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튜디오에 들어올 때부터 두분의 친분이 느껴졌다. 오래된 사이인가.
문봉섭 형, 동생으로 지낸 지 한참 됐다. 내가 김민기 대표님의 ‘화인웍스’에서 영화 기획 프로듀서를 할 때 처음 만났다. 결혼식 자리에서 김 대표님이 주방옥 대표님을 소개해주셨고, 이후 사석에서 “형님, 저 미국 가는데 용돈 좀 보태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금세 편해졌다.
주방옥 당시 내가 차태현, 송중기 배우가 소속된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었던 터라 화인웍스와도 가까워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문 작가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긴 세월 미국을 오갈 때마다 그 과정을 꾸준히 들려줬다.
문봉섭 남들과 달리 형님은 한번도 내게 쓸데없는 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서였다. 영화계에서 내 꿈을 유일하게 믿어준 분이었고, 시나리오를 쓰면 가장 먼저 보여드릴 만큼 신뢰하게 됐다.
주방옥 읽으면서 “내 아까운 시간을 쓰게 하다니” 하며 혼낸 적도 많다. (웃음) 글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해도 도전은 늘 지지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고 문 작가는 늘 열심이었으니까. 그렇게 쭉 지내다가 코로나19 시기에 문 작가가 보낸 시나리오에 반해 “이건 나랑 하자”고 계약까지 했는데, 그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넉달 정도 대기 상태가 생겼다.
문봉섭 놀면 뭐 하나. 형님께 예전에 개발하던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보시겠냐고 드렸다. 그게 <프로텍터>였다.
- <프로텍터>는 애초부터 할리우드를 염두에 둔 프로젝트였나.
문봉섭 할리우드 근처라고 해야 할까. 원래 시나리오는 특수요원인 남자가 강릉에서 아내를 찾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시나리오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서 10억원 규모의 저예산 할리우드영화로 기획해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배경을 태국으로 바꾼 뒤 스티븐 연을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미국 에이전시에 시나리오를 보냈다. 뜻밖에도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꿔 달라는 답변이 와서 엄마가 딸을 찾는 이야기로 수정했다. 한번은 또 이탈리아로 배경을 바꿔 달라는 거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며 속성으로 공부해 다시 썼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할리우드 여성배우 세명이 참여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인공을 고를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 최종 선택은 밀라 요보비치였다. 그가 시나리오를 어떻게 봤다고 하던가.
주방옥 첫 미팅 때 밀라가 문 작가를 안으면서 “당신은 천재야!”라고 하더라. 시나리오를 정말 좋아했다.
문봉섭 한국 시나리오는 정말 아름답다는 말도 했다. 밀라가 처음 본 버전에서는 오프닝이 “별이 죽었다는 걸 해로부터 들었다”는 구절과 함께 해변에서 시작하는데, 시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 이후 등장인물과 서브플롯을 줄이며 원안을 단순화하는 과정을 배우와 함께 거쳤다.
주방옥 문 작가가 신 바이 신으로 고치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건 할리우드는 작가를 깊이 존중하고 작가의 영향력도 크다는 점이었다.
문봉섭 확실히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있었다. 시나리오의 모든 문장이 작가의 것이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할까. 수정을 원하는 부분이 있어도 먼저 고치지 않고, 작가가 써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 문장씩 상호 동의하에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장르영화로 체급이 커지면서 주인공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원안의 결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
- 추격 액션영화이나 실은 상처 입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리극에 가깝다. 내레이션이 많아 더 그렇게 느껴지는데, 액션영화의 쾌감을 기대하는 관객도 있으니 결정이 쉽지 않았겠다.
문봉섭 처음부터 초점은 트라우마를 지닌 한 인간의 심연이었다. 니키(밀라 요보비치)의 고독한 독백이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기존 액션영화와는 다른 속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봤다. 한 여자의 고백으로 시작해 고백으로 끝나는 수미상관 구조를 원하기도 했다. 사실 내레이션이 많긴 한데, 그건 나도 밀라도 워낙 말이 많아서다. (웃음) 그래도 친한 작가 동생이 영화를 보고 ‘내레이션도 미장센이 됐다’고 메시지를 보내줘서 안심했다. 에이드리언 그런버그 감독의 연출이 큰 몫을 했다.
- 니키는 인신매매단과 맞서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과 싸운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주방옥 결말의 반전을 포함해 주인공의 입체적인 면모가 미국 제작진에 큰 점수를 받은 것 같다. 기존 할리우드 액션영화와는 결이 다르니까.
문봉섭 <테이큰>처럼 부모가 자식을 구하면서 끝나는 게 보통의 할리우드식인데 우리의 방향은 안전한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3월6일 북미 개봉 이후, 기대를 배반하는 영화라는 입소문이 돌면서 점차 반응이 올라오고 있다. 초반에 나온 비평가 점수는 낮았는데 실관람객 평가는 또 높고, 온라인에서 찬반이 오가며 개봉 초부터 관심을 끌고 있다.
주방옥 그렇게 화제가 되고 극장에 걸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홍보가 된다. 충분한 P&A 비용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감사한 일이다. 무엇보다 극장 개봉 이력이 중요한데 나중에 VOD로 넘어갔을 때 “저 영화 극장에서 보려 했었는데”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소비자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문봉섭 첫날 1007개 관에서 개봉해 첫주 박스오피스 13위를 기록했다. 20위권 안에서 우리만 소규모였다. 영화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연락을 많이 받았고, 한국인이 또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
문봉섭 총제작비 250억원 중 약 45억원을 투자받고 나머지는 아메리칸필름마켓 등에서 프리세일즈와 인센티브제도를 활용했다. 손익분기점은 약 50억원 수준으로 비교적 낮은 편이다.
주방옥 인센티브제도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 호주,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운영 중이다. <프로텍터>는 전부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뉴멕시코에서 약 40%를 지원받았다. 200억원이 넘는 비용 중 80억가량을 환급받은 셈이다. 물론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심사를 통과해야 하고, 그 핵심은 결국 시나리오다. 문 작가가 글 실력뿐 아니라 15년간 미국을 오가며 현지 제작 시스템을 체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문봉섭 겉으로 보기엔 운 좋게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획, 캐스팅, 제작, 투자, 배급 등 A부터 Z까지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해왔고, 기회가 왔을 때 그 순서를 하나씩 밟아나가니까 꿈이 현실이 됐다.
- <프로텍터> 크레딧에서 한국인 이름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 인력의 비중은 어느 정도였나.
문봉섭 키 스태프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기획했고, 한국 제작사가 만들었으며, 수익 역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영화의 외형은 할리우드영화지만 뼛속까지 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방옥 앞으로도 문 작가와 이런 방식의 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도 같은 구조를 따른다. 국내 개봉을 거쳐 해외로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북미 개봉을 출발점으로 글로벌로 확장하는 전략이다.
문봉섭 지금 쓰고 있는 스릴러영화 <13>도 역시 한국이 메인 제작을 맡는다. 미국에서는 5~10%만 촬영하고 나머지는 미국 배우들이 한국에서 촬영하는 할리우드영화다. 그외에도 조지 로메로 감독이 남긴 좀비영화 <트와일라잇 오브 더 데드>, 로맨틱코미디 <그와 섹스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클로버필드 10번지>의 메인 작가와 함께하는 공포영화 등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주방옥 미국 시장도 프랜차이즈 중심으로 재편된 지 오래라 새로운 이야기와 창작자에 대한 갈증이 크다. 작은 아이디어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문 작가에게 숨겨둔 작품이 더 없냐고 재촉할 정도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좋은 한국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문봉섭 작가뿐 아니라 프로듀서, 배우, 감독 등 재능 있는 영화인이라면 누구든 환영이다. 함께 미국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시도가 이어진다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활로이자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다. 혹시 우리와 뜻은 같으나 영어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영어를 못해도 할 수 있다. 내가 그 증인이다. (웃음) 그들이 내가 필요하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한글로 메일을 보내더라.
- <프로텍터>의 사례가 막막한 국내 창작자들에게 활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최초의 경험을 한 입장에서 앞으로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있나.
문봉섭 인터뷰를 오면서 공약 아닌 공약을 생각해왔다. 과거에 한석규 배우가 주최하고 <씨네21>이 후원한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이 있지 않았나. <프로텍터>가 잘되면 <씨네21>과 그와 같은 공모전을 열고 싶다. 묵묵히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한국 창작자를 세계에 알리는 등용문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주방옥 그렇게 되면 한국의 소규모 제작사가 자력으로 할리우드영화를 만든 사례도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이다.
문봉섭 상금은 처음엔 1억원으로 시작해서 5억원까지 늘리고 싶다. 우리만 잘돼서 뭐하나. 성공할수록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주방옥 그러려면 문 작가도 나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