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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미지의 설국을 성큼 가로지르는, <여행과 나날> 리뷰

우리는 영화관에서 몇번이나 세계의 갱신을 경험하는가. 영화가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예기치 못한 이동을 단행할 때, 시간의 흐름이 문득 무상하지만은 않은 밀도로 다가올 때 되살아나는 감각이 있다. 매끄러운 장면화의 상투성에 포섭되지 않는 미야케 쇼의 영화라면 자주 벌어지는 신비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시작으로 한국 관객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이 작가는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1), <새벽의 모든>(2024), 뒤늦게 소규모 상영 및 개봉이 추진된 <플레이백>(2012), <와일드 투어>(2019) 등을 통해 박동하는 화면 속의 공기와 생동감으로 각인되어 왔다. 4:3 비율의 프레임 속에 일본 고전영화의 정취가 묻어나는 풍경을 담아낸 <여행과 나날>이 한층 정제된 양식을 추구한 영화로 보이긴 해도 자유로운 태생은 변함없다. 어김없이 날씨와 호흡하는 미야케 쇼의 신작은 춥고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되살아나는 생의 감각을, 단순하지만 귀중한 그 기분을 담아낸다. 여름에서 겨울, 여행의 시작과 끝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의 상태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는 것처럼.

미야케 쇼의 영화에는 이동의 논리보다 도착의 경이가, 서사의 인과보다 순간의 출현이 환영받는다. 극장의 불이 꺼진 후 덜컥 등장하는 빌딩숲의 정경은 영화가 어둠 속에서 화면을 처음 열어젖히는 움직임 자체를 의식한 숏이다. 이후 카메라는 순수한 발견을 위해 움직인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노트의 여백, 극중극에서 상영회장으로의 가뿐한 전환, 터널의 어둠 끝에 자리한 눈부신 설국을 성큼 가로지르는 <여행과 나날>이 좇는 것은 카메라 안에 담기는 고정되지 않은 세계의 변화무쌍함과 떨림이다.

<여행과 나날> 속에는 관객이 바라는 온기의 저편에서 머리가 잘리거나 얼어죽은 물고기의 사체가 덩그러니 보여지고, 해가 지고 난 언덕과 태풍 속 바다는 걷잡을 수 없는 아득한 어둠과 위험천만한 파도를 일으킨다. 자연의 정조가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이루는 동시에 무상한 죽음의 이미지 또한 곳곳에 관류하고 이 공존은 작가의 창작욕과 슬럼프가 곧 한몸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여름 편에서 청년은 언젠가 해변가에서 본 적 있는 익사자의 시체에 관해 말하는데, 화자가 강조한 이야기의 무서움은 청자에 의해 곧 슬픔으로 바뀐다(“무섭다기보단 슬픈 이야기인데요?”). 마찬가지로 여름 편에서 불길하게 비친 물고기의 이미지는 겨울 편에서 동화같은 명랑함으로 채색되기에 이른다. 한 개인의 내면적 여정이 두른 서정적인 살결과 거대한 자연의 품은 부조리함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요컨대 미야케 쇼의 영화는 세계의 버거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넌지시 포즈를 잡는 사람들을, 그들과 함께 흐르는 풍경을 각인시킨다. 스크린을 마주하는 관객의 자리에서 묘사하자면 그 모든 것들이 감격스럽게 왈칵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카메라의 여행이기도 하다. 이의 작업을 독려했던 은사의 죽음은 그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동생에 의해 비통함 대신 신기함으로 뒤바뀌고, 그는 이미지 앞에서의 자격을 의심하는 이의 만류를 무릅쓰고 기어이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쥐어준다. 집 안 선반에 잠들었던 카메라가 이와 함께 낯선 소도시에 도착해 종내에는 이조차 구경하지 못했던- 벤조가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집 안까지 들어가는 셈이다. 필름카메라는 언어 바깥으로 솟아오르는 숏과 몽타주의 생명력을 품어내는 사물로서 <여행과 나날>에서 잠시 주인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카메라야말로 누구보다도 멀리 여행하는 존재이다. 어느 작가의 작은 회복기를 통과하며 우리는 그가 믿는 매체가 세계를 모험하는 방식을 함께 경험했다. 그 끝에, 기차역으로 향하는 주인공이 미지의 설원 위를 걸어 나간다. 여행과 나날의 또다른 시작이다.

사진제공 엣나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