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아한 사탄의 치명적 유혹
악마가 탐내는 남자의 몸이 그리스 조각상 같은 완벽한 신체는 아니다. 뭇 여성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나 싱그러운 향기 물씬 피어나는 젊음은 사탄의 노리갯감으론 적당해도 어둠의 마력을 보여주기엔 부족하다. <이스트윅의 악녀들>의 잭 니콜슨, <데블스 에드버킷>의 알 파치노를 떠올린다면 <엔드 오브 데이즈>의 사탄으로 가브리엘 번을 택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귀족다운 우아한 옷차림과 당당함에 험한 과거가 새겨 있는 이마의 주름, 이지적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에 연옥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는 상처입은 짐승처럼 날뛰지 않고도 분노와 격정을 보여주는 드문 배우다. 미국에서 찍은 첫 영화 <밀러스 크로싱>은 이후 그가 보여줄 연기의 스펙트럼을 하나의 프리즘처럼 보여준다. 갱스터와 필름누아르의 시공간에서 가브리엘 번은 보스의 정부와 치명적 관계를 맺는다. 걷잡을 수 없는 운명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5] - 가브리엘 번
-
세상의 악취를 맡아볼래?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성장이란 어떤 의미일까. 모르는 척 눈감아버리는 타협? 아니면 지배하는 자들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진입하려는 욕망? 이 두 가지 선택을 모두 거부한다면 영원히 자라지 않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을 날겠다는 피터팬의 순진무구한 꿈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에 대한 환멸 때문에 자신의 키를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고정시킨 <양철북>의 난쟁이, 절망하는 오스카에 가깝다. 세살 때 계단에서 굴러떨어짐으로써 스스로 성장을 포기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른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던 오스카. 젊은 시절, 난폭하기로 이름 높았던 숀 펜(39)의 거친 기질이나 기존의 질서를 거스르면서 나가는 그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그 오스카를 연상시킨다. 숀 펜은 피터팬처럼 아버지들의 세계를 떠나버리지 않는다. 그는 오스카처럼 알 것 다 안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땅, 미국을 응시한다. 그의 눈에 비친 세계. 권력과 이해관계, 소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4] - 숀 펜
-
무력함이 그들 정의로 몰아넣었다
<LA컨피덴셜>은 흐트러진 미궁의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다. 하나의 죽음은 또다른 죽음과 맞물리고, 조각난 사건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타락을 각기 다른 형태로 반사한다. 길을 찾으려 애써 보아야 소용없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환한 햇살이 어떤 어둠의 흔적도 지워 버리는, 이곳은 천사들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어둠만이 존재하는 고담시의 지배자 잭 니콜슨(<배트맨>)도 이 눈부신 도시에서는 질척거리는 욕정과 끈끈한 먹이사슬의 고리 속에 통로를 놓치고 만다(<차이나타운>). 알 수 없는 LA의 마력은 야수 같은 니콜슨의 본능조차 흡수해 버린다.
형사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가 음모에 휘말린 곳은 하필이면 이런 도시다. 모든 퍼즐에는 해답이 있고 모든 미로에는 출구가 있다지만, LA에서는 그런 원칙이 통하질 않는다. 그저 몸을 내맡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여배우 베로니카 레이크를 닮은 금발의 창녀와 마약에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3] - 러셀 크로
-
긴 잠복기를 거치고 바이러스가 눈을 뜬다
죄악의 땅. 그늘과 습기로 가득 찬 이곳에 희망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다. 아이를 낳는 일마저 또 하나의 형벌이 될 뿐인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주 가까운 어느 미래의 묵시록처럼 보이는 영화 <쎄븐>은 이 질문에 ‘정화’(淨化)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살인을 통한 정화가 시작된다. 세상을 파멸시킬 일곱 가지 죄악에 차례로 징벌을 가하는 살인자. 그가 바로 케빈 스페이시(40)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얼굴로 도시의 폐부에 은밀하게 스며들고 끝내 그 자신마저 제물로 삼아 도시를 청소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냉혹함보다 섬뜩한 것은 끝내 흔들리지 않는 표정없는 얼굴이었다. 모든 감정이 지워진 스페이시의 눈동자만큼 불가해한 악(惡)이 또 있었을까. 경찰청에 들어섰을 때는 누구도 그 살인의 그림자를 알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살인자라는 단 한마디 외침으로 그는 죽음의 냉기와 동일한 존재가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2] - 케빈 스페이시
-
-
희미한 불빛 아래 앙상하게 윤곽을 드러낸 도심의 밤, 범죄와 음모가 스멀거리는 문명의 그늘, 자신 외에는 믿을 것 없는 현실의 생존법칙 앞에 선 삐딱한 사내들.
험프리 보가트의 찌푸린 양미간과 잭 니콜슨의 음울한 표정의 시대는 갔어도 도심의 뒷골목, 누아르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만물의 법칙이 그러하듯, 누아르 세계에도 세대교체가 있다.
보가트의 후예들, 할리우드를 점령하다
한적한 L.A 교외의 폐모텔, 헤드라이트로 어둠을 가르며 한대의 차가 들어온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먼저 도착해 있던 사내에게 말을 건네고, 서로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두 사람은 누군가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음을 깨닫는다. 연관이 없어 뵈는 일련의 살인사건이 거액의 마약을 노린 상사의 음모 때문임을 알게 된 두 형사 버드 화이트와 에드 엑슬리. 자리를 미처 피하기 전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는 불빛이 다가오고, 총을 집어든 두 사람은 폐건물의 벽 뒤에 몸을 숨긴 채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인다.
할리우드 누아르의 새 별들 [1]
-
문화부와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영화진흥정책이 엉뚱한 구설에 올랐다. 이 진흥정책은 영진위에서 상당한 공을 들여 만들었고, 내용도 비교적 내실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지만 총선용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
총선을 불과 보름 남짓 앞둔 지난 3월30일 문화부가 진흥정책을 발표하면서 영진위 명의와 나란히 문화부 이름을 걸고, 문화부에서 따로 보도자료까지 내 ‘치적’을 강조하는 것이 어색했다. 아무리 영진위가 문화부의 우산 아래 있지만 자율성을 인정한다면 모두 영진위에 맡기는 게 보기에도 좋을 듯했다.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최근에는 서영훈 민주당 대표 등 당지도부가 서울영상벤처센터를 방문해 이미 발표한 영화진흥정책을 재탕해 공약이라고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정황만으로 총선용 운운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동안 영진위가 공전을 거듭하다 새로 위원을 위촉해서 재출범한 과정과 위원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감안하면 그들의 순수한 동기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화부가 굳이 이름을
[충무로는 통화중] 영화진흥정책, 혹시 총선용?
-
“약간의 자폐 기질이 필요하다.” 외화번역을 하는 김은주(40)씨는 “자기와의 싸움”을 위해 작업할 땐 철저하게 외벽을 두른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정확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최대한 압축해서 뽑아내고 재미있게 대사를 튀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빠른 대사나 화자가 겹치거나 하는 부분들은 관객이 즉각적으로 화면과 자막을 연결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해주어야 한다. 내용이 복잡하거나 상영시간이 긴 작품을 번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잡아 1주일 정도. 얼마 전 자막시사까지 마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처럼 미식축구의 세계를 파고든 영화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수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그는 전문적인 용어와 게임 룰을 파악하려고 풋볼협회를 찾아야 했다.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번갈아 작업하다 보면 자칫 타깃을 놓칠 수도 있다. 멕 라이언이 나오는 <지금은 통화중>은 최대한 가볍고, 경쾌하고, 위트있게 말을 비틀어야
글자 수 헤는 밤과 낮, 외화번역 김은주
-
미라 소비노(33)는 금발의 백치미인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배우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도 그랬지만 <노마진 앤 마릴린>에서도 ‘백치미인’ 마릴린 먼로가 그에게 딱이었다. 국내에 지각 개봉한 이 영화에서 그는 마릴린 먼로 특유의 걸음걸이와 어투, 헤픈 미소를 고스란히 재현했으며 텅 빈 얼굴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파이크 리의 <썸머 오브 샘>의 다이아나 또한, 백치는 아니지만 남편의 외도를 쉽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숙하고 미련한 여자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의 백치미도 일품이었다. 삐딱거리는 걸음새하며 높은 톤의 목소리와 억양, 번잡스런 옷차림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창녀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건 미라 소비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일 뿐이다. 미라 소비노는 대단한 노력과 정교한 연기로 백치의 이미지를 뽑어냈다. <마이티 아프로디테>에서 날아가는 듯한 어투를 얻기
창녀에서 성녀까지, <마이티 아프로디테>의 미라 소비노
-
‘욕망’의 저수지를 찾는 낚시꾼들에게 커피와 실지렁이를 팔 듯 몸을 내주는 <섬>의 희진. 그녀의 얇은 갈색치마는 사내들의 배설물에 젖기 일쑤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선 비린내가 요동한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섬에 정주해서 그녀를 약탈하는 이들은 유약하기 그지없다. 죽기 위해 섬을 찾은 현식도 섬을 지배하는 그녀 앞에서 이내 칭얼대고 결국 뒷걸음질친다. 한치의 오차나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욕망의 관자놀이를 겨누는 그녀 앞에서 그들은 무력하다. 찌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먹이를 쳐올리는 그녀의 민첩함은 위협적이다. 푸른 바다 흰 포말 위에서 태어나지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키프로스 섬에서 노닐지도 않지만, 희진 아니 서정(28)은 본능적인 직관과 대담한 의지로 <섬>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깊게 팬 관능적인 여신의 가슴선 뒤로 기다란 삶의 상처를 달고 다니는 희진 역을 맡아 연기한 서정은 잘 알려진 배우는 아니다. 그래서 ‘운좋게’ 거리에서 픽업된 풋내기
충무로의 섬, 독립영화의 대지, <섬>의 서정
-
도쿄의 풍경은 큰 변화가 없다. 번화가엔 높은 굽의 구두에 카우보이 모자, 헐렁한 루즈삭스를 신은 여고생들이 여전히 거리를 누빈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호텔 회견장에 들어서니 연애만화 같은 한쌍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이야기>의 이와이 순지 (38) 감독과 배우 마쓰 다카코(松たか子, 22). 배우, 감독이 아니라 오누이 같기도 하고, 진짜 ‘연인’처럼 꼭 어울리는 분위기라 해야 할까. 이와이 순지 감독은 약간 몽롱한 눈동자에 느린 말투로 인터뷰에 응했다. 질문을 던지는 상대방의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최근엔 극장용 영화보다 뮤직비디오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을 당시 공중파 TV에선 감독이 인기 그룹 Glay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연예계 뉴스로 다뤄지고 있었다. 마쓰 다카코 역시 승승장구. 지난해에 <선보고 결혼하기>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방송사에서 연기상을 받는 등 부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짧은 시간에
<4월 이야기>의 감독 이와이 순지와 배우 마쓰 다카코
-
“낙천 낙선운동. ‘선거혁명’이라는 수사가 통할 만큼 거대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운동이 한동안 맥없이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신명을 불어넣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 운동을 지지하는 일은 최소한의 정신건강만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이 운동을 지지하며 이 운동이 우리 사회에 분명한 유익을 남기길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이 운동의 거대한 일사불란함 속에서 얼마간의 허전함을 느낀다. 허전함은 이 운동이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그들, 몹쓸 정치인들을 뽑은 게 바로 우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오늘 우리가 온갖 비난과 분노를 쏟아붓고 있는 그들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다.
허전함은 이 운동을 주도하는 총선시민연대에서도 온다. 그 연대는 여러 입장과 견해를 초월한 위대한 연대인 동시에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을 생략한 허황한 연대이기도 하다. 가장 끔찍한 경우는 이른바 음대협(음란폭력성조장 매체대책 시민협의회) 관련인사들의 참여다. 나는 도덕을 기준으로 온 세상을 판단하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