를 붙잡으려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거칠게 달려들면서 한밤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일당이 베스카를 겁박한 사이, 마리야는 도망치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겁박에서 풀려난 베스카는 차량에서 권총을 챙겨 마리야의 이름을 외치며 하늘을 향해 총을 연발한다. 총을 가졌다는 사실이 상대에게 위협이 될 수 있지만,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총의 쓰임은 마리야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뿐이다. 그 신호가 적대자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는 위험한 행위일 수 있음에도 베스카는 그렇게 행동한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마리야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총은 일종의 폭죽으로 전락한다. 총과 사나이의 시대를 향한 어쩌면 가장 통쾌한 복수인지도 모른다.
<베스턴>이 불가리아에 이주한 독일 노동자들을 통해 국가의 격차와 계급의 격차가 서로 교차하는 양상을 드러냈다면, 은 모종의 사건 이후 사라졌다가 돌아온 이들을 통해 현재에 작동하는 과거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과거에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나이들의 시대와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골조로 한 과거의 이야기는 반복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전형적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사나이의 장르로서 서부극을 비롯한 영화 전반의 성차에 관한 이야기로 무난하게 이식된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남성 중심적인 장르의 컨벤션을 전복하는 측면이 생성되지만,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하거나 유일한 장점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굳이 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제 베스카는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 욕망을 발견하고 실현한다. 하지만 이것이 모험의 끝은 아니다. 영화는 명쾌함으로 선회하지 않고 미묘함을 끝까지 유지한다. 이 미묘함은 영화가 우리에게 남겨둔 몫이다. 그 덕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거기에는 지속해서 발굴해야 할 무언가가 여전히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