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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물방울이 기억할 때, 하미나 작가가 바라본 <사운드 오브 폴링>

한 여성을 상상해본다. 그녀는 일상에서 불편함 혹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우울증이나 자살 사고에 시달리고 있을 수 있고, 불안장애나 성격장애 아니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겪고 있을 수도 있다. 병명으로 자신의 상태를 진단해뒀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 생겨나는 반복적인 문제- 이를테면 연인, 배우자, 아이 등과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반복적으로 실패한다든지– 혹은 어머니와 갈등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이렇게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나아지고 싶다. 나아지고 싶어서 원인을 추적한다. 내가 왜 이럴까. 혹은 너는 왜 이럴까. 기억을 뒤적거린다. 이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그녀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고, 그러다가 그녀 자신을 넘어서 더 오랜 과거를 추적하게 될 수 있다. 그녀 어머니의 기억, 어머니의 어머니의 기억,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기억. 그러면서 그 시대의 주변 인물이 함께 끌려나온다.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 친족을 넘어선 인물들이. 이 회상은 본질적으로 어렵다. 곳곳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로 여성들의 역사가 대체로 문자화되지 않았고,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주류 역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다. <사운드 오브 폴링>속 인물 프리츠는 다리가 절단된 상태로 등장하고, 그의 부상은 “일터 사고”(Arbeit Unfall)로 보고되지만 이를 목격한 소녀의 기억은 다르다. 그의 다리 절단은 가족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둘째로 기억하고자 하는 열망은 망각하고자 하는 열망과 치열하게 다툰다. 우리를 베고 지나간 경험을 우리는 대체로 잊고자 한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할퀴고 지나간 기억에 대해 어머니들은 함구한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말하지 않은 것들, 잊기를 바랐던 것들,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일들은 우리 곁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일상 곳곳에서 출몰한다. 그러니 단서를 찾는 곳은 말해진 역사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채 심상치 않게 남은 장면들에서다. 예컨대 열쇠 구멍 사이로 본 헛구역질하는 어머니의 모습. 갑자기 걷지 못하게 되어 넘어진 뒤 마룻바닥에 누워 때에 맞지 않게 웃는 얼굴. 생일날 많은 이들이 축하해줄 때 반기기는커녕 당혹스러워하는 얼굴. 폴라로이드 사진 속 절반만 존재하는 인물. 프리츠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왼쪽 다리에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이제 거기 없는데도 아플 수 있다는 게 우습다”.

셋째로 트라우마 기억은 해리되어 저장된다. 일상적 자아로 살아갈 때 사건은 시간 순서와 맥락, 감정, 자신에 대한 인식이 하나로 연결된 서사적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압도적이기에 뇌는 생존을 위해 기억을 쪼개서 분리 저장한다. 신체 감각, 이미지, 소리, 단편적인 장면, 이런 것들은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로 묶이지 않은 채 조각나 섬처럼 저장된다. <사운드 오브 폴링>의 많은 장면들처럼 시점이 돌아다니고(나는 그걸 겪은 사람이었을까, 관찰한 사람이었을까?), 현실감각이 무뎌져 있다(그건 현실이었을까, 꿈이었을까, 상상이었을까?). 무엇보다 해리된 기억은 현재에 침투한다. 몸의 반응, 악몽, 플래시백, 특정 냄새·소리·표정에서 되살아나는 불안으로 과거는 끝나지 않은 채 남아 한 사람 안에서 계속 현재시제로 반복된다. 영화 속 시간이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반복하여 회귀하는 것처럼.

그러니 잊힌 역사를 회상하는 일은 <사운드 오브 폴링>의 독일어 원제 ‘In die Sonne Schauen’이 말하듯, 태양을 바라보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나 태양을 바라보는 일이 어렵다고 해서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태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지 못할 때에도 태양은 매일 지구를 밝히고 덥히며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한다. 이 영화를 ‘세대간 트라우마’라는 키워드로만 해석한다면 그건 영화를 너무 간과하는 일일 테다. 한명의 인간을 그가 가진 상처로만 해석하는 것처럼, 세대를 넘어 생존한 인간이 가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회복력을 간과하는 일일 테고, 나를 할퀴고 간 경험이 나를 자라게 하기도 했음을 잊는 일일 테다. <사운드 오브 폴링>에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장면들, 기억 속에서 잊히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가족이 다 같이 식사하던 때 접시 위에 잠시 앉은 파리처럼. 친구와 호숫가에서 놀다 먼저 수면 밖으로 나왔는데 친구가 나오지 않아 잠시 불안을 느끼는 때처럼. 할머니의 손등을 꼬집어 주름을 만들어보고 다시 내 손등을 꼬집어보며 서로 다른 피부의 탄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때처럼. 물속에서 장어의 움직임을 볼 때처럼. 이것은 해리된 트라우마 기억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은 깨끗했던 어린아이의 시선이기도 하다. 커갈수록 우리는 과거를 회상한다고 말하며 스스로에 대한 신화 만들기에 골몰하게 되니까.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가능한 이야기를 침묵시킨다는 것을 알 때, 장면과 장면을 이어 붙여 이야기를 짓는 과정이 또 다른 거짓말인 것은 아닐까 의식할 때, 체험한 내용을 시간 속에서 배열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자아가 싫어질 때, 오로지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의미를 부여할 새 없이 기억의 감광판에 붙들린 찰나의 순간들만이 아닐까. 그렇다면 해리된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트라우마 환자나 피해자이기 이전에 일상적 세계를 찢고 등장한 세계 본연의 모습을 먼저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게 <사운드 오브 폴링>은 일종의 가벼운 충격을 주며 자아의 심층부에 닿아버린 기억의 조각들로만 이루어진 영화 같았다. 피해나 고통, 불안과 트라우마 같은 단어로는 당최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함이 모든 균열에서 전해졌다. 모든 존재를 차별하지 않고 틈새로 내리쬐는 태양처럼. 물방울이 세계를 기억한다면 이런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사건과 사건, 존재와 존재, 현실과 또 다른 현실 사이에 경중이 없이 세계를 본다면 이런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태양에 의해 증발하고 다시 뭉쳐져 비로 내리고, 스며들었다가 땀으로 호수로 눈물로 다시 등장하는 물방울처럼 말이다. 그런 시선을 되찾고 싶어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노스탤지어에 시달렸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