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들한텐 다섯장만 샀다고 거짓말하고 열장 사서 꼭꼭 숨겨두었던 밀레니엄 복권이 꽝나고 만 지금, 아줌마는 다시 몇장 배춧잎 앞에 충성맹세하고 비상근무중이다. 아니, 사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창 비상근무중이다. 아줌마도 <비상근무>(Bringing Out the Dead)의 프랭크 피어스처럼 구급요원이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인간의 헤벌어진 오장육부 같은 뉴욕 뒷골목을 헤매는 구급요원인데 비해, 아줌마는 자신의 미로 같은 오장육부 속을 헤매는 자신 목숨의 구급요원이라는 점이 다를뿐. 초기 프랭크가 그랬듯이 아줌마도 숱한 목숨 구했다. 열한살 아줌마, 열다섯살 아줌마, 열여덟, 스물, 스물다섯, 스물아홉, 서른… 그 많은 아줌마들을 구한 건 다 아줌마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타율 100%를 기록했을리야. 아줌마 또한 기술부족으로 숱한 목숨 죽였다. 예를 들어 프랭크가 산소주입기를 잘못 꽂아 열여덟 꽃다운 여인을 죽였다면, 아줌마는 정액주입기를 잘못 꽂아 숫처녀 아줌마를
[아줌마, 극장가다] 우리는 정말 살아 있을까, <비상근무>
-
이창동의 <박하사탕>은 망각의 더께에 쌓인채 아득히 흘러가는 우리들의 오랜 기억들에 마치 면도날처럼 상처를 내었다. 면도날의 상처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은 금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곧 그 금 사이로 붉디붉은 피가 점점이 배어나온다. 낡은 기차를 타면 떠오르는 얼굴들처럼, 그 역시 시간의 기차를 태운채 우리들의 현재가 서있는 바로 이곳으로부터,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져버린, 이름조차 아물아물한 첫사랑의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70년대 학번이면 누구나 한번쯤 탔을 그 기차… 피와 눈물에 젖은 청춘들이 우울한 날개를 접고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가면…’라는 샌드페블스의 노래에 실어보냈던 그 검고 흰 추억들을 실은 야유회행 기차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이창동,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매서운 눈
나는 이창동이 뛰어난 영화감독으로 다시 태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그가 소설가였을 때부터 알고 있다. 그는 흥분 잘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나와는 과가 다른 인간이다
거꾸로 비친 우리 삶의 황무지, <박하사탕>
-
마을에 UFO 떴다
누구나 다 아는 전설이 팀 버튼식으로 변하기까지
팀 버튼은 의뭉스럽다. ‘1799년 뉴욕’이라는 설명을 달아 마치 <슬리피 할로우>가 역사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양 착각하게 하지만, <슬리피 할로우>는 지상에 없다. 팀 버튼의 주인공들이 현실세계에 안착하지 못하듯 그는 언제나 현실 밖에 이상한 나라를 만들어왔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그 나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폐쇄적인 세계(singular self-enclosed world)다. 마치 이미지의 독재자처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믿음대로 그 나라를 통제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가 그러하듯, 팀 버튼의 영화는 무엇보다 먼저 화면 그 자체를 살펴야 한다. 표면을 읽음으로써 심층을 헤아리는 게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가능하다.
스타일화한 자연주의, 모순된 세계를 찾아서
팀 버튼 사단이 다시 뭉쳐 만든 <슬리피 할로우>는 더 깊어진 팀 버튼의 비전을 보여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4]
-
“바보 같다는 게 나만의 고유함이 아닐까”
-<슬리피 할로우>의 시나리오에 끌렸던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좋아서인가, 아니면 비주얼의 가능성 때문인가.
=둘 다다. 디즈니의 58년작 만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봐서 그런지 이 이야기가 낯익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기 전까지는 워싱톤 어빙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목없는 호스맨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안다. 시나리오가 해머프로덕션의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는 것도 맘에 들었다. 난 동화나 상징성을 띤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시나리오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의 감동이 있었다. 이 카보드 크레인이란 사내는 자기 머리 속에서만 살지만 호스맨은 머리가 없다는, 대조적인 설정이 특히 좋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을 것 같은데.
=맞다. 물론, 비주얼로만 영화에 접근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캐스팅이나 세트 제작 등 고려할 게 많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3] - 팀 버튼 인터뷰
-
-
임무 완수하는 영웅, 팀 버튼답지 않은 캐릭터
한편 <슬리피 할로우>는 외골수 팀 버튼의 영화로서는 놀랄 만큼 개방적이다. 미스테리의 얼개를 입은 앤드루 케빈 워커의 각본은 그의 어떤 전작보다 강한 스토리에 대한 집착을 영화에 심어놓았다. 썩어 부푼 시체, 잘린 머리를 채운 자루, 구더기 끓는 주검 같은 역한 이미지들도 <쎄븐>의 작가였던 그의 취향이다. 품위있는 위트가 살짝 발라진 대사에서는 각본을 가다듬은 톰 스토파드(<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지문이 묻어난다. 크레인 역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팀 버튼 영화의 히어로다. 크레인은 팀 버튼이 붙잡고늘어져 온, 정상성의 세계에 몸을 밀어넣으려다 거절당하는 아웃사이더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누구 못잖은 정신적 외상도 있고 컴플렉스도 깊은 인간이긴 하지만, 걸핏하면 졸도하고 큰 소리라도 날라치면 방금 구출한 여자 뒤에 숨는 심약한 남자지만, 어찌됐건 크레인은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는 일 없이 기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2]
-
우리 마음 속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
“난 꿈은 잘 꾸지 않는다. 그저 낮 동안에도 넋이 몸을 스르륵 빠져나가 남들이 내게 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팀 버튼(42)은 그렇게 본인의 몸 안에도 다소곳이 갇혀 있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영악한 두뇌들이 연산을 거듭해 내놓는 영화들의 각축장인 할리우드에서 <피위의 대모험>(1985)과 <유령수업>(88)으로 관객 동원력을 인정받고, 급기야 블록버스터 <배트맨>(9?)으로 흥행 감독의 왕관까지 쓴 것은 확실히 통쾌하고도 아리송한 일이었다. 더구나, 버튼의 영화에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굳이 구부리고 꺾은 자국도 거의 없다. 그의 초기 단편 <빈센트>나 <프랑켄위니>에 담긴 극히 사적인 내용과 병적인 상상력은, 상업 영화에서 도리어 더 큰 화폭과 풍성한 팔레트를 만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팀 버튼의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1]
-
냉소의 계보1 - <비비스 앤 버트헤드>
이런 무정부주의적 냉소도 다 계보가 있다. 93년부터 97년 사이 기분나쁜 웃음으로 MTV를 장악했던 <비비스 앤 버트헤드>의 얼간이 듀오가 이 꼬마들의 선배격이다. 결국 레지스탕스가 되고마는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꼬마들에 비해서는 백해무익한 건달들이긴 하지만. 미국 서부 교외 하이랜드의 허름한 집에서 사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배운 것 없고, 할 일 없고, 돈도 없는 10대 고등학생.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죽이고, 특히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품평하는 게 낙이다. 세상만사를 ‘짱’(cool) 아니면 ‘꽝’(suck)으로 이분하는 이들에게 교양있는 취향이나 판단, 합리성, 윤리적 혹은 정치적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변두리에서 잘 교육받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그닥 잘되리란 희망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바라는 게 있다면 섹스나 한번 해봤으면, 그리고 파괴본능에 몰두하는 것 정도. 그래서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2]
-
불경한 카타르시스의 태풍, “오 마이 갓!”
사시사철 봉우리에 눈을 얹은 로키산맥을 끼고 미국 콜로라도주 한켠에 자리잡은 가상의 마을 사우스 파크. 이 마을은 미국 애니메이션이 가닿은 표현의 신천지다. 내용의 새로움이라기보다 그 표현의 수위와 강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우스 파크>는 동글동글한 2등신 꼬마 4명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백인 깡촌 마을에서 살아가는 스탠, 카트먼, 카일, 케니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동갑내기들. 하지만 아동용이라고 방심해선 안된다. 집, 가족, 학교, 선생님, 친구 등에 둘러싸인 평범한 일상은 곧 모순과 폭력의 지뢰밭이 된다. 아이들은 입만 열면 욕설이 튀어나오고, 엄마와 선생님과 정부와 의사 등 그 모든 기성의 권위는 발밑에 까뭉개지고, 흑인과 동성애자와 그 모든 소수자들이 놀림감이 되는 성인 만화? 그런것을 미국 TV와 극장은 어떻게 허용한 거지?
하지만 흥미진진한 것은, 기성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보이는 이 애니메이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1]
-
보이지 않는 손들의 전쟁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흥수’를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일까?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배급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배급(권)을 ‘흥수(興手)’라 불렀다. 배급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손이라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유통구조에서 배급은 흥행을 판가름하는 관건이다. 노점에서도 물건 진열을 잘해야 하나라도 더 팔 수 있듯, 영화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상영관 확보가 절대적인 조건인 것이다.
한국영화의 새해맞이는 극장을 둘러싼 ‘배급전쟁’으로 유쾌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거짓말> <행복한 장의사>가 1주일 터울로 개봉하면서 극장 다툼을 벌였고, 잘나가던 <해피엔드>가 중도하차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의 횡포나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어서 모두 말을 아끼면서 어벌쩡 봉합되긴 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소지는 상당히 크다. 결과적으
영화 배급전쟁 2000
-
위기에 빠진 세계의 운명은 오직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초반부터 한바탕 실력을 보여준 그는 이제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러 갈 것이다. 아름답고도 이국적이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혼자 가긴 외로울 테니 어딜 가든 파트너가 따라붙는다. 이왕이면 비키니를 입은(완전 누드여선 ‘품위’가 없으니 곤란하다) 팔등신의 미인이면 더 좋겠지. 그렇다고 새로 개발된 무기를 챙겨가지 않는다면 프로가 아닌 법. 그의 앞에는 세계를 집어삼킬 야욕으로 불타는 다분히 천재적인 악당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결국 승리는 그의 차지. 하늘을 찌르는 폭발을 뒤로하고 그는 새 파트너와 함께 유유히 악당의 숨겨진 요새를 벗어나온다.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파트너와의 파티타임. 그런데 이 소중한 시간에 ‘M’이란 작자는 눈치도 없이 웬 전화질이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건 퀴즈 축에도 못 든다. 영화나 소설을 봤건 안 봤건, 또는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든 아니든, 어쨌든 제임스 본
그는 세계의 운명을 지고 있다,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
끔찍한 일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니. 거창하게 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 목록을 따로 간직하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곤혹스런 일이다. 사실 나는 각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나름의 시선에 따라 특정 영화에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남들 4년 다니는 대학(연극영화과)을 무려 ‘10년’이나 다녔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영화일을 시작한 지 8년 가까이 됐지만 가슴 속에 따로 고이 담아둔 영화 몇편이 없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제작소 청년이나 예술실험영화전용관을 운영했던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했던 이력 때문에 종종 예술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는다. 하지만 나는 잘 만든 상업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사랑 영화를 좋아하며, 사랑 영화 중에서도 ‘촌스럽게도’ 슬픈 사랑 영화를 제일로 꼽는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슬픈 사랑 영화를 고르면 남들이 말하는 내 인생의 영화에 해당하는 셈이다.
‘준비되지
[내 인생의 영화] 너무나 슬퍼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