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영화 바깥의 현실, 영화 내부의 허구, 카우테르 벤 하니아의 <힌드의 목소리> 리뷰

전 세계 711만여명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사망했다. 5500명 이상의 민간인이 2026년 이란 시위와 미국-이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민간인 7만5천여명의 삶을 앗아갔다. 건조한 통계로 맞이하는 죽음.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일수록 타인의 고통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비극 앞에서 예술은 어떻게 목소리를 드높일까. 죽은 자와 산 자, 혹은 살리려는 자와 살아남은 자 중에서 누구를 위무하려 들까. 끊이지 않는 전쟁 속에 전 인류가 최전선에 서 있는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재현한 영화 <힌드의 목소리>는 가자 지구의 한 소녀를 살리려 한다.

비극에 응답하는 영화

<힌드의 목소리>

2024년 1월29일.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의 적신월사로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일가족이 탄 자동차가 가자 지구에서 피격을 받았고,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제보였다. 콜센터 직원 오마르(모타즈 말히스)는 즉시 전화를 걸고, 라얀이라는 이름의 청소년이 응답하지만 이내 총격으로 통신이 두절된다. 다시 연결된 전화. 이제 적신월사와 유일하게 연락이 닿는 존재는 폭격과 총성 속에 홀로 생존한 6살 소녀 ‘힌드 라잡’이다.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는 83km 떨어져 있어 누구도 당장 힌드를 구하러 갈 수 없다. 비빌 언덕은 가자 지구에 유일하게 남은 적신월사 구조대다. 이들은 힌드가 갇힌 차량까지 8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대기 중이다. 하지만 코디네이터 마흐디(아메르 레헬)는 구조대가 즉시 출동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구조대가 사고 현장에 진입하기까지 수많은 ‘조정’ 절차가 필요하고, 이 조정엔 이스라엘 국방부의 허가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8분이면 가능했을 힌드의 구조는 5시간이 넘도록 진척이 없다. 사무실에 갇힌 오마르와 라나(사자 킬라니), 심리상담사 니스린(클라라 쿠리)은 오직 힌드와의 통화에 희망을 건다.

5시간 후, 구급대원 유세프 제이노와 아흐메드 알마드훈이 출동한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힌드를 구하러온 앰뷸런스, 그리고 힌드가 생존해 버티던 자동차마저 공격한다. 12일 후,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뒤에야 힌드와 두 구급대원의 주검을 거둘 수 있었다. 적신월사가 힌드의 음성을 세상에 공개하자 전 세계가 분노했다. 그해 4월 미국 140개 대학교에서는 학생 주도의 가자 지구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5월엔 캘리포니아대학교 노동자들이 연대 파업을 벌였다. 컬럼비아대학교 학생들이 캠퍼스 내 건물을 점거해 ‘힌드 홀’로 명명하자 다른 지역의 학생들 역시 대학 내에 힌드의 이름을 붙여 추모를 이어갔다. 래퍼 매클모어는 힌드의 죽음과 이어진 시위에 영감을 받은 음악 <Hind’s Hall>을 발매했고, 수익금을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에 기부했다. 영화계 또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비극에 응답했다. 카타르 방송국 <알자지라>가 사건 직후 디지털 단편다큐멘터리 <6살 힌드 라잡의 살해>를 방영했고, 시리아계 네덜란드 감독 아미르 자자는 2025년 6월 <눈을 감으렴, 힌드>를 네덜란드영화제에서 공개해 최우수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영상 창작자와 저널리스트가 이 비극을 어떻게든 세상에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바삐 움직인 것이다. 이후 힌드 라잡의 사망을 다룬 첫 장편영화가 2025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공개됐다. 브래드 피트, 알폰소 쿠아론, 조너선 글레이저, 호아킨 피닉스루니 마라 등이 총괄 프로듀서로 합류했고 공개 직후 스파이크 리, 마이클 무어 등 기울어진 세계를 향해 일침을 멈추지 않는 감독들이 프리미어 상영을 마친 영화에 신진 프로듀서로 합류했다. 작품은 첫 상영에서 영화제 역사상 최장 기록인 23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으며 그해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을 수상했다. 바로 카우테르 벤 하니아의 <힌드의 목소리>다.

관객을 각성하는 현실

<힌드의 목소리>

<힌드의 목소리>는 의미 못지않게 작품의 형식으로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냈다. 영화는 전문 배우를 기용해 일촉즉발의 적신월사 내부를 재연하도록 했지만, 힌드의 목소리만큼은 적신월사로부터 수급한 실제 음성을 활용했다. 배우가 실제 통화 오디오와 상호작용하며 2024년 1월29일 그날을 재연한 이 작품은 급기야 연기자의 음성과 실제 적신월사 직원의 음성을 장면전환의 표지 없이 포개고, 적신월사 직원들의 아카이브 영상을 배우들의 연기와 병치한다. 이미 오프닝에서 스스로를 실화 각색물(Dramatisation)이라고 정의한 <힌드의 목소리>는, 내화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픽션인 동시에 다큐멘터리가 되는 하이브리드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카우테르 벤 하니아의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이 연출이 아주 낯설진 않을 것이다. 가장 유사한 근작은 튀니지 여성 올파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올파의 딸들>이다. 올파의 네딸 중 장녀와 차녀는 가족과의 연을 끊고 이슬람 극단주의(ISIS)에 가담했다. 하니아와 올파, 두 여성은 이 비극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세명의 여성배우와 한명의 남성배우를 카메라 앞에 세운다. 이들은 올파와 남은 두딸 앞에서 각각 사라진 두딸, 올파 자신, 가모장 올파의 인생을 거친 수많은 남자들을 재연한다. 하니아는 이전에도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혼용한 적 있다. 장편 데뷔작 <튀니지의 샬라>는 극영화에 인터뷰 푸티지를 삽입한 모큐멘터리였고, <미녀와 개자식들>또한 다큐멘터리식 촬영과 편집으로 완성한 극영화다. 두 작품은 북아프리카에 만연한 여성혐오 범죄를 검열 없이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현실과 극이 작품 안에서 경계 없이 뒤섞이고, 영화 바깥의 현실과 영화 내부의 허구가 서로의 꼬리를 물며 관객의 주의를 환기한다. 하니아의 특기인 이 중첩의 방법론은 종종 구설에 오른다. 유가족과 실존 인물이 현재 호소하고 있는 비극을 시간적 거리두기 없이 곧바로 영화에 차용하고, 현재진행 중인 고통을 극적 카타르시스나 내러티브의 최대 충격요법을 위해 착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윤리적 지적이 뒤따른다. 참작할 만한 비판이지만 하니아의 스토리텔링은 ‘실패한 역사’를 다루므로 적절하다. 올파와 그의 두딸은 규범(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위해 더 극단적인 규범에 복종해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억압했다. 적신월사의 직원들은 끝내 힌드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현실에 잔존해 있다. 현실 자체를 스크린으로 끌어들이며 참극의 방지 대책을 관객과 자성하는 길이 고통을 포장하는 것보다 도덕적이고, 대체역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또한 이 방법은 비극을 유발하는 제도의 작동 원리를 응시한다는 점에서도 긴요하다. 왜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형태를 바꿔 재생산되고, 왜 대학살을 겪은 민족이 집단학살의 가해자가 되는가. 영화는 러닝타임 동안 안전한 극장 안에서 작품에 몰입하고 있는 관객을 뼈아픈 현실로 돌려세운다. 참극의 메커니즘이 스크린 밖에서 지금도 인류를 괴롭히고 있으며, 관객이 누리는 잠깐의 평화 중에도 비극은 현재진행 중이라는 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사진제공 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