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결심하는 순간 영화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국정원 블랙요원 조 과장(조인성)은 동남아시아에 인신매매로 끌려온 휴민트 수린(주보비)를 인도적으로 돕고 싶다. 그러나 조직은 수린의 정보만 취할 뿐 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승인하지 않는다. 수린의 삶에 개입할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 조인성 배우는 이 선택의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며 관객의 숨을 조인다. 그리고 종국에는 늘 선한 쪽을 택한다. 한데 그 모습이 조인성이란 배우를 통과하면 설득력 있고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흔들리는 눈빛, 깊게 팬 미간의 주름, 그리고 긴 팔다리를 시원하게 뻗어내는 특유의 액션까지. 그가 구현하는 외면과 개입 사이의 낙차는 영화의 공기를 뒤흔든다. 류승완 감독은 그의 ‘결심의 순간’을 유독 극적으로 포착해왔다. <밀수>에서 춘자(김혜수) 대신 조폭들과 맞서기로 마음먹을 때, <모가디슈>에서 북한 사람들을 돌려보내려는 한 대사(김윤석)에게 반박하는 순간 영화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의 캐릭터들처럼 이 배우가 얼어붙은 한국영화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설 연휴를 앞두고 개봉하는 <휴민트>를 시작으로 나홍진, 이창동 감독과 협업한 영화 <호프>와 <가능한 사랑>이 연내 공개된다.
- <휴민트>가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영화계가 어려울 때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영화로 호명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훨씬 영화적 쾌감이 있다’는 걸 관객에게 알려드리는 게 목표다. 극장가가 어려운 와중에 <왕과 사는 남자>, (최)우식이의 영화 <넘버원> 등 좋은 영화들이 포진해 있다. 전체 산업의 파이가 넓어지는 게 참 중요하다. <휴민트>도 그 일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조인성 배우가 연기한 조 과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지는 범법과 비인간적인 사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관찰자로 등장한다. 동시에 언제든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물이다. 관객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눈인 동시에 관객 대신 움직여주는 캐릭터다.
관찰자형 캐릭터이기에 관객들이 다양하게 자기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끔 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과장의 캐릭터를 설명해야 했기에 고민이 있었다. 휴민트와 함께하는 장면에서 어떤 말투, 어떤 텐션인지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초반에 등장하는 휴민트 수린과의 대화 신에서 조 과장은 부드럽게 상대를 대한다. 이후 워낙 센 액션신이 있기 때문에 입체성이 느껴지도록 수린에게 다정하게 다가가려 했고, 조 과장이 휴민트와 정보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정서도 주고받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채선화(신세경)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로 언제든 불편하면 돌아가도 된다는 선택권을 상대에게 준다. 사실 <휴민트>는 쉬어갈 장면이 없는 영화다. 조 과장은 다정한 말투로 휴민트와 라포르를 형성하고 관객에게도 숨 쉴 틈을 준다.
- 조 과장의 감정과 동기에 공감이 안 가면 영화의 흐름을 타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지는 휴민트 수린과의 신이 중요했을 듯하다.
그 장면을 첫날 찍었다. 조 과장의 액션신부터 수린이 숨이 멎어 심폐소생술을 하는 장면까지 1회차부터 쭉 순서대로 찍었다.
- 배우 입장에서는 캐릭터가 겪는 사건의 순서대로 연기할 수 있어 좋았을 듯하다.
좋았는데 첫날부터 대사와 액션을 하려니까…. <베테랑2> 오프닝 시퀀스를 보면서 ‘저거 참 쉽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는데, 1회차부터 내가 그런 장면을 찍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웃음)
- <모가디슈>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류승완 감독님스러운 모습이 나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 같다”라고 얘기한 적 있다. 인간적인 모습이나 정 같은 것들이. <휴민트>속 조 과장도 마찬가지일까.
류승완 감독님이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을 조 과장에게 투영해주신 듯하다. 품위 있고 다정하고 또 여유 있는. 류 감독님에게 팩트 체크는 안 해봤지만. (웃음)
- 류승완 감독 특유의 집요함도 조 과장에게서 묻어난 듯하다. 수린의 심장이 멈췄을 때 끝까지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마음을 다한다.
조직과 갈등으로 그 친구를 그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나 하는 미안함과 절실함을 표현한 장면이다. ‘살아만 주시면 꼭 당신이 원하는 행복한 길로 인도하고 싶습니다’라는 마음까지. 여러 감정으로 수린을 살리고자 한다.
- 관객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 액션을 기대한다. <모가디슈> <밀수> 그리고 <휴민트>까지 류승완 감독과 세 편을 함께한 배우로서, 가까이서 본 류승완 감독 액션의 특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류승완 감독님은 액션을 위한 액션을 찍는 연출자가 아니다. 류 감독님의 액션은 모든 게 캐릭터 안에서 움직이고, 하나의 액션신을 지나면 캐릭터가 점점 구축된다. 원래 나는 액션에 뜻이 없었다. 이야기가 재밌어서 작품을 하게 됐는데 그 안에 액션이 있으면 연기할 수밖에 없으니 하는 것뿐이다. 류 감독님이 워낙 이야기꾼이다. 머릿속에 영화 생각뿐이다. 늘 영화 얘기만 하고. “조 배우 재밌을 것 같지 않아?”라고 하신다.
- 류 감독님이 평소 “조 배우”라고 부르나. 맡은 캐릭터 조 과장처럼 들린다.
항상 “조 배우, 지금도 좋은데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하신다. “야, 조인성”이라고 말씀하신 적 없다. 오랫동안 알아왔는데 단 한번도.
- 앞서 액션에 뜻이 없다고 했지만, 무릎 수술을 한 뒤에도 계속 액션 연기를 하고 있다.
너무 힘들어서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그래도 요즘 시스템이 잘돼 있어서 현장에 피지컬 트레이너가 있다. 야구계처럼 피지컬 트레이너가 위험하지 않게 몸을 체크하고 근육을 풀어주고 몸 상태를 감독님에게 보고한다. 참고로 류 감독님이 한국영화 현장에 처음으로 피지컬 트레이너를 둔 인물이다. 그래서 나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액션에 대해 큰 의의를 두는 배우는 아니다. 액션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멜로연기를 옛날에 많이 해서 한계도 느끼고 다른 장르로 전환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내가 드라마에 출연하던 때는 OTT가 없던 TV 시대였고, 멜로를 뺀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에선 블랙코미디나 정치 등 드라마가 못 건드리는 지점을 건드릴 수 있어 다양하게 체험해보고 싶어서 영화를 고집했다. 그러다 액션도 하게 됐다.
- 후반 액션 시퀀스에서 배우의 힘겨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지막 액션 시퀀스가 길고 라트비아에서 촬영하다보니, 액션 연기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과연 끝이 나서 우린 서울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깔딱고개를 넘는다는 말이 있듯이, 가장 힘들 때였다. 완성된 영화를 볼 때도 그 힘듦이 담겨 있어 묘했다.
- 조인성 배우론을 쓴다면, 구체적으로 40대의 조인성 배우를 설명하는 대목을 쓸 때 류승완 감독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류승완 감독이 조인성 배우만의 아우라를 만들어준 듯하다. 본성은 선한데 강한.
맞다. 내게 어른스러움을 만들어주셨다. 류 감독님이 얼마 전에 그 얘기를 하셨다. “처음부터 조 배우가 참 편하고 좋았다”라고. 아마도 감독과 배우의 케미가 아닐까. 그게 안 맞으면 아무리 유명한 감독과 유명한 배우라도 두번 이상은 못한다. 내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류 감독님이 참 잘 지켜봐주셨다. 최근에 내게 “화면 안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다. 그거 쉽지 않은데”라고 말씀해주신 게 기억난다. “화면 안에서 가만히 카메라를 장악하는 게 보여서 성숙한 조인성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라고 하셨다.
- 최근 작고한 안성기 배우에 대해 많은 영화감독이 비슷하게 얘기했다.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가 좋은 배우라고.
나 역시 그렇게 되길 원했고, 그런 지점까지 가길 원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릴 때는 더더욱 안된다. 하고 싶지만 불안해서 가만히 있는 걸 못해서 그렇다. 근데 류 감독님이 나를 지켜봐주셨고 나도 감독님을 통해서 나의 그런 모습들을 보았다.
- 두 사람의 첫 시작점인 <모가디슈> 개봉 당시 마흔 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과의 작업과 맞물리면서, 2020년대 들어 이창동, 나홍진 등 한국영화계의 대표 감독들과 협업했다. 이창동, 류승완, 나홍진 세 연출자 모두 색깔이 다 달라 배우들이 지금 제일 부러워하는 배우가 조인성 배우가 아닐까. 배우에겐 세 감독이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줄 수 있나.
공통점이 있다. 집요한 건 똑같다. 정말 피가 마르게 집요하다. 세분 다 고유의 집요함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 아닌가. 타협하는 순간 성은 무너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분들은 타협을 안 한다. 정말 집요해서 배우 입장에선 오히려 편한 면도 있다. 이게 맞는 건가 고민을 안 해도 된다는 의미다. 집요한 감독님이 원하는 장면을 위해 연기하고 ‘오케이’를 받는다면, 그건 정말 ‘오케이’다. 세분의 다른 점을 이야기하자면, 류승완 감독님은 날카롭게 신과 현장을 이끌어가신다. 나홍진 감독님은 강력한 에너지로 현장을 끌어가시고, 이창동 감독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현장을 딱 지키고 계신다. 그런 모습이 다를 뿐이지 내 입장에선 똑같다. 그런 좋은 감독님들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나한테 이런 기회가 또 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고, 연달아 그 작품들이 개봉한다니 그것도 참 행운이다. 한편으론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 올해 거의 모든 계절에 조인성 배우의 신작 영화를 보게 될 텐데, 많은 작품을 공개하는 올해가 어떠하길 소망하나.
많은 분들이 시간 날 때 극장에서 영화 한편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세 작품이 개봉할 예정이니 내가 너무 자주 나온다고 지루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