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크레딧에는 왜 꼭 사람만 들어가나요? <주노명 베이커리>의 ‘빵’이라면 이렇게 항의할만하다. 빵을 우물거리며 흘리는 무석(여균동)의 사랑 고백에 정희(황신혜)의 한숨이 그치고, 노명(최민수)이 만든 구두모양의 슈가케이크에 해숙(이미연)의 매서운 발길질이 멈추었으니 말이다. <주노명 베이커리> 제작진이 자문을 요청해왔을 때 곽지원(47)씨와 최두리(45)씨는 ‘빵’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에 흔쾌히 응했다. 하지만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감독의 주문이 여느 손님과는 달랐기 때문. 뭉실한 이미지를 딱 꼬집어내기가 쉽지 않아 밤을 꼬박 새서 만들어 간 케이크가 다시 작업실로 옮겨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주노명의 능숙한 손놀림 또한 이들 부부의 몫이었다. 열흘 동안의 연습으로 반죽을 다루는 노련한 품이 배어나올거라 기대를 했던 이들은 없었다. 배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대역을 쓸 수도 없는 상황. 곽지원, 최두리 부부는 일단 가르치고 나서 지켜볼 수밖에
<주노명 베이커리> 제빵 자문, 곽지원·최두리 부부
-
그동안 <춘향뎐>은 완성품이 어떤 모양일지 혼란스런 작품이었다. 시나리오는 따로 없고 판소리와 영상이 함께 가는 거다, 라는 감독의 설명으로는 어떤 영화가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제작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지난 1월18일 <춘향뎐>이 첫 공개된 시사회장에서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은 “영화를 별로 많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영화 공개하면서 이렇게 긴장되긴 처음”이라고 했다(‘영화를 별로 많이 만들지 않았다’는 건 농담이다. 태흥영화사는 동아수출공사와 함께 실제 영화제작을 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두 영화사 가운데 하나다). 임권택 감독도 찍는 동안 스스로 결과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이건 물론 그다운 겸양이긴 하지만, 실제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고난도의 실험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영화 <춘향뎐>은 한국영화에서 아주 특별한 성과다. <춘향가>의 ‘소리’를 그처럼 열린 형식의 영화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
[편집장이 독자에게] 판소리는 한국의 셰익스피어
-
“만날 똑같은 소리… 강준만은 이제 지겨워.” 주변에서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다. 온 나라가 만날 한 가지 이슈에 휩쓸리고 또 그 이슈는 만날 변하는 사회에서 몇년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강준만이 지겹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강준만이 몇년째 거듭하고 있는 바로 그 소리, 이른바 <조선일보> 문제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 개혁에 ‘할말은 함’으로써 수구세력의 돈궤를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지겨운 건 강준만이 아니다.
강준만이 지겹다는 말은 강준만의 방법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을 둘러싼 그의 방법은 어딘가 저잣거리의 시비 같은 데가 있어 그의 공식적인 적대자들은 물론 그의 주장을 대놓고 적대하기 어려운 좌파 혹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강준만이 이른바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좃선과 낙선
-
할리우드 메이저에 시나리오를 팔겠다고? 차라리 카지노에 가서 룰렛에 돈을 걸어라.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인사말처럼 주고받는 농담이다. 다소 위악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사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이 비좁아 터진 충무로에서도 시나리오 하나 팔아먹기가 하늘의 별따기니까. 그런데 서른살도 되기 전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브라이언 드 팔마 그리고 로버트 저메키스와 커티스 핸슨에게 자신의 시나리오를 연출하도록 만든 작가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억세게 운좋은 녀석 혹은 질투가 날만큼 재능이 넘쳐나는 젊은 작가가 데이비드 코엡이다.
이제와 다시 봐도 그가 24살 때 쓴 데뷔작 <아파트 제로>에서는 재능이 번뜩인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예기치 못했던 캐릭터의 변화, 제멋대로 뒤엉켜있는 것 같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맞춰보면 모든 아귀가 빈틈없이 들어맞는 퍼즐 같은 플롯. <배드 인플루언스>
[할리우드작가열전] 시나리오 잘 쓰려면 감독 해봐, 데이비드 코엡
-
-
지금 떠나는 곳에 죽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두 남자는 모두 안다. 그럼에도, 운명을 믿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그는 “운명? 내가 바로 신이야”라고 답하며 앞서 떠난다. 오만하지 않으면서도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말에 미련 따윈 묻어나지 않는다. 어느 뒷골목에 버려져도, 햇빛도 닿지 않는 하수구 어딘가에 묻혀 버려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직 친구를 위해 가망없는 싸움에 총을 들었던 이 남자는 속인들의 계산법을 무용하게 만든다. 이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대 불명의 신화, 오래 전 어디엔가쯤 있었을 법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말 그대로 <영웅본색>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윤발(44)을 설명하는 데 다른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영웅’, 눈물 없이도 울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웅이다. <영웅본색2>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발걸음은 영화에 여백 같은 순간을 부여하며, 죽음 직전 연인을 찾는 그의 손길은 누구보다 성실했
내가 바로 신이야, <와호장룡>의 주윤발
-
전화를 끼고 앉은 이미연, 맘에도 없는 ‘보험 가입’을 미끼로 보험설계사와 통화중이다. 시시콜콜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살펴가면서. 복장 체크도 해본다. 굽 낮은 구두, 큼지막한 가방, 무릎길이 치마, 오케이. 저녁시간에 TV를 보면서는, 남편 김승우를 고문한다. “보험 들겠다는 남자가 ‘당신 구두를 닦아주고 싶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면, 다시 만났을 때 그 보험설계사, 기분이 어떨까?” 그 비슷한 질문만 벌써 열두 번째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영화 얘기가 야속한 남편은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묵묵부답. <주노명 베이커리>를 찍던 무렵, 이미연의 어떤 하루다.
다 써먹을 수 없을 게 뻔한데,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있느냐는 걱정을 들을 때마다, 이미연은 “다른 생각이 안 나는데 어쩌냐”고 되묻곤 했단다. 사랑의 화살이 엇갈려 꽂히는 두쌍의 부부 이야기를 만나고, 3류 소설가를 남편으로 둔 보험설계사 해숙을 만나면서,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더라
작품수, 열정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주노명 베이커리>의 이미연
-
“이렇게 음악에 무식한 기자, 만나 본 적 없겠죠?”
“이렇게 영화에 무지한 취재원은 만나 본 적 있어요?”
자격지심 어린 물음에 신해철(32)은 명랑한 반동을 보내왔다.
세상을 향한 외침으로 가슴 속을 먹먹하게 하는 송능한 감독의 영화 <세기말>을 신해철이 반주한다는 소식은 너무 당연하게 들려 별반 뉴스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직설과 조롱과 패션을 능숙하게 결합하는 그의 음악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아도 줄곧 모종의 ‘아우성’을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주도면밀한 군주의 손길로 자신의 예술을 다스리는 이 자신만만한 음악 감독에게, 한 영화의 스탭으로 일하는 경험은 어떤 것일까? 새 앨범 <홈 메이드 쿠키스 & 라이브> 출반에 맞추어 지난 연말 뉴욕에서 귀국한 그에게 그 고충과 행복을 시시콜콜 물었다. 이제 네줄의 필모그래피를 갖게 된 영화음악가 신해철은 당김음과 스타카토가 군데군데 섞인 특유의 말투로 답을 들려줬다.
-근래 재미있게 본 영화가 있
<세기말>의 영화음악, 도발의 뮤지션 신해철을 만나다
-
<박하사탕>은 음악이 넘치는 영화가 결코 아니다. 7개 장으로 나뉘는 영화의 구성에 맞춰 장과 장 사이를 이어주는 기차 인서트는 음악이 적셔주지만, 20년을 거슬러가는 그 지난한 여정을 따라가는 선율은 마치 마른 침을 삼킬 때처럼 조금씩, 애타게 귓전으로 흘러온다. 감정이 넘치기보다는 별 과장없이 일상의 흐름을 세심하게 옮겨내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특히 순수를 찾아가는 <박하사탕>의 힘겨운 여행 속에 음악의 자리는 유난히 더 조심스럽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관객이 영호의 삶을 중립적으로 바라봤으면 하고 만들었다는 <박하사탕>의 음악은 데뷔작임을 감안하지 않아도 별 손색이 없다. 정작 영화음악가로 첫 단추를 끼운 이재진(30)씨는 <박하사탕>에 대해 할말이 없다고, 잘 모르겠다며 웃지만.
영화음악은 처음이지만, 사는 방향이 음악으로 정해진 지는 꽤 됐다. ‘소리로 크는 나무’. 어릴 때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
힘겨운 과거여행의 동반자, <박하사탕>의 영화음악가 이재진
-
[정훈이 만화] <엔트랩먼트> 국내 최고의 도둑 남기남
[정훈이 만화] <엔트랩먼트> 국내 최고의 도둑 남기남
-
기업의 네트가 별을 덮고, 전자와 빛이 뛰어다니며, 국가나 민족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정보화해 있는 근미래. 신기술을 이용한 고도의 살상과 파괴 행위가 만연하자, 동아시아의 어느 가상국가에서는 사이버 네트와 공안관계의 특수테러를 전담하는 경찰 조직인 속칭 ‘공각기동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조직은 몸의 상당 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반인 반로봇의 특수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의식을 조종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형조종사와 맞서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형사의 음모는 분쇄되지만, 대원들 중 대다수가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고 만다.
“바트, 팔다리가 없으니 시원하겠군.” 부상 병동에 누워 있는 토그사는 낄낄거리며 말을 걸지만, 자기의 아랫도리도 완전히 날아가버리고 만 신세다. 바트 역시 입만은 멀쩡하다는 걸 보여준다. “너희 마누라가 좋아하겠어. 이혼할 확실할 핑계가 생겼으니 말야.” “무슨 소리야. 이제 최신형 아랫도리로 ‘빠방’하게 장착할 텐데. 아마 매일 밤 죽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공각기동대 II - Ghost In the Street
-
영화에서 캐스팅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별들의 고향>도 그랬고, <어제 내린 비>도 그랬고 <너 또한 별이 되어>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 <바람 불어 좋은 날>,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현실 도피처럼 신인을 찾았다. <어둠의 자식들>에서도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수없는 오디션을 거쳐 방숙희라는 신인을 찾아냈다. 생김새와 연기력 모두 작품에 잘 맞는 신인이었는데 무엇보다 ‘카수 영애’라는 부제가 말하듯 가수 지망생 역할이어서 가창력이 필요했다. 그 점에서도 합격이었다. 나는 한국영화의 아버지 나운규 감독의 성을 따와 그 신인에게 나영희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영화에서 약 2시간가량, 얼굴 클로즈업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를 속속들이 보여주어야 하는 영화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괴로운 일이다. 마오쩌둥과
이장호 [41] - 나의 신인중독증, <어둠의 자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