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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s’ Talk] 영화란 끊임없이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 <더 러닝 맨> 에드거 라이트 감독 × <미키17> 봉준호 감독 ➀

과거 <씨네21>을 뒤져보면 에드거 라이트 감독에게서 봉준호 감독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무려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뜨거운 녀석들>개봉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뜨거운 녀석들>을 만들기로 결심하는 데 영향을 끼친 영화 중 하나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꼽았다. “봉준호는 굉장한 능력을 지닌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역시 <괴물>과 봉준호의 팬이다. 그가 나에게 <살인의 추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을 때 나는 완전히 나가떨어졌다.”(<씨네21> 608호)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2013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개봉했다. 배우 제이미 벨이 연기한 캐릭터 에드거는 널리 알려져 있듯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이름에서 따왔다. <살인의 추억>이 <뜨거운 녀석들>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것처럼, <설국열차>엔 두 사람의 우정이 슬며시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두 영화인이 긴 시간 동안 마음을 주고받던 중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신작 <더 러닝 맨>이 12월10일 국내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양극화가 극심해진 사회, 해고 노동자 벤 리처즈(글렌 파월)가 딸의 감기약을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위태로운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더 러닝 맨>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 특유의 빠른 속도감이 돋보이는 <더 러닝 맨>을 마스터스 토크의 주제로 올려놓고 대담자로 에드거 라이트 감독과 봉준호 감독을 초대했다. 두 영화인은 화상인 데다 통역가가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 봉준호 감독(왼쪽부터).

에드거 라이트 만나서 반가워!

봉준호 안녕, 에드거! 잘 지냈어?

에드거 라이트 잘 지냈지. 거긴 지금 몇시야?

봉준호 여긴 진짜 이른 아침이야.

에드거 라이트 하하! 이른 시간에도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

봉준호 영화, 너무 재미있게 봤어. 고마워, 영화를 먼저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에드거 라이트 너랑 인터뷰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일정이 워낙 많다 보니 문득 ‘봉준호 감독이 벌써 내 영화를 봤대?’ 이랬거든. 네가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너무 궁금했어.

봉준호 원작 소설을 쓴 스티븐 킹 작가도 <더 러닝 맨>을 봤대?

에드거 라이트 응, 봤어. 1987년에 만들어진 <런닝 맨>은 원작이랑 많이 다르잖아. 이번 영화는 훨씬 원작에 가까워서 스티븐 킹도 좋아하더라고. 봉 감독도 잘 알겠지만 스티븐 킹 소설이 원작인 장르영화 중에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많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1976)를 특히 좋아하지. 스티븐 킹 소설을 내가 영화로 만든다는 게 내겐 의미가 컸어. 스티븐 킹이 이 영화를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

봉준호 물론 스티븐 킹은 위대한 작가지만 나에게는 에드거 라이트 영화라는 게 훨씬 중요하고, 너의 신작으로서 보는 거니까. 이번에도 또다시 에드거 라이트 감독님 특유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하는 느낌, 약간 미치게 만드는 느낌이 있어서 나는 오로지 그게 좋았을 뿐이야. 스티븐 킹은 이 대담을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한번 이야기가 나왔을 뿐인 것 같아. 영화에 말도 안되는 미친 액션들이 많아서 너무 신나던데, 어떻게 접근한 거야? 그동안 <베이비 드라이버>(2017)나 <지구가 끝장 나는 날>(2013) 등 많은 영화에서 멋진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번 영화는 어떤 컨셉으로 접근한 건지 궁금해.

에드거 라이트 10대 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그땐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먼이란 필명으로 냈었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주인공 벤 리처즈의 시점으로 진행돼. 모든 장면의 한가운데 항상 벤이 있고 이야기 전체가 벤의 시선으로 흘러가면서 마치 그와 함께 게임 속을 살아가는 느낌이 들지. 그래서 영화로 만들 때도 그 감각을 지키고자 했어. 2021년 말에 마이클 바콜 각본가와 각색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정한 게 ‘우리는 끝까지 벤 리처즈를 따라간다. 그가 없는 장면은 단 한컷도 만들지 않는다’가 원칙이었어. 그 원칙을 정하니까 영화의 방향이 딱 잡히더라고. 액션을 어떻게 찍을지도 자연스럽게 정했고 카메라도 벤의 시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어. 모든 시선이 벤 리처즈에게 집중되니까. 관객 입장에서도 그게 훨씬 더 몰입되고 강렬하게 느껴질 거야.

봉준호 벤 리처즈 역을 글렌 파월이 훌륭하게 연기해줬는데 근육질 액션 스타가 애크러배틱한 액션을 하는 느낌이 아니었어. 스턴트 묘기를 과시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땀냄새나는 액션, 워킹 클래스 액션이라고 해야 하나? 이 사람의 분노한 감정이 계속 꽉 차 있어서 글렌 파월이 가진 느낌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 그래서 액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당연히 캐스팅 얘기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에드거 라이트 사실 이게 정말 중요한 지점인데 나는 글렌 파월을 캐스팅한 게 <더 러닝 맨>영화 전체를 결정지었다고 생각해. 글렌은 딱 봐도 무비 스타처럼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사람 같기도 하거든. 요즘 액션 스타들을 보면 애초부터 사람이 아니라 거의 초인급이잖아. 하지만 벤 리처즈는 그래선 안되거든. 관객이 ‘저 사람은 우리 편이야’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해. 벤 리처즈는 딸아이가 있는 백수 아빠잖아. 영화 초반부터 ‘이 캐릭터는 이 게임에서 못 살아남겠다’ 싶은 느낌이 들어야 했어. 글렌은 실제로 너무 매력 있고 유쾌하고 착한 사람이라 내가 처음 글렌에게 “밝고 유쾌한 글렌 말고 짜증난 글렌이 필요해”라고 말했어. 이 말이 좀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글렌은 화낼 때 진짜 웃기고 묘하게 매력 있거든.

‘앵그리 맨’에 가까운 분노 에너지

봉준호 엄청난 폭발이 터지고 헬리콥터가 날고 스펙터클이 나와도 주인공 벤 리처즈의 감정이나 열기가 화면을 뚫고 나와서 <더 러닝 맨>액션을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하는 것 같아. 영화 제목은<더 러닝 맨>인데 사실 벤 리처즈는 ‘앵그리 맨’이야. ‘앵그리 맨’이라고 영화 제목을 붙여도 될 정도로 그의 분노가 잘 느껴지고, 영화의 큰 에너지인데 그 분노의 원천이 결국은 딸의 감기약이라니…. 딸의 약을 구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이 데스 게임에도 들어온 거잖아? 그래서 더 처절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거대하게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이런 액션을 하는 게 아니라 딸이 아픈데 해열제, 즉 감기약이 없는 거! 그게 우리 시대, 2025년 지금 현실을 정확하게 찌르는 것 같아. 2025년이 되게 큰 의미가 있지. 원작 소설의 배경도 2025년인데, 영화가 개봉하는 시점도 2025년이니까.

에드거 라이트 벤 리처즈라는 인물의 핵심은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시스템에 맞춰 살았으면 더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이란 거야. 근데 그는 늘 부당한 걸 참지 못해서 오히려 손해를 보면서 살아왔어. 이 세계는 되게 냉혹하고 불공평하잖아. 벤 리처즈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화나 있고 세상의 부당함에 속으로 계속 끓어오르는 사람이고. 조시 브롤린이 연기한 댄 킬리언이 “당신은 동료를 위해 매번 위험을 감수했고, 그때마다 잘렸지”라고 말하거든. 그 대사는 이 캐릭터를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해. 어쩌면 벤 리처즈는 너무 이타적인 캐릭터라서 계속 벌을 받는 거야. 옳은 일을 하려고 할수록 더 크게 당하지. 그러다 보니 정당한 분노가 쌓일 수밖에 없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오히려 벤을 <더 러닝 맨>에 딱 맞는 참가자로 만들어. 그게 내가 이 캐릭터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해. 벤은 가족과 딸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해. 방송국을 찾아가지만 처음부터 <더 러닝 맨>에 나갈 생각은 아니었고 적당히 다른 프로그램에 나가서 다칠 순 있어도 죽을 일은 없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해. 근데 상황이 꼬이면서 갑자기 <더 러닝 맨>에 던져지는 거지. 요즘 액션영화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미 완성된 슈퍼히어로 같은 인물들이잖아. 존 윅은 이미 업계 최고의 킬러고, 제이슨 본은 기억을 잃었어도 최정예 요원이야. 슈퍼히어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근데 벤은 정반대야.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일도 못하는 실직한 아빠이고, 그런 사람이 길거리에서 끌려와서 생존 게임에 던져진다는 설정이 강하게 와닿았어. 아까 봉 감독이 말한 딸의 감기약 얘기도 재밌는 게, 사실 나랑 마이클과 글렌이 이걸 두고 “세상에서 가장 먼 약국 가는 길”이라고 부르고 있었어!

봉준호 이 모든 광란의 여정, 액션과 스펙터클이 작은 감기약 하나를 얻기 위한 이야기라는 게 웃기면서도 되게 슬프고 우리 시대를 꿰뚫는 하나의 화두일 수 있을 것 같아.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엔 양극화라든지 파시즘이라든지 많이 나오지만 이 영화의 특히 재밌는 지점은 주인공과 인물들이 카메라에 “야 그만 좀 찍어!”라고 소리 지른다는 거야. 그게 2025년에 개봉하는 <더 러닝 맨>만의 재밌는 분노 포인트인 것 같아. 우리는 요즘 카메라의 공해와 포화상태에 시달리며 살고 있잖아.

에드거 라이트 스태프들끼리는 극 중 등장하는 드론 카메라를 ‘로버’라고 불렀어. 드론 카메라를 그냥 카메라로 보지 않은 거지. 죽음을 맴도는 독수리처럼 누군가 죽기 직전에 나타나는 존재로 드론 카메라를 설정한 거야. 영화 속에서 드론이 나타나는 순간 ‘이제 누가 죽겠다’ 싶은 긴장감이 생기길 바랐어. 이 카메라의 역할 자체가 사람들이 죽는 순간을 찍는 거니까. 이 설정이 장말 멋있긴 했는데 촬영할 땐 골치 아팠어. 지금 이 장면이 영화 안의 카메라 시점인지, TV 중계 화면인지 계속 계산하면서 찍어야 했거든. 특히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는 좁은 공간에 영화 카메라 말고도 방송용 카메라가 세대나 더 있어서, 현장에서는 아예 카메라를 막대기 같은 데 달아서 ‘이건 방송 화면용 앵글’이라고 약속하고 따로 찍었어. 결과는 정말 만족스럽지만 촬영 과정이 진짜 복잡했어. 촬영 내내 이건 영화용 숏, 저건 TV용 숏으로 계속 구분해야 해서 너무 힘들었어.

정정훈 촬영감독, 어둠 속의 한 줄기 빛만으로

봉준호 그렇게 여러 대의 카메라와 복잡한 카메라 무브먼트랑 액션들이 되게 빠른 속도로 펼쳐져도 혼란스럽지 않다는 게 항상 에드거 라이트 영화의 큰 매력인 것 같아. <베이비 드라이버>오프닝 시퀀스의 액션을 얘기할 때도 발작적일 정도로 빠른 편집과 놀라운 스피드로 사건이 진행되는 데도 불구하고 매 숏들이 날카롭게 정돈 돼 있어. 그래서 너무 정확한 느낌에서 오는 쾌감이 있는데, 이번 영화 <더 러닝 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방금 말한 것처럼 PIP(Picture-In-Picture), 그림 속에 그림이 있고 막 복잡한데도 너무 혼란스럽지가 않아. 신기해! 직업적으로 그 비밀에 대해 네가 풀어줘야 해. 우리 동료 감독들을 위해. BFI(영국영화협회) 같은 데서 네가 그와 관련해서 4시간 정도 이야기해야 해. 우리 같이 먹고살자. (웃음)

에드거 라이트 방금 액션이나 블로킹을 칭찬해줘서 고마운데 나도 네 영화 보면서 늘 똑같이 생각해. 그 이유 중 하나는 너도 분명 공감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항상 아이디어는 넘치는데 예산과 시간은 모자라잖아. 그래서 그걸 결국 해내려면 계획을 정말 탄탄하게 세우는 수밖에 없어.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항상 직접 모든 그림을 그리고 전체를 다 설계한 다음 촬영에 들어가거든. 그래야 의미 없는 화면이 아니라 컷 하나하나가 하는 역할이 있고 앞 장면이 못 보여준 걸 다음 컷이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이 생겨. 물론 현장에선 상황에 따라 계획이 바뀔 수도 있지. 나는 촬영할 때마다 훌륭한 만화가들을 떠올려. 만화가들은 매 순간 프레임 구성을 다 다르게 잡잖아. 그래서 나도 액션을 찍을 때 ‘이 컷에서는 꼭 이걸 보여줘야 해’라고 생각하면서 프레임마다 새롭게 찍으려고 해. 액션이 지루해지는 순간은 카메라만 잔뜩 돌려놓고 그냥 막 찍을 때잖아. 이야기나 의도 없이 화면만 쌓일 때. 하지만 좋은 액션 시네마는 달라. 시점, 계획, 목적이 분명하지. 너의 영화들이 딱 그래, 늘 그런 시선이 있잖아. 결국 이건 설계의 문제라고 생각해. 시나리오를 쓰고, 장면을 구상하고, 예산이 넉넉해 보여도 실제로는 시간도 예산도 항상 부족하거든. 그래서 답은 하나야. 계획하고, 준비하고, 설계하는 것. 아, 이야기하다보니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너도 정정훈 촬영감독 잘 알지? 같은 한국 사람이잖아.

봉준호 이번에도 정정훈 촬영감독과 작업했지?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 이어 같이 작업해서 흥미로워. 그 케미스트리가 흥미롭고. 나 역시 정정훈 촬영감독의 팬이지만 같이 작업은 못 해봤어. 하지만 그가 아역배우 출신이고 배우와 연기자에 대한 이해도 남다를 것 같고 유머 센스가 뛰어난 분으로 알고 있어서 현장에서 너와 합이 잘 맞을 것 같은데? 세팅할 때 서로 농담을 많이 하지 않아?

에드거 라이트 맞아! 영화를 만드는 게 진짜 쉽지 않잖아. 이번 <더 러닝 맨>도 대부분 로케이션 촬영이었고 엄청 추운 데서 촬영한 장면도 많았어. 세트랑 촬영 장소만 165군데가 넘었거든. 그만큼 작업량도 미친 듯이 많았고 영화 현장이 늘 그렇듯 촬영 시간도 길고. 힘든 와중에도 늘 웃음을 준 정정훈 감독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웃음) 그리고 나도 그가 아역배우 출신이라는 거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정훈을 예전 프로그램인 ‘말썽꾸러기 찰리’라고 불러.

봉준호 정정훈 촬영감독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어린이 TV드라마의 주연배우였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너도 모르고 있다가 내가 얘기해주지 않았니?

에드거 라이트 맞아, 너한테 들었고, 정훈 본인도 그 얘기를 해줬었어. 그리고 이번에 아기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거든? 두살짜리 아기도 있고. 그럴 때 정훈이 현장에 있다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됐어. 정훈도 쌍둥이 아들을 키우는 아빠잖아. 아기를 상대할 줄 아는 사람이 촬영감독으로 현장에 있다는 게 엄청 든든했어. 아기들한테서 반응을 끌어내는 법을 정확히 아니까. 나도 그렇고 글렌도 아직 아빠가 아니야. 그래서 아기들이 지치거나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정훈이 옆에서 계속 달래주고 놀아줬어. 쌍둥이 아빠라 그런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으로 알고 있더라고. 진짜 고마웠어.

봉준호 배우도 물론 잘 다루지만 정정훈 촬영감독이 <더 러닝 맨>에서는 인상적인 지하 공간, 하수구, 누아르적인 뒷골목 같은 공간을 많이 담았는데, 어둠 속에 도망 다니는 등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많이 보여준 것 같아. 너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

에드거 라이트 나는 진짜 운이 좋았어. 커리어 동안 훌륭한 촬영감독들과 많이 작업했거든. 빌 포프 촬영감독과는 <베이비 드라이버>를 포함해 세 작품을 같이했어. 정정훈 촬영감독과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 이어 <더 러닝 맨>까지 함께했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에는 너의 영화들을 포함한 뉴웨이브가 있는데, 그 영화들 특유의 네오 누아르 감성이 진짜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특히 <살인의 추억>에서 보였던 그 분위기. 이번 영화에서 정훈이 그러한 감성을 완벽하게 살렸어. 디스토피아 로케이션, 특히 밤 장면을 찍을 때도 거칠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느낌이 있었어. 깜깜한 화면에 한 줄기 빛만 살아 있는 키아로스쿠로(명암 대비) 같은 방식 말이야. 그 느낌이 <더 러닝 맨>의 톤이랑 잘 맞았어. 실제 장소를 촬영하면서도 이 세계가 훨씬 거대해 보이도록 만들어야 했어. 그래서 ILM(시각효과 스튜디오)과 협업해서 실제 장소 위에 세트를 얹고 CG로 세계를 확장했어. 정훈은 그런 작업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이야. 불, 네온사인, 어둠 속 한점의 빛. 나도 촬영 전에 머릿속에 확실한 그림은 있지만 그게 정훈의 시선으로 구현되는 걸 보는 게 항상 흥미로워.

봉준호 이 영화엔 에너지 과잉의 화끈하고 뜨거운 음악들이 많이 있어. 에드거 라이트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어떤 최고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듣듯이 뮤직 리스트가 항상 환상적이란 건데, 에드거 라이트쿠엔틴 타란티노 두명이 음악 선곡을 환상적으로 하는 투톱이 아닐까? 이번에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 이전에도 나에게 너의 뮤직 플레이리스트를 많이 보내줬잖아. 이번 컴필레이션도 한번 보내줘. 원래 선곡했다가 탈락한 노래까지 다 묶어서 익스텐디드 버전으로 한번 보내주면 좋겠어.

에드거 라이트 이번 영화는 전작들에 비해서는 음악이 적어서 재밌어. 영화의 성격 때문인 것 같아. 이번엔 노래보다 스코어가 더 많고 스코어 작업도 꽤 복잡했거든. 스티븐 프라이스 음악감독이 만든 스코어뿐 아니라 극 중 TV쇼에 나오는 음악들과 쇼마다 테마음악이나 효과음까지 전부 따로 있으니까. <더 러닝 맨>세계를 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은 힘들었지만 진짜 재밌었어. 너도 시나리오를 쓸 때 그렇겠지만, 내가 마이클 바콜이랑 각본을 쓸 때 항상 스코어를 틀어놓고 작업하거든. 특히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많이 들었던 존 카펜터랑 앨런 하워스가 작곡한 <뉴욕 탈출>(1981) 스코어, 그리고 <로건의 탈출>(1976) 속 제리 골드스미스의 스코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