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연출자의 애니메이션은 감상하자마자 여타 애니메이션과 구분할 수 있다. 스틸컷만 보면 스톱모션 방식의 클레이애니메이션 같지만, 영화 속 피사체들이 직접 움직이진 않는다. 대신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초점이동, 컷 전환 등이 애니메이션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꿈의 나라><펭귄의 도시><침묵의 사선>등으로 이러한 작법을 고수해온 그의 신작 <남매의 수레>는 한 결손 남매의 아픈 이야기를 90초 내외의 러닝타임 속에 압축해낸 작품이다. 기후 위기, 탈북민 노인의 역사 등을 다루며 사회적 문제에 집중해온 연출자의 주제 의식, 단편 형식에 딱 맞는 애니메이션 방법론은 <남매의 수레>가 문제없는영화제에 잘 어울리는 작품임을 입증한다.
- 작품의 기획 배경은.
3년 전쯤부터 구상하던 작품이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써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다. 원래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아버지를 남매가 모시고 다니는 설정이었고, 아버지를 리무진에 태우고 싶어 하는 남매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 결과적으로는 작품을 만들다가 휠체어라는 장치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이미지의 뉘앙스도 잘 살리지 못해서 배제하게 됐다. 여하간 이런 기획 중에 문제없는영화제의 출품 공모를 우연히 보게 됐고, 우리 사회엔 구호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작품의 주제나 분량이 영화제의 취지와 딱 맞는 것 같아서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했다.
- 영화제 공모를 본 뒤에 만들어서 바로 출품했다니, 제작 속도가 무척 빠른가 보다.
촬영을 띄엄띄엄하긴 했지만, 시간만 따지면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대신 촬영 세트를 제작하고, 캐릭터를 손본 기간까지 합치면 제작 기간을 단순히 합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세트장이 내 방이다. (웃음) 좁긴 하지만 촬영 기기들과 세트, 인형들을 전부 두고 제작했다.
- 제작 과정도 무척 궁금하다. 일반적인 스톱모션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듯하다.
세트는 수작업으로 조립한 것들이고, 인물들은 규격이 있는 기성품 인형들을 활용해서 만들었다. 실물 대비 1/87 크기로 독일에서 제작되는 인형들이고, 실제로 보면 성인 인형이 2cm쯤으로 손톱보다 작은 크기다. <남매의 수레>주인공들은 아이다 보니 1.5cm 정도 된다. 이런 기성품 인형에 물감을 덧칠하는 등 후가공을 더한다. <남매의 수레>속 수레도 원래는 그냥 플라스틱인데 낡은 느낌을 가미한 사례다. 스톱모션은 이런 인형들을 아주 조금씩 움직이면서 사진을 이어 붙이는 방식이지만, 난 카메라 무빙을 통해 피사체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쪽으로 작업 중이다. 이런 방식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는 다른 작품을 SBS 애니갤러리 등에 상영하고, 배급사와 작품 규격을 논의할 때도 사실 고민했던 부분이다. 2D냐 3D냐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여러 의견이 있었다. (웃음) 현재로선 인형을 활용한 2D애니메이션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 독특한 작업 방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기점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극영화 연기를 전공하고 배우 활동을 하다가 군산에 내려와 산 지 10년 정도 됐다. 여기에서도 영화 작업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인력이나 인프라가 마땅치 않다 보니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팬데믹을 거치며 혼자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찾게 됐고, <빽 투 더 퓨쳐>의 주인공 피규어나 군인 미니어처 등을 구해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작했다. 작은 인형들이지만 접사 카메라로 자세히 촬영하면 모두 저마다의 표정이 있다. 이 얼굴들로 충분히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카메라 무빙과 편집의 속도감이 있다 보니 러닝타임이 짧더라도 충분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단편이란 형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나라는 초단편영화를 UCC라고 부르거나, 영화와 뭔가 다른 매체로 보는 듯한 시선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런 작업 방식을 택한 것은 이 속에 분명한 영화적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전 콘티 없이 촬영을 진행하고, 현장 편집처럼 즉석에서 촬영본을 자르고 붙이다 보면 매번 다른 감정이 생긴다. <남매의 수레>에서는 남매가 다른 이의 장례식장 앞에서 리무진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가장 중점을 뒀다. 전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배운 적도 없지만,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적 요소 및 음악의 삽입 그리고 서사를 조화한다면 90초 안팎의 짧은 작품도 충분히 하나의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본다.
- <남매의 수레>는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이기도 하다.
무성영화의 형식은 첫 도전이었다. 설명적인 내레이션을 최대한 빼서 짧은 시간 동안 관객이 최대한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원래는 관객의 마음을 대번에 움직일 수 있는 글귀를 넣고 싶단 욕심도 있었는데, 초단편의 형식에 맞추려다 보니 포기했다. 문제없는영화제가 답을 준 셈이다. (웃음)
<남매의 수레>
숏폼 부문 | 정재훈 | 드라마 | 전체관람가
1분30초가량의 짧은 애니메이션이지만, 매우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는 작품이다. 한 어린 남매가 수레를 끌고 동네를 돌며 폐품을 줍는다. 주위의 어른들은 매정하기만 하고, 아이들은 끼니도 챙기지 못한 채 일에 매달린다. 남매는 열심히 번 돈으로 꽃 한 송이를 산다. 풍성하지도 못한 이 꽃은 마냥 아름답게 쓰이지도 않는다. 남매는 꽃을 수레 위의 어떤 것에 올려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러던 남매는 본인들의 처지와 정반대인, 어느 장례식의 호화스러운 리무진을 마주하고 영화는 그 대조되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킨 채 끝난다. 겉보기엔 스톱모션 방식의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일종 같지만, 엄밀하게는 다르다. 정지된 인형들을 최대한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 속도로 포착하며 애니메이션의 동세를 만드는 특이한 작법의 애니메이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