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중을 유쾌하게 만들려고 욕심을 부리다 도리어 주변을 불쾌하게 하는 인간. 그래서 경계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너른 품을 펼쳐 보이는 사람. 배우 박용우가 영화 <넌센스>에서 연기한 순규는 그런 남자다. 웃음치료사의 탈을 쓰고 “모든 것이 진짜인 동시에 가짜”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의 얼굴을, 박용우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직관이 주는 설렘을 신뢰한다.
올해 공개된 드라마 <메스를 든 사냥꾼><은수 좋은 날>출연을 결정할 때도 비슷했다. 지금 그가 끌리는 인물은 선과 악 중 한쪽만을 대변할 수 없는 다면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줄 타듯 경계를 가로질러온 30년차 배우에게 오랜만에 한편의 영화를 위해 괴짜 하나를 조각해본 후기를 들었다.
- 요즘 고전영화를 즐겨 본다고 들었다. 부쩍 챙겨보게 된 계기가 있나.
연기할 때 ‘리액션’을 중시하는 편이다. 상대 배우의 대사와 표현에 따라 내게서 무한대의 리액션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나 드라마들에서 리액션의 순간들이 점점 안 보인다. 유튜브나 SNS가 추구하는 물리적인 속도감의 영향인지 모르겠는데, 감정적인 전진만 있을 뿐 반응숏이 없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고전에는 그런 리액션이 풍부하다. 그걸 다시 확인해보고 싶어 예전 작품을 많이 보고 있다. <황야의 무법자><대부>그리고 <인썸니아>같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초기작들까지 무작위로 다시 보는데, 볼 때마다 새롭더라.
- <넌센스>도 누군가에게 그런 작품이 될지 모른다. 시나리오의 첫 느낌은 어땠나.
읽었을 때 내가 어떻게 연기할 수 있을지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시나리오에 마음이 움직인다. <넌센스>의 순규라는 인물도 그랬다. 그는 통화하는 목소리로 처음 등장하는데,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부터 떠올랐다. 이런 직관적인 선택이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런 직관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 <넌센스>는 <헤어질 결심> <노량: 죽음의 바다> 특별 출연 이후 오랜만에 작업한 영화이기도 하다. 신인 이제희 감독은 박용우 배우를 어떻게 설득했나.
너무 오래돼서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웃음) 하나 무척 인상적이었던 건 이제희 감독이 내가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찍은 작품의 90% 이상을 봤다는 거였다. 이전부터 내게 관심이 있었든, 나를 캐스팅하기 위해 챙겨봤든, 둘 다 감사한 일이잖나. 그게 너무 고마웠다.
- 순규는 유나(오아연)와 처음 만났을 때 스스로 “진주 강씨 시중공파 27대손”이라 소개하고, 왕년에 유명 개그맨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풍인지 염두에 뒀나.
전체적인 맥락은 감독과 상의하되 가지치기를 해나가는 건 배우의 몫이다. 이번에도 대략적인 뿌리는 감독님과 자주 만나면서 만들어갔고, 나도 여러 대사를 직접 건의했다. 진주 강씨 대사도 그중 하나다. 순규는 상대를 웃기고 싶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데, 그게 어색하고 유쾌하지 않은 결과를 만든다. 그래서 나도 수시로 여러 시도를 했다. 내가 바란 건 실소가 나오는 개그였는데, 감독님은 그보다 불쾌하기를 바라셨다. (웃음)
- 강당에서 웃음치료사로서 수업할 때도 어느 정도로 과장된 액션을 취할지 고민했을 텐데.
그 장면이야말로 직관적으로 임했다. 감독님이 웃음치료 강의 영상을 레퍼런스로 보여줬지만, 사실 시나리오에는 그냥 ‘순규가 웃음치료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신흥종교 단체 같기도 하다’라는 식으로만 적혀 있었다. 그래서 감독님이 보여준 레퍼런스와 내가 따로 찾아본 자료들을 섞어서 직접 웃음치료 프로그램을 짜고, 리허설할 때부터 수강생 역의 보조출연자들 앞에서 강사처럼 행동 했다. 정확한 대사들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는데 편집을 잘해주셨다.
- 집단치료에서 발휘하기 시작한 기이한 카리스마는 대학 야구선수 현섭(전성일)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폭발한다. 그때부터 순규가 진짜 사람을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싹트더라.
처음에는 현섭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돌면서 연기했다. 둘 사이에 거리감을 두고 싶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조금 더 강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현섭과 이마까지 툭툭 부딪히면서 한번 해봐야겠다는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올렸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인 만큼 감독님의 공이 크다.
- 사람을 사로잡아 자기 몫을 챙기는 일에 능한 순규에게 유나는 빤한 상대였을까, 까다로운 상대였을까. 어떻게 가정하고 연기했는지 궁금하다.
내가 판단한 순규는 상대가 어떻든 크게 걱정하지 않는 캐릭터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얻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조바심을 갖고 쫓기면 안된다는 걸 순규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유나를 꿰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꿰면 된다고 여긴 셈이다. 한마디로 고수라 할 수 있다.
- 순규는 유나의 변화까지 목격한 뒤 자신이 운영하던 이벤트 업체 쇼타임을 떠난다. 그가 어디로 향한다고 상상했나.
원래 시나리오에서 순규는 형사들에게 잡혀간다. 발버둥치면서 개처럼 끌려간다. 이 아이러니가 코미디로도 다가와 재밌었는데, 순규의 결말이 미스터리해지면서 주제가 더 진해졌다. 결국 이 영화는 믿음이라는 게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현섭이 코치를 폭행한 것도, 보경(임현주)이 먼 곳으로 떠나 자유롭게 사는 것도 다 그들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순규는 아마 자기가 나쁜 놈이 아니라고, 진짜 웃음치료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고급 사기꾼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는 인간일 것 같다.
- 드라마 <메스를 든 사냥꾼> <은수 좋은 날>에서도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악역을 맡았다. 앞으로는 어떤 흐름을 타고 싶나.
극단적인 선함, 극단적인 악함을 대변하는 캐릭터는 최대한 지양하지 않을까. 혹시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내가 표현할 때만큼은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그려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계속 그렇게 연기해나갈 생각이다. 힘 빼고, 진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