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과 셔터 소리로 세계와 접촉했던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에서 양조위의 침묵은 시대의 실어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왕가위의 <화양연화>에선 금지된 사랑의 열기를 앙코르와트의 나무 구멍 속에 속삭여야 할 만큼 비밀의 팽팽한 압력이 배우를 휘감았다. <침묵의 친구>의 신경과학자 토니 웡은 이전과는 다른 적막 속에 놓인 처지다. 봉쇄된 캠퍼스에 혼자 남은 그는 과학자의 관찰과 명상가의 몰입이 만나는 교차 지점에 서 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양조위가 경험한 것 역시 순수한 주의력으로 활짝 열린 시간이었다. 신경과학과 식물학을 탐독하면서 “현재에 충실하는 기쁨”을 실천하기 시작한 배우에게 일디코 에네디 감독이 “그저 당신으로 존재하라”는 연기 지시로 답한 우연 역시 두 사람의 운명적 조화를 귀띔한다. 에네디 감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 화면의 공기를 자신의 호흡으로 물들이는 그의 능력을 진즉 알아본 것일 테다. 어느덧 예순을 넘긴 양조위의 얼굴은 <침묵의 친구>에서 그렇게 자연스러운 세월의 나이테를 드러낸다. 정확히 말해 우리가 보는 것은 세월이 깎아낸 것이 아니라 세월이 남기고 간 것, 양조위가 도달한 차분한 경지다.
- <침묵의 친구>만을 위해 반년 이상 준비했다고. 신경과학과 식물학을 탐구하는 시간은 어땠나. 비교하자면 <일대종사>를 위해 영춘권을 수년간 수련하며 팔이 부러지기도 했던 육체적 수련의 과정과는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었을 것 같다.
준비하는 데 6개월 정도 시간을 들였다. 영화를 작업할 때마다 늘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하는 법이라 이런 과정엔 익숙하다. <침묵의 친구>에선 신경과학자 역할인 만큼 인지과학, 식물학, 철학 분야의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려 했다. 감독님에게 받은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대학병원에서 뇌 인지 테스트를 참관하거나 신경과학 분야의 교수들을 찾아가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질적인 지식의 습득 외에 언어적인 준비에도 공들였다. 토니는 영국에서 유학한 설정이라 선생님과 함께 영국식 억양을 잘 살리도록 애썼다.
- 이번 작품을 포함해 일디코 에네디의 영화가 품고 있는 연결과 순환의 테마에는 일견 동양철학적인 지점이 있다. 감독과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눴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현실은 곧 환상이다’이라는 말이 함께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보고 감독님에게 불교철학의 영향을 질문해보긴 했다. 에네디 감독님은 명확하게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촬영을 하는 중에도 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요소가 작품 곳곳에 있음을 느꼈다.
- <침묵의 친구>의 토니는 절제되고 표현이 크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억눌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수도자의 아우라가 있다. 승려처럼 보이는 짧게 깎은 헤어스타일도 이런 인상에 힘을 싣는다.
에네디 감독의 요청으로 구도자적 분위기가 나는 인물이었으면 했다. 머리 역시 그의 바람이었는데, 주저 없이 잘랐다.
- 영화에서 토니는 은행나무의 전기화학적 신호를 측정하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소통 가능성을 탐색한다. 촬영 중 실제로 나무 앞에 서서 비인간 존재를 상대 배역으로 마주할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침묵의 친구>에서 나무를 상대로 연기하는 동안 나의 무지를 자각하고 겸허해졌다.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눈빛이나 보디랭귀지를 쓰면서 대화하지 않지만 나무는 분명 나무만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홍콩에서 나는 주로 아침마다 러닝을 하는데 주위에 언제나 다양한 식물들이 있다. 언젠가부터는 러닝을 하면서 ‘아,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라고 느낀다.
- 오랜 러너로 알려져 있는데, 요즘도 여전한가.
기본적으로 매일 뛰고 있다. 아침에 최대한 식물이 많은 곳에서 기분 좋게 뛰고 하루를 시작하길 즐긴다.
- 토니는 코로나19 봉쇄 중 텅 빈 캠퍼스에 홀로 남겨진다. 고독이 그를 파괴하기보다 새로운 과학적 지평으로 이끈다는 점이 <침묵의 친구>의 아름다운 역설이다. 당신의 실제 코로나19 팬데믹 경험은 어떤가.
처음엔 호주에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을 촬영하고 있었다. 도시가 봉쇄되면서 촬영이 중단되었는데, 때마침 일본으로 휴가를 신청해둔 시점이었다. 일본 출입이 아직은 자유롭던 시기라 무사히 일본으로 넘어갔고 뜻밖에도 그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질병으로 인한 팬데믹은 모두에게 대단히 힘든 시절이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강제로 단절된 시간들 속에서 저마다 잊고 있던 감각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 당시 교토의 인적 드문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수년 만에 생경한 자유를 느꼈다.
- 혼자 고독하게 있는 시간이- 이 영화 속 캐릭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충만함을 주나.
가족과 친구와 오래 떨어져 지내면 힘들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아끼고 때로는 일부러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 의식적으로 나를 마주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려는 편이다.
- 일상에서 자기를 비우는 작업을 하는 건 카메라 앞에서 강렬한 감정을 담기 위해서인가.
그런 셈이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짧은 1분 동안에도 100가지 일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굴러간다. 나는 요리하면서 오직 눈앞의 채소와 고기에만 집중하려 노력한다. 정확히 말하면 비운다기보다 지금이라는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고, 그러한 집중력은 카메라 앞에서 요구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 일찍이 할리우드의 여러 제안이 있었을 텐데 50대 후반에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할리우드에 데뷔했고, <침묵의 친구>로 60대에 유럽 예술영화에 첫발을 디뎠다. 그저 자연스럽게 인연이 이끈 결과일까. 앞으로의 꾸준한 국제적 행보도 기대해볼 수 있을지.
한번도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다고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 국적의 경계를 따지기보다 대본이 내게 찾아오는 인연을 따른다. 일어날 일이면 어쨌든 일어난다. 느낌이 맞는다면 작품을 수락하고, 이후엔 그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한국에서는 지난 연말에 <화양연화>가, 올해 2월에 <해상화>가 재개봉해서 두 영화 모두 동시대 관객들과 극장에서 만났다. 지금 당신에게 왕가위와 허우 샤오시엔은 인생에 어떤 의미를 지닌 감독인가.
두 사람은 내 배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다. 왕가위 감독은 말하자면 양조위만의 연기 스타일을 만들수 있게 이끌어준 은사이다. 20년 이상 함께 작업하면서 그의 시선을 통과해 배우로서 나만의 것을 계발해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며 친밀해졌고, 기본적으로 사고 방식이 굉장히 비슷한 편인 것 같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내가 진지하게 문학을 탐독하도록 이끌었다. 문학의 표현력과 깊이를 알아가면서 배우로서 대본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내게 대만 문학을 숱하게 소개해주었다.
-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일디코 에네디 감독과 함께 탐독했던 책 중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줄 것이 있을까.
제임스 브라이들의 『Ways of Being』. 이 책은 인간뿐만 아니라 AI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이 지구에서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데 어떻게 이 지구를 같이 사용할 수 있는지, 공유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이야기여서 아마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고학부터 식물학까지 굉장히 방대한 범주를 아우르면서 생물마다의 내면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들여다본다. 내게 여전히 어렵고 그래서 흥미로운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