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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터널을 지나고 전차를 기다리는 사이에, <여행과 나날> 미야케 쇼 감독

- 이(심은경)가 쓴 각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여름 편)와 자신의 여행(겨울 편)이 나란히 이어지는 구조다. 우선 원작 만화에선 이가 만화가인데 각본가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원작 그대로 만화가 설정으로 썼다. 하지만 뭔가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는 만화 전문가도 아니고, 물론 아주 가까운 직업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만화가의 생활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각본가로 바꿨다. 원작자인 쓰게 요시하루가 왜 만화가가 주인공인 작품을 그리는지, 그러니까 왜 자기와 닮은 사람에서 시작하는지 생각하면서 나 역시 나와 비슷한 직업, 영화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를 영화화하는 작업에 있어 더 정확한 선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액자식 구성을 차례로 보는 동안 주인공이 쓴 영화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가져보게 된다. <여행과 나날>속 극중극, 즉 영화의 역할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였나.

관객이 영화에 놀랐으면 했다. 나도 평소 영화관에 가면 처음에는 영화를 보고 있구나 생각하지만 중간쯤엔 어느새 영화라는 걸 잊고 그 안에 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영화가 끝났을 때 그제야 지금까지 본 게 전부 영화였다는 걸 깨닫는 그런 일이 있다. 이것이 영화 체험의 굉장한 지점이다. 그런 작은 놀라움에 관한 생각이 우선 출발점에 있었다. 다만 이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각본과 영화의 관계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각본을 쓰는 것, 즉 문자로 표현하는 것과 촬영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큰 비약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절감하는 편이다. 촬영 현장에서는 아무리 각본에 따라 찍더라도 책상 앞에서 결코 쓰지 않았던,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간혹 그런 지점이 영화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 감독으로서는 기쁘지만 각본을 쓴 사람으로서는 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언제나 이야기 이상의 것이 영화에는 많이 찍힌다. 그리고 하나 더, 주인공은 자신이 각본가로서 부족한 것 같다는 부정적인 대사를 내뱉지만 아마 그건 다시 한번 영화에 대해 진실로 생각해보고 싶다는 마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 <여행과 나날>을 촬영하면서 지금 들려준 것처럼 현장의 환경과 우연에 항복한다는 심정으로 대응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아주 많았다. 특히 여름편의 거의 모든 컷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가와이 유미 배우가 연기하는 여성이 차 안에서 일어나는 첫 장면은 각본상 말 그대로 일어난다는 지문밖에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카메라를 돌리면 커다란 구름이 흐르고 바다 소리가 들리고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세상의 정보가 침투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영화가 바람을 찍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것을 품을 수 있는 매체다. 지금까지 나와 동료들은 시간대마다 바뀌는 빛이라는 것을 매우 소중히 여겨왔고 어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계속해서 바람을 더 제대로 찍고 싶었다.

- 이를테면 가와이 유미 배우가 등장하는 그 장면을 먼저 찍은 후 극 중 심은경 배우가 연필로 쓰는 시나리오의 지문을 맞춰서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겠다.

바로 그 부분을 즐겨주었으면 했다. 일상은 대체로 예측 가능한 일의 연속이다. 어쩌다 가끔 예측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데, 여행을 가면 바로 그 밸런스가 달라진다. 영화가 그 정도의 감각과 비슷해지면 좋겠다. 다음 장면에서는 ‘분명 이렇게 되겠지’ 싶은 예측 가능한 이야기인 동시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특히 바람 같은 것이 살아 있다. 예측 가능한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 사이에서 진동하는 재미를 골몰하다보니 각본과 영상의 차이에 대해서도 부각하게 된 것 같다.

- 이는 직접 연필로 노트에 초고를 쓰는, 요즘 시대에 드문 시나리오작가다. 원작자인 쓰게 요시하루 세대의 아날로그 만화가들에 대한 애호가 묻어난 설정으로 느껴지는데 감독도 혹시 우선 손으로 쓰고 보는 유형인가.

주로 컴퓨터를 쓰지만 가끔 손으로 쓰기도 한다. 특별히 정해둔 것은 아니어서 쓰기 전에 5초 정도 고민하는데, 항상 딱 5초 그뿐이다. <여행과 나날>에서 손으로 각본을 쓴다는 설정에서 이미지만큼 중요했던 것은 소리다. 연필과 종이가 닿는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싶었다.

- 여름과 겨울 이야기의 차이와 반복, 대구에 관해서는 얼마나 의식했나. 각본 집필, 프로덕션, 편집 등 작업 시점으로는 어느 단계 즈음에 병렬의 효과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았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완성된 후 관객의 감상과 비평가들의 텍스트를 읽고 내가 상정했던 것 이상으로 여러 가지가 쌍둥이처럼 대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예를 들면 죽은 물고기가 여름과 겨울 편에 모두 나온다.

여름 편에서 해변 물웅덩이에 머리가 잘려 죽은 물고기를 봤을 때 웃는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죽어 있는 물고기지만 이와 벤조(쓰쓰미 신이치)가 양동이에서 얼어버린 물고기를 들여다볼 때 사람들은 미소를 짓는다. 사물로서는 완전히 같은데 상황과 이야기가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인상이 된다. 굉장한 자유로움이다. 사후적으로 생각하기를 그게 바로 내가 <여행과 나날>에서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감각의 선입관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 변화가 계절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진다면 더 좋고.

- 자연의 시청각적 존재감이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큰 영화지만 돌이켜보면 당신의 영화는 언제나 환경과 공기를 카메라에 담아내는 생동감으로 넘실거렸다. 스탠더드 화면비(4:3) 속 롱숏(원경 촬영)을 구성하고 보다 정제된 화면을 추구한 이번 작품에서 전보다 염두에 둔 지점이 있었나.

공기라고 읽어주어서 기쁘다. 관객으로서 내가 영화를 볼 때 가장 즐기는 지점도 화면의 공기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 바깥에 펼쳐진 세계를 관객이 상상해줄 것이라 믿는 태도가 대전제라는 점이다. 프레임 사이즈가 스탠더드든 시네마스코프든, 언제나 프레임 안보다 그 밖이 훨씬 넓다. 달리 말해 스탠더드 화면비는 더 큰 바깥을 상상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프레임 안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만큼 그 바깥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했다. 그러려면 다시, 이미지만큼 사운드도 중요해진다.

- 인물과 인물간 거리도 재미있는 문제다. 언제나 제법 적당한 거리를 둔 두 사람이 묘사된다.

여름과 겨울을 통틀어 주요 등장인물인 4명은 상대방과 그다지 인위적으로 친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싫어한다거나 미움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행동의 동기는 캐릭터마다 다르다. 평소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아서 관계 자체에 서먹한 이도 있고 인간관계에 이제는 너무 지쳐버렸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이에 관해서 말하자면 관계가 서툰 쪽에 가까울 텐데 어느 쪽이든 물리적 거리에도 민감한 것은 마찬가지일 테다.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지만 실은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다거나 어느새 멀어졌다거나 하는 점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상태라고도 봤다. 그런 거리는 유머러스하지만 조금 슬픈 기색도 품는다.

- 대단히 친밀해진다든가 절대적인 관계 같은 것은 결단코 아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한 연결이 있다고 믿게 만든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새벽의 모든> 등 혼자만의 고독도 아름답지만 또 혼자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무엇이 있음을 전작들부터 새겨오고 있다.

내 안에서 구호로서 정립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그런 느슨한 연결이라는 것을 실생활에서 바라는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너무 좁혀진 거리는 말을 바꾸면 강한 마찰, 즉 폭력도 된다. 혹은 반대로 고독이 사람을 괴롭히는 풍경도 우리 주변에 실재한다. 그렇다면 고독해도 행복해지는 방법, 약간의 거리를 두고 그런 서로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감독 이전에 개인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던 것 같다.

몽타주의 온전한 놀라움

- 영화의 첫 시작점은 4:3 화면에 들어찬 도시 빌딩 숲의 독특한 전경으로 주의를 끈다. 하지만 흔히 고전 문법에서 이야기하는 설정숏(establishing shot)의 감각하고는 조금 다른 것이, 다음 숏에서 그 빌딩 숲 중 어디쯤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이의 집으로 툭 건너뛰어서 곧장 인물의 상반신을 비추기 때문이다. 다음엔 작가의 노트가 화면을 채우더니 이내 극중극으로 전환된다. 조용한 영화지만 몽타주는 담대해서 새롭게 환기되는 순간들이 각인됐다. 콘티 구성, 그리고 편집 단계에서 설정한 기조가 있는지.

이 영화의 얼굴에 어울리는 몽타주 방식을 여름 이야기를 다 찍고 난 후에야 스스로 체감할 수 있었다. 축약하자면 방금 언급한 건너뜀, 약간의 놀라움을 주는 이동 등이었을 텐데… 보통 여행영화라고 하면 대체로 인물이 이동하는 동선과 그에 맞는 자연스러운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가급적 이를 지양하고 숏이 바뀔 때마다 뭔가 놀라움이 생겨났으면 했다. <여행과 나날>의 터널숏들에 비유할 수 있을 듯싶다. 터널 끝에서 새로운 풍경이 훅 들이닥칠 때와 같은 느낌이 터널이 아닌 공간에서도 비슷한 기분 좋음과 압도감을 주길 바랐다. 예를 들면 영화의 첫컷이란 관객에게 현실의 터널을 막 빠져나간 뒤 마주하는 첫 순간의 놀라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빌딩 숲 장면이 전통적인 설정숏이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3초 정도는 더 짧았어야 했겠지만 조금 더 길게 썼다, 그 순간의 놀라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 <여행과 나날>의 최초의 풍경은 그렇다면 영화관 밖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완전히 그렇다.

- 비슷한 방식으로 여름 편에서 해변으로 향하는 가와이 유미 배우의 장면은 불가사의해서 외려 장소와 동선의 리얼리티를 따져보게 만든다. 언덕을 오르고 작은 터널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은 실제 로케이션에 최소한이나 기반한 것일까. 숏의 연결로 온전한 가상의 지도를 그린 건가.

후자다. (웃음)

- 두 남녀가 해가 완전히 저물 동안 한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롱테이크 장면은 야생적이고 불온한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어떻게 촬영된 장면인가.

조금 밝은 곳에서 어둠에 잠길 때까지의 시간, 아마 실제로는 태양이 지고 나서 깜깜해질 때까지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시간대에 맞춰 촬영했다. 그때 어떤 풍경이 보이는지, 어떤 빛의 변화가 있는지. 단지 서서히 어두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거리의 가로등이 조그맣게 켜지거나 작은 차가 움직이는 불빛이 감지되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 기술적으로 많아야 테이크를 5번 정도 갈 수 있겠더라. 정말로 꽉 채워 다섯번을 찍었고 최종적으로 마지막 테이크를 썼다.

- 인공조명은 전혀 쓰지 않았나.

전혀. 그대로 어둠에 안 보이게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반쯤 농담하자면 두 사람이 만약 로맨스영화에 나오는 연애에 익숙한 등장인물이었다면 해가 지는 사이에 관계를 더 좁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웃음) 축구 경기로 말하면 이제 로스타임이거나 혹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라운드에 있는 것 같은, 뭔가 그런 이상한 시간이다. 아까 그걸 불온한 시간이라고 말해주었는데, 틈새에서만 드러나는 인간의 사랑스러움이 있다. 그런 의외의 면모가 내게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 태풍 속 바다 수영 장면 역시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게 포착됐다.

육지와 꽤 떨어진 곳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 바다의 무서움을 느껴주었으면 해서다. 실제로는 배우들이 위험하니까 발이 닿는 정도의 거리에서 어떻게 하면 장소의 공기로서 바다가 지닌 힘과 무서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비는 스태프들이 뿌린 것이지만 그럼에도 태풍이 다가오는 날의 인상이 중요해서 파도가 실제로 조금 거친 날을 택해 촬영했다. 안전에 무척 유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사실은 조금 위험했던 게 아닌가 반성도 된다.

- 여름 편의 소요가 잦아든 겨울 편은 한밤의 잉어 도둑이 된 벤조가 경찰서에 간 사이 다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는 이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역시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치유라든가 해결이 아니라 어느 작은 회복, 말하자면 심호흡 같은 것이 가능해지는 결말이다.

마지막은 꽤 여러 버전을 쓸 정도로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마음에 든 건 벤조를 기다리는 동안 저녁 전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하는 ‘사이 시간’의 존재였다. 조금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뭔가 좀 해보자는 느낌, 거기서 영화가 끝나게 하고 싶었다. 실생활의 예를 들자면 약속 장소에 가는데 조금 일찍 나와서 서점에 들르고 거기서 좋은 책을 만난다든가 하는 식으로 예정된 시간 이외의 부분이 삶을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시간이 잘 없다. 이 역시 각본을 제대로 다시 써보자고 결행하고 시작하면 무거울 테지만 전차가 올 때까지 시험 삼아 잠시 해보자고 할 때는 손이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다. 살다보면 아주 사소한 순간에 세계가 확 바뀌는 느낌이 든다. 심은경 배우를 <여행과 나날>의 주연으로 하자고 생각한 것도 어느 날 산책 중에 찾아온 직감 덕분이었다. 물론 은경씨에 관해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그와 함께하자는 결심이 일어선 지점은 아주 사소한 한순간이었다고 하겠다. 그런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 이와 벤조의 슴슴한 이별을 마지막으로 끝맺음하고 싶다. 벤조가 마을로 향하기 전 두 사람이 멀리서 인사하는 장면이 마지막이다. 어떤 온도로 그리고자 했나.

배우를 롱숏으로 찍는다는 건 처음부터 어렴풋이 머릿속 이미지에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그날의 날씨였다. 눈은 얼마나 쌓여 있을까, 도대체 어떤 날씨가 될까. 꽤 봄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촬영 전날까지는 눈이 많이 녹아버려서 약간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흙과 섞인 갈색 눈이 이곳저곳에 있었다. 설국의 아름다운 환상이 이제는 약간 식어버린 것 같은, 동화가 끝나버리는 분위기를 막연히 그렸던 이유다. 그런데 촬영날 아침에 가보니 한밤중에 갑자기 폭설이 내려서 눈이 흰 이불처럼 사방을 덮고 있었고, 카메라를 돌리기 직전에는 갑자기 눈보라까지 시작되어서 ‘아, 완전히 날씨에 맡겨졌다’고 생각했다. 꿈처럼 깨끗한 풍경을 유지하는 날씨에 마지막 장면의 걸음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