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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솔직하게, 내밀하게, 친근하게 - 여성감독네트워크(WDN)

‘여성감독’의 레퍼런스를 찾아서

감독 권익 보호에 힘쓰는 한국영화감독조합, 영화계 내 다양한 직군을 포괄하는 여성영화인모임과는 구별되는 여성감독네트워크의 발단에는 한명의 감독과 그에게 바통을 건네받은 다섯 감독이 있었다.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 자체가 불안정한 여성감독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집단”을 세우는 게 목적이었다. 그 시작을 기억하는 박소현 감독이 말문을 뗐다.

“2010년대 초에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여성감독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봤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2023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이숙경 감독님이 여성감독들이 연결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다.”

그 뜻에 공감한 초동 멤버가 강유가람, 박소현, 유은정, 유혜민, 허지예 감독. 그들은 2023년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 중 네트워크 결성에 관한 수요 조사를 펼쳐 70명가량의 가입 의사를 확인했다. “섬처럼 작업하고 있는” 2030세대의 관심이 특히 높았다. 호응을 바탕으로 네트워크 출범을 준비하던 중 부지영 감독도 운영진으로 합류했다. “3년 넘게 드라마 대본을 쓰고 있었다. 골방에서 나와 동료들을 보고 싶었다.” 그해 11월29일, ‘버텨내고 시작하기’라는 제목 아래 열린 여성감독네트워크의 첫 오프라인 모임에서 부지영 감독은 자신과 비슷하게 고독했던 이들과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텔레마케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책임져본 적이 있는 박소현 감독이 실력을 발휘한 덕분에 60명 넘는 참석자가 들었다. 10년 넘게 영화를 해온 감독, 이제 막 첫 장편을 찍은 감독, 단편 하나를 완성한 감독 등 폭넓은 스펙트럼의 참석자들이 각자의 작업을 소개하고, 영화 퀴즈를 풀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쑥스러워하던 표정이 밝게 물들어가자 “그동안 응원, 지지, 연대의 장을 많이들 기다려왔구나” 하고 깨달았다는 부지영 감독에게 유혜민 감독이 덧붙였다.

“당시 막 서른이 된 시점이었다. 30대, 40대에는 어떤 길을 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이미 성공한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여성감독의 레퍼런스를 보고 싶었다. 그들이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책이나 매체 밖에서 마주하고 싶었다. 이 욕망을 해결할 안전한 장소로서 여성영화네트워크를 꿈꿨는데, 첫 자리에서부터 그 감각을 느꼈다. 이 네트워크가 다음에는 무얼 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가입 조건부터 명시했다. 회원들이 직접 제작한 홈페이지(https://www.wdn.kr/)에 이렇게 적었다. “단편, 장편, 장르 불문 한편 이상의 영화를 연출한 여성감독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성감독은 생물학적 여성에 한하지 않습니다.” 유혜민 감독에 따르면, 많은 이들에게 단편 하나 연출했어도 함께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본연의 취지를 다하고자 “경력으로나, 젠더로나 허들을 최대한 낮추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신뢰에 기반한 소통을 위해 약속문도 정리했다.

솔직하게, 내밀하게, 친근하게

네트워킹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2024년부터는 특강, 상영회, 워크숍을 열었고, 뉴스레터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부지영 감독은 ‘여성감독 작업노트’라는 이름으로 주기적인 케이스 스터디를 주최했다. <지옥만세>임오정 감독, <오마주>신수원 감독 등 벌써 10명이 넘는 여성 창작자가 자신의 노트를 펼치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중요한 전제는 잘된 얘기가 아닌 잘 안된 얘기까지 들려주는 것이었다.” 이에 더해 연출 너머의 특기를 나누는 원데이 워크숍도 꾸렸다. 제작부 경험이 있는 감독이 그 업무의 프로세스를 알려주고, 현직 간호사가 의학물을 쓰는 감독들에게 팁을 전하는 식이었다.

한편 2025년부터 상영회팀 팀장을 맡고 있는 이채민 감독은 지난해 인디스페이스에서 WDN영화제 ‘비연대기적 여성의 움직임’을 개최한 데 이어 부산국제영화제의 커뮤니티 비프(BIFF)에서도 흐름을 이어갔다. 올해는 여성의 날을 맞아 3월 한달간 정동진의 영화관 서점 이스트 씨네에서 네트워크 소속 감독들의 작품을 트는 기획전을 실시했다. 그들의 개봉작을 홍보하는 것도 네트워크의 역할. 회원관리팀장인 한세하 감독은 “꼭 개봉 첫주에 응원 번개를 하려고 한다”며 올해도 조현진 감독의 <매드 댄스 오피스>개봉 첫날 회원들과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김효은 감독의 <새벽의 Tango>, 서은선 감독의 <훈련사>, 염문경 감독의 <지구 최후의 여자>, 이성민 감독의 <콘크리트 녹색섬>등 다가올 개봉작도 여성감독네트워크의 벼락같은 환대를 기다리고 있다. 한세하 감독은 응원 번개, 주민 파티, 그리고 총회까지 서울 외 지역에 있는 회원들도 활발하게 모일 방안을 계속 구상 중이라고도 밝혔다.

여성감독네트워크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은 소모임. 200명 넘는 인원이 매번 한곳에 모이기는 어렵다. 작지만 밀도 높은 관계가 여럿 쌓이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게 박소현 감독의 생각이었다. 사주부터 타로까지 온갖 샤머니즘을 탐구하는 ‘러브미신’, 각자의 위치에서 수영 후 인증하는 ‘음-파, 음-파’를 포함해 각종 채소 패스토를 요리해 나누는 모임, 장편 시나리오 집필을 독려하는 모임, 영어나 연기를 공부하는 모임 등 종류도 다양하다. 러브미신, 음-파, 음-파의 멤버인 박소현 감독에게는 반려묘를 떠나보냈을 때 소모임 식구들에게 조의금을 받거나 돌봄을 나눴던 기억도 남아 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고립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힘이 되었다. 그 말이 여성감독네트워크에서 받은 선물 같았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장면들

이처럼 여성감독네트워크에서 쌓은 추억은 운영진에게도 동력이 된다. 한세하 감독은 첫 모임에서부터 울컥했다. 자신의 미숙함을 인지한 채로 찍은 첫 단편을, 맞은편에 앉은 감독이 잘 봤다는 감상을 전했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을 누군가 기억하고 멀리서 지켜봐 줬다니 울컥했다. 동시에 큰 뿌듯함과 용기를 얻었다.” 유혜민 감독도 동의했다. “긴 인생을 함께 걸어갈 사람이 늘어나 단단해진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부지영 감독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통화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유혜민 감독은 동네 친구이기도 한 부지영 감독에게 지인이 농사 지은 감자를 선물해 감동을 안겼다는 후문. “그 무거운 걸 들고 작업실까지 찾아오다니, 너무나 신선한 응원을 받았다. 어쩌면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의 질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채민 감독은 그런 부지영 감독의 등을 보고 기댈 곳을 찾았다고 한다.

“2024년 12월3일 계엄 이후, 여성감독네트워크도 집회에 나가기 위해 처음으로 깃발을 만들었다. 몇몇 감독과 함께 여의도로 향하던 중 거대한 인파 속에 부지영 감독님과 나 둘만 떨어진 적이 있다. 내가 엄청난 길치라 부지영 감독님 뒷모습만 보고 쫓아가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의 깃발이 딱 보였다. ‘영화’라는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을 따라갔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 내게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때 운영진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나도 후배들에게 그런 뒷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여성감독네트워크는 올해 7월에도 자체 영화제를 진행한다. 가을에는 또 한번 커뮤니티 비프의 문을 두드릴 계획이다. 누군가는 “왜 여자감독끼리 모여야 하냐”고 의문을 표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다. “맨날 했던 말을 또 하며 끼리끼리 맴도는 모임이 아닌 나이와 경력을 초월해 건강하게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모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성감독들이 불편함 없이 어울릴 수 있는 모임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그게 여성감독네트워크였으면 한다”는 이들의 바람은 3년째 순풍을 일으키는 중이다.

여성감독네트워크 전현직 운영진 5인

부지영

<카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등 연출. 2025년까지 WDN 운영진으로서 작업노트팀을 이끌었다.

유혜민

단편 <폰의 심폐소생술>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등 연출. 2025년까지 WDN 운영진으로서 뉴스레터팀, 상영회팀 등을 거쳤으며 딥페이크TF를 꾸려 <재민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박소현

<애프터 미투> <야근 대신 뜨개질> 등 연출. 2025년까지 WDN 운영진으로서 회원관리팀, 상영회팀, 작업노트팀을 거쳤다.

이채민

단편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메이 비 메이> 등 연출. 현재 WDN 운영진으로서 회원관리팀, 상영회팀을 함께하고 있다.

한세하

단편 <내 방> <364일> 등 연출. 현재 WDN 운영진으로서 회원관리팀, 신년총회팀을 함께하고 있다.

여성감독네트워크 제작 단편애니메이션 <재민이>는 어떤 영화?

여성감독네트워크 차원에서 제작한 첫 단편 <재민이>는 2025년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다. 여성감독네트워크는 딥페이크로 인한 피해를 탐구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소속 감독을 대상으로 기획안을 공모했다. 그렇게 선정된 염문경 감독의 <재민이>는 청소년을 동물로 형상화해 딥페이크 범죄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소년 재민을 스크린에 불러들였다. 쌍둥이를 뜻하는 라틴어이자 어느 인공지능 모델 명칭이기도 한 ‘제미나이’를 변형한 이름을 가진 재민은 여우 청소년이지만, 영화가 끌어오는 건 체로키족의 두 늑대 설화다. 두 마리 늑대가 싸울 때 이기는 쪽은 ‘먹이를 주는 쪽’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동급생 토끼의 얼굴을 합성하고 낄낄거린 재민과 유튜버 도마뱀에게 극우 아이콘으로 조작당한 재민은 같은 인물이지만, 그 자신도 어느 쪽에 먹이를 줘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를 반영한 배경에는 생성형 AI가 뱉어낸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그 위에서 재민의 부모도 입장을 달리한다. 아이의 심리에 집중한 애니메이션인 만큼 ‘나도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그로부터 딥페이크 범죄를 예방하는 단초를 찾으려는 <재민이>는 지난해 텀블벅 후원자를 위한 상영회 및 포럼, 여성감독네트워크영화제 등에서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