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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에서 온 심사위원장, 전쟁의 시대에 칸으로 온 정치,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장 맡은 칸, 그리고 경쟁부문 초청받은 나홍진 감독의 <호프>

제79회 칸영화제는 두 가지 귀환으로 한국 관객을 설레게 한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제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심사위원장으로 팔레데 페스티벌의 레드카펫 계단을 올랐고,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2022년 <헤어질 결심> 이후 4년의 공백을 깨고 한국 장편영화를 경쟁부문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지난해 칸은 26년 만에 처음으로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 모두 한국 장편영화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 공백은 한국 영화산업 전반의 구조적 침체를 방증하는 단적인 지표로 읽혔기에 올해의 복귀는 더욱 상징적이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1970~80년대 한국 비무장지대 인근 외딴 항구 마을 호포를 배경으로, 멸종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신고에서 시작된 사건이 외계 존재의 영역으로 증폭되는 이야기다. 또 다른 한국영 화로는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된 연상호 감독의 <군체>, 단편경쟁인 라 시네프에 최원정 감독의 애니메이션 <새의 랩소디>, 그리고 같은 기간 운영되는 병행 섹션인 감독주간에 정주리 감독의 <도라>가 진출했다.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단은 박찬욱 감독을 필두로, <서브스턴스>로 스크린에 귀환한 할리우드의 아이콘 데미 무어, 마블과 작가 주의 사이를 횡단해온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 <브레이킹 더 웨이브>로 국제적 돌파구를 마련한 스웨덴의 고참 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 <러빙> 이후 연출까지 영역을 확장한 에티오피아-아일랜드계 배우 루스 네가, <브루탈리스트> <블랙 팬서>에서 인상을 남긴 코트디부 아르 출신 배우 이삭 드 방콜레, <플레이그라운드>(2021)로 칸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신성으로 떠올랐던 벨기에 감독 로라 완델, 데뷔작으로 남미영화제를 석권한 칠레의 디에고 세스페데스, 그리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 등에서 영화의 언어로 계급과 불평등을 고발해온 시나리오작가 폴 래버티로 구성됐다. 역대 가장 탄탄한 진용이라는 평가와 함께 파격보다는 균형 안배에 섬세히 신경 쓴구성이 돋보인다. 불과 석달 전인 2월, 빔 벤더스 감독이 제76회 베를리날레 심사위원장으로서 “감독들은 정치에서 떠나 있어야 한다”고 발언하고 트리샤 터틀 집행위원장이 이를 두둔했다가 전세계 영화계의 거센 반발을 샀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기자회견 벽두에 선수를 쳤다. “나는 내 직책을 내 의견을 위해 사용 하지 않겠다. 칸은 정치적 문제가 영화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다.” 바통을 이어받은 열변가는 켄 로치의 오랜 영화 동반자 폴 래버티였다. 지난해 에든버러 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 중 체포된 전력까지 있는 이 중견 작가는 “정치의 어원인 그리스어 ‘폴리스’는 도시, 즉 인간이 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모든 시나리오, 모든 이야기에는 권력의 가치관이 각인되어 있다”고 짚었다. 래버티는 가자 전쟁에 반대하다가 할리우드에서 사실상 배제된 수전 서랜던, 하비에르 바르뎀, 마크 러펄로를 거명했다. “여성과 어린이가 살해되는 것에 반대한 자신들의 견해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나의 연대와 존경을 이들에게 보낸다. 할리우드는 부끄러워하 라!” 기자회견장은 뜨거운 박수로 응답했다. 이는 올해 칸 공식 포스터가 <델마와 루이스> 속 지나 데이비스와 수전 서랜던으로 선택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은 지난 몇년간 영화제마다 반복되어왔으나 명쾌한 메시지로 해소되지 않고 있던 질문, 엄혹한 정치적 상황을 통과하는 시대에 예술의 연결성 및 역할을 구하는 요청에 우아한 정공법으로 임했다. “정치와 예술을 분리할 수 없고, 둘을 대립하는 개념처럼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정치적인 영화는 예술의 적이 아니며 반대로 정치적으로 경청할 만한 주장을 담고 있지 않은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배제해서도 안된다.”

올해 경쟁부문의 지형은 스타 대신 작가들의 목록이 단정하게 채우고 있다. 다소 심심한 모양새지만 그만큼 내실을 쌓겠다는 영화 제의 의지로도 읽힌다. 9년의 공백을 뚫고 돌아온 복귀작은 안드레이 즈뱌긴체프의 <미노타우로스>. 라트비아에서 촬영한 이번 신작은 한 러시아 기업인의 삶이 직업적 위기와 아내의 외도,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이 만든 세계의 혼돈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사이 즈뱌긴체프 감독은 암 투병과 동시에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하는 등 혹독한 고비를 건넜다.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의 <파더랜드>는 2018년 <콜드 워> 이후 두 번째칸 경쟁작이다. 작가 토마스 만과 그의 딸 에리카 만을 중심으로, 잿더미가 된 전후 독일을 함께 로드트립하는 흑백영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일본 밖에서 처음 촬영한 파리 배경의 <올 오브 어 서든>에서 경영난의 요양시설을 운영 하는 여성과 암 말기인 무대감독의 만남을 그린다.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프랑스어 영화 <패러렐 테일즈>에서 이자벨 위페르, 카트린 드뇌브, 뱅상 카셀, 비르지니 에필까지 드림팀 배우들을 모아 다섯 번째 경쟁 도전에 나선다. 올해 경쟁부문을 통틀어 유일하게 스페인에서 선개봉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비터 크리스마스>는 슬럼프에 빠진 영화감독이 약 20년 전을 배경으로 한 어느 광고 디렉터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메타픽션 구조의 희비극이다. <사울의 아들> 이후 11년 만에 칸 경쟁부문으로 복귀한 라슬로 네메시의 <물랭>, 루카스 돈트의 <겁쟁이>, <추락의 해부> 공동각본을 쓴아서 하라리 감독의 연출작 <언노운>도 주목 받는다.

팔레 데 페스티벌의 위상이 작가주의적 권위 위에서 지어진다면, 건물 지하층에서 영화시장을 움직이는 마르셰 뒤 필름은 전혀 다른 논리로 분주히 움직인다. 스타 캐스트, 명료한 장르성, 사전 판매 가능성이 화두다. 올해 이간극은 더없이 선명하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기대작들이 경쟁부문은 물론 비경쟁 부문에 출품하지 않았기 때문.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가 “스튜디오 영화들이 돌아오길 바란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경쟁부문에 진출한 미국 감독 들의 인디영화 두편은 아이라 잭스의 <더 맨아이 러브>, 마지막에 합류한 제임스 그레이의 <페이퍼 타이거>다.

이럴 때일수록 배급사 네온은 공격적으로 움직인다. 2019년 <기생충>부터 지난해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에 이르 기까지 6편 연속으로 황금종려상 수상작의 북미 배급을 담당한 네온은 올해 나홍진 감독의 <호프> 북미 판권을 선점하며 레이스에 뛰어들 었다. 각본 단계에서 작품을 발빠르게 선점하 고, 칸을 오스카 전략의 출발점으로 삼는 치밀한 방식에 유럽 영화사들의 행보도 덩달아 빨라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올해 칸 마켓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작가적 권위가 시장가치를 자동으로 보장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자각이다. 지난해 칸 초청작들은 아카데미 노미네이션을 받았지만 극장 성과는 전년 대비 급락했다. 바이어들은 이제 수상 이후에도 작동할 상업 논리를 찾아헤매고 있다.

한편 지난해에 이어 일본은 올해 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칸의 필름마켓(Marché du Film)이 2026년 주빈 국으로 일본을 선정한 가운데, 경쟁부문에 일본인 감독이 세명(2001년 이후 25년 만의 동시 진출) 올랐다. 죽은 가족의 빈자리에 휴머노이드 로봇이 들어서는 SF <상자 속의 양>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잃어 버린 사랑을 조각으로 빚어내는 여성 조각가를 담은 <나기 노트>의 후카다 고지, <올 오브 어 서든>의 하마구치 류스케다. 사이드 섹션과 칸 클래식에 자리한 일본영화의 두께 또한 만만치 않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후지모토 다쓰키의 동명 만화 실사판 <룩백>도 필름마켓에서 공개한다. 일본 영화산업이 쿨 재팬(Cool Japan) 정책으로 2033년 콘텐츠 수출 20조 엔을 천명한 해, 칸의 호명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경쟁부문 22편 중 여성감독은 5명으로 지난해 7명보다 줄었다. 칸의 젠더 대표성은 매년 상징적으로 평가받는다. <델마와 루이스>가 공식 포스터를 장식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칸은 진정 변화를 추구하려는가, 아니면 변화를 요구하는 이미지를 활용한 홍보인가. 확실한 사실은 작품들의 저력과 신선함이다. 오스트리아 감독 마리 크로이처는 <젠틀 몬스터>에서 레아 세두카트린 드뇌브를 처음으로 한 스크린에 세운다. 독일 감독 팔레스카 그리제바흐는 2017년 <웨스턴> 이후 9년 만의 신작 <꿈꾸는 모험>으로 돌아와,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이 불법 거래에 연루되는 이야기를 담는다. 레아 미시우스의 스릴러 <생일 파티>에는 하프시아 에르지와 모니카 벨루치가 함께 선다. 프랑스 감독 잔 에리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 주연의 <가랑스>로 경쟁 데뷔한다.

사이드 섹션은 어떨까. 주목할 만한 시선에선 미국의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 감독 제인 숀브런의 퀴어 슬래셔 <틴에이지 섹스 앤드 데스 앳 캠프 미아스마>가 문을 열었다. <도라>가 있는 감독주간에선 칸의 오랜 동반자 클레르 드니가 평생공로상 격인 황금마차상 (Carrosse d’Or)을 수상한다. 95살의 알랭 카발리에가 다큐멘터리 신작을 들고왔고 리산드로 알론소가 <유레카> 이후 다시 합류했으며, 베를린이 아닌 칸에서 신작을 공개하는 라두 주데도 눈에 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우디 해럴슨 주연의 <풀 필>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을 찾는 캉탱 뒤피외 감독은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3D 애니메이션 <르 베르티주>까지 선보이는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비평가주간은 예멘 · 요르단 합작 <기차역>, 코소보 · 스위스 합작 <두아> 등 국제 영화 지도에서 드물게 발언권을 얻는 지역의 목소리를 전면에 세웠다. 비평가주간 개막작은 베트남 감독 풍 마이 응우 옌의 애니메이션 <인 웨이브스>로, 비평가주간 65년 역사상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이 개막 작에 올랐다.

칸의 첫 이틀은 개막작부터 경쟁 첫 상영작들까지 기대치를 전혀 충족하지 못했다. 샤를린 부르주아 타케의 <여자의 일생>과 후카다 고지의 <나기 노트>는 각기 미아 한센러브의 캐릭터 연구를 이어받은 듯한 드라마, 후카다 고지가 사랑하는 로메르적 산책의 결을 오즈 야스지로적 정적에 포개어 낸 결과물로 보이지만 박찬욱 심사위원장이 천명한 “50년, 100년 후에도 살아남을 작품”의 후보로 호명 되기엔 다소 빈약하다. 레이스는 이제부터다.

올해의 황금종려상은 누구에게?

- 파격: 나홍진 <호프>

단연 주목도가 높은 작품은 <호프>다. 세계 시장을 겨냥한 규모와 나홍진 감독 특유의 장르적 강도가 결합된 이 영화는 상업성과 작가성의 경계를 시험한다.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장인 만큼 한국영화에 상이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칸의 금기는 종종 깨어진다.

- 다수의 예측: 안드레이 즈뱌긴체프의 <미노타우로스>

개인의 위기를 정치적 우화로 벼리는 그의 방법론은 영화예술과 불가분인 정치적 의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올해 심사위원들과 공명할 가능성이 크다.

- 심사위원장이라면? : 파베우 파블리코프스키의 <파더랜드>

토마스 만의 딸이자 편집자,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했던 에리카 만을 잔드라 휠러가 연기한다. 부녀의 여정에서 실질적인 주도자로 그려질 여성 캐릭터의 매혹, 기교와 절제를 동시에 구사하는 파블리코프스키가 만든 흑백영화가 박찬욱 심사위원장의 심미안을 두드릴 듯싶다.

- 복병: 루카스 돈트 <겁쟁이>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퀴어 드라마. 이번 선정작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복병이다. <걸>(2018)로 황금카메라상, <클로즈>(2022)로 경쟁부문 그랑프리를 받은 34살 벨기에 감독의 야심이 올해는 어디에 맺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