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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처음 태어난 듯 매일 새로운 듯 - 무주산골영화제 넥스트 시네아스트 손구용 감독을 만나다

- 사진을 독학하다가 영화에 입문하지 않았나. 어떻게 사진에서 영화까지 이르렀나.

누구나처럼 창작이나 예술을 향한 관심으로 시작했다. 기획전을 계기로 다시 돌이키니 어떤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었는지 생각이 났다. 처음엔 그림을 좋아하다가 사진으로 넘어갔다. 사진에 몰두하며 5, 6년 정도를 구도와 구성 그리고 색감을 프레임 안에 붙잡아 배치하는 작업에 매료됐다. 그러다가 문득 작업이 정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사진의 연장인 영화를 택했다. 남들처럼 시네필 시기를 거쳐 영화에 입문하진 않았다.

- “영상이 지닌 시간성이 사진의 영역을 확장하는 느낌이 들어 영화를 택했다”라고 밝힌 적도 있다.

요즘은 다시 사진으로 향하는 중이다.

- 회귀인가.

사진과 영화를 오갈수록 둘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사진과 영화를 하나로 묶는, 카메라가 결국 관건이었다. 내가 예술을 하는 제1의 목적이 표현이 아닌 발견이더라. 이미 있던 걸 발견하거나 잊고 지낸 걸 재발견하기에 가장 용이한 장치가 카메라다. 이 이상한 기계가 나와 물리적 실재의 외물(外物), 두 존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이미 앞뒤가 정렬해 있는 세계가 카메라를 통해 재정렬된다. 카메라를 드는 순간, 사람이 세계를 장악하는 대신 한발 물러날 수 있어 좋다. 외젠 아제라는 프랑스 사진가가 있다.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는 전제는 바꿀 수 없지만, 그의 사진을 볼 때면 외물의 세계에 인간의 개입이 거의 없어 보여 좋다. 그래서 무주산골영화제의 섹션, ‘넥스트 시네아스트’가 현재 내가 추구하는 길과 정반대라는 생각이 든다. 시네아스트라는 개념엔 작가주의가 크게 자리하는데, 지금 나는 그 작가성을 최대한 경계하며 물리는 중이다.

- 마침 이번 영화제에서 작품 상영과 동시에 진행하는 사진전의 제목도 <사진과 영화: 물러나는 카메라>다. 흑백사진은 올해부터 찍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

2014년부터 2018년까진 이상할 정도로 색감에 몰입하던 때라 컬러사진을 찍었다. 지금 왜 흑백사진을 찍느냐 하면…. 그냥 우연히 맘에 드는 카메라를 찾았다. (웃음) 2001년 캐논에서 출시된, 당시로선 하이엔드였던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를 근래 손에 넣었다. 기계식 수동 카메라처럼 스크린 없이도 촬영 가능한 기종인데 이 카메라의 흑백 질감이 좋아 계속 흑백사진을 찍고 있다.

- 단편 <산책>과 장편 <오후 풍경>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두 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두 인물이 여성인 점은 우연이다. 다만 사진을 찍는 사람이 거듭 등장하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도저히 못 찍겠다. 화면이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만 같다. 인물이 둘 이상 나와도 대화를 못하니 하는 수 없이 무얼 쓰거나, 그리거나, 읽어야 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도 화면에 존재하는 이상 최소한의 행위를 수행할 뿐이다. 다만 그 존재가 영화와 관객 사이의 매개이거나 세계의 인도자 정도일 수는 있겠다. 당연히 관객 손구용은 대화 장면을 무리 없이 감상한다. 하지만 내가 찍는 영화는 서사 없이 서정으로 향하고 싶다.

세계를 투명하게 감각하는 법

- 시카고예술대학교 석사 진학 전 자크 타티,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알게 됐다고.

이미지의 연쇄가 시공간 연속체를 엮는다는 인상을 가장 처음 알려준 게 세 감독이라서 다른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은 있다. 영화가 사진의 연속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진 않았다.

- 거의 모든 영화의 배경이 서울 종로구다. 세검정 마을(<오후 풍경><밤 산책>), 정독도서관(<산책> <공원에서>) 등 종로구의 특정 스폿이 가져다주는 감흥이 있나.

서울 내에서 그나마 시간의 겹이 축적된 곳이다. 장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팔레트 위에 역사 이상의 무언가가 묻어난다. 내가 탐험 의지가 없다. 새 풍경을 담기 위해 해외 촬영을 가거나 국내의 다양한 곳으로 떠날 생각이 없어서 익숙한 장소를 계속 찾고 그게 성정에 맞는다. 한곳이 마모될 때까지 동일한 장소를 계속 방문하는 거다.

- 손구용의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관해 묻고 싶다. 먼저 길이로서의 시간이다. 한 장소에 카메라를 고정해둔 채 오랫동안 촬영한다. 이 길이는 숏의 지속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작품별 프로덕션 기간도 포함한다.

토드 히도라는 미국 사진작가는 장노출을 몇 시간씩 하며 밤의 풍경을 포착한다고 들었다. 그처럼 사물이나 풍경 곁에 오래 머문 듯한 질감을 작업물 안에 담고 싶다. 디지털 영상 촬영은 히도의 작업에 비해서는 피사체를 쉽게 담을 수 있지 않나. 장시간 촬영에 기술적 난점이 적으니 말이다. 방법이 쉬워지면 태도도 쉬워질 수 있는데, 그래서 일부러 공정을 어렵게 꼬고 싶은 의도가 있다. 잠자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영상의 밀도가 높아진다고 스스로 믿는다. 대부분 한 장소를 10분 이상 찍는다. 그러면 육안으로 잡히지 않는 어떤 움직임을 렌즈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인간이 물러나는 느낌을 고스란히 받을 때 만족한다. 디지털카메라로 예를 들자면 빛이 닿는 이미지 센서는 카메라 중앙에 위치한다. 내겐 센서의 표면이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무(無)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무시간, 무공간의 감각이다. 대상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 때 센서에 빛이 닿고, 그 무의 공간 뒤에 내가 오랜 시간 서 있으면 어느새 대상과 나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순간이 무조건 찾아온다.

- 그렇게 오래 찍으면 행인들이 여기서 뭐하냐며 감독을 귀찮게 할 텐데.

모면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뻗쳐둔 채 카메라가 아닌 육안으로 구도를 잡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웃음)

- 다음은 시점으로서의 시간이다. 태양이 떠 있거나 달이 떠 있고, 특정 계절이 영화의 룩을 결정한다.

낮 아니면 밤, 둘 중 하나를 택하기 때문에 시간대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계절이다. 계절이 바뀌면 그 안에서 인간적 서사가 느껴진다. <공원에서>를 계절을 달리해 찍었다면 태양광의 각도를 포함해 화면에 기록된 사람들의 인상착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아무리 무표정을 요구해도 계절에 따른 인간적 삶의 변화가 얼굴에 드러날 터다. 서사를 배제하는 영화를 추구하니 계절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서사까지도 최대한 작업에서 배제한다. 물론 일상을 살 땐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걸 사랑해 마지않는다. (웃음) 그래서 여름에 카메라를 든다. 5월에 시작해 10월에 마무리하면 흑백이든 컬러든 여름의 빛깔이 고르게 유지된다. 한국은 봄, 가을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

- 손구용의 장편영화엔 시나리오가 없다. 내러티브 혹은 스토리와 같은 개념이 영상언어를 구현하는 데 있어 불필요하다고 느끼나.

계속 관념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 걱정되는데(웃음) 인간에게 익숙한 서사가 예술에 개입할수록 그 세계가 혼탁해지는 것 같다. 물리법칙에서 한 발짝 물러나면 세계를 투명하게 감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내러티브가 불필요한 이유다. 오히려 시가 그 기능을 한다. <밤 산책>에 수록한 한시도 그렇지만 <공원에서>의 내적 텍스트인 오규원 시인의 시가 그 투명한 감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사례다. 한데 매번 다르다. 지금 작업 중인 장편영화엔 시구의 인용이 아예 없다. 형식에 어울리는 텍스트를 찾아 나서는 편인데 선후를 나누자면 촬영이 먼저고 글이 나중이다.

- <밤 산책>의 경우 사운드마저 제거한 무성영화다. 그런데 무주산골영화제에선 전자음악 뮤지션 키라라가 <밤 산책>의 상영에 라이브 연주를 더한다. 감독의 의도에 반하는 기획일 수도 있는데.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이상 내 손을 떠난 것 아닌가.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다. 좋으면 하는 거지. 지난해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 전시 <디깅 사운드트랙 –엘피, 카세트, 시디로 듣는 한국영화의 음악들>에 참여했다. 그때 <밤 산책>의 단편 버전에 김수철 선생의 미발표곡 <어느 행성의 소리(가야금 솔로)>를 더해 상영한 적 있다. 아직 키라라의 음악을 듣지 못했는데 영화제에서 어떻게 울려 퍼질지 궁금하다.

- 반면 <공원에서>의 경우 앰비언스와 같은 분수 소리가 여러 숏에 일관되게 흐른다.

영화 안에는 공간이 완전히 비어 있는데 정작 정독도서관 앞은 늘 사람이 많다.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가 어떻게든 들어간다. 그래서 정독도서관과 구조와 면적, 소리의 간섭 정도가 유사한 경희궁 뒤편의 공원에서 사운드를 따로 땄다. <공원에서>는 이미지랑 붙은 사운드가 하나도 없다.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에 유관성이 적다. 편집이 오래 걸렸다.

- 편집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사운드스케이프의 레이어를 매번 다르게 변주하는 데 신경을 썼다. 이를테면 5분짜리 숏을 몇개의 시퀀스로 등분하여 영화에 무작위로 뿌려둔다. 그렇게 21개의 시퀀스를 만들고 각 시퀀스 사이에 오규원 시인의 시 <뜰의 호흡>에서 길어온 인터타이틀을 배치한다. 인터타이틀 사이를 채우는 이미지는 당연히 실제 촬영 시간과 영화 내부의 지속 시간이 다르다. 여기에 시간의 왜곡이 들어간다. 장소 한곳에 카메라 한대를 두고 오랜 시간 찍었지만, 카메라 10대를 각기 다른 위치에서 동시간에 촬영한 듯한 푸티지로 짜깁기한 것이다. 그러면 타임라인이 어긋나거나 중첩되는 부분이 생긴다. 그곳에 특정 시간대에 날 수밖에 없는 사운드를 배치해 돌출부를 지운다. 오래 찍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남경우 배우를 <산책> <서울의 겨울> <공원에서>에 기용했다. 그의 어떤 면이 당신이 그리려는 세계와 어울린다고 보나.

풍경으로서의 인물을 떠올리면 남경우만 한 배우가 없다. 그런 경우가 이종수 감독의 <인서트>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줘 놀라기도 했다. 아무 디렉션을 주지 않아도 서정과 어울린다. 뿜는 기운이 인간적이라기보다 주변의 사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나보면 고유의 성향이나 기질이 무척 독특한 친구다.

처음 태어난 듯 매일 새로운 듯

외젠 아제, <생 클루 국립공원. 오전 7시>. 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 <오후 풍경>과 <밤 삼책>엔 화면 위로 드로잉이 겹친다. <밤 산책>의 그림은 직접 그렸다고.

그땐 영화에 손의 흔적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카메라가 촬영한 이미지만 활용할 경우 작품이 차갑고 비인간화된다고 느겼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으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하에 그림을 넣었다. 나는 그림이 들어간 두편의 초기 장편을 ‘첫 마음’이라 일컫는다. 나이를 먹으면 경험이 축적되므로 무의 상태에 이르기 어렵다. 시간의 겹으로 세상을 응시하지 않고, 처음 태어난 듯 매일 새로운 듯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을 두 영화에서 제시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선 영상과 어우러지는 직관적인 선이 필요해 그림을 얹었다. 오늘 내내 이야기한 것처럼, 지금은 관점이 변했다. (웃음) 하지만 영화를 인식하는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영화는 디지털 파일이지만 내 안에선 물성이 있는 실체로 느껴진다.

- 반복과 대칭이 손구용 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원리다. 특히 <산책> <공원에서> 그리고 전시 <무관한 당신들에게>에 삽입된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두 인물을 통해 쌍대성(Duality)을 주효하게 내세우는데.

둘은 하나의 정체성이다. 하나의 정체성을 둘로 분화하면 시선, 행동 등 인간 중심의 이유가 표백된다. 하나가 둘이 됨으로써 서로를 지워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근래 편집을 막 마친 장편영화 <이야기들> 역시 남녀 배우가 한 역할을 연기한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의 장편 버전이지만 전혀 다른 영화가 될 것이다.

- 이번 기획전을 통해 손구용의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가이던스를 제공해준다면.

필요에 의한 작업이라 관객이 특정 반응을 느끼도록 유도할 순 없다. 이때 필요는 창작의 주체가 느끼는 필요겠지만 ‘나’로는 국한하고 싶지 않다. 음… 이퀼리브리엄(평형)이라는 개념이 물리학에 있지 않나. 어떠한 상태 변화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수렴하는 그 감각을 체험하면 좋겠다. 말했던 무의 시간, 아니면 서정과 동일한 맥락이다. 이러한 감각이 영화보다는 시나 음악 등에서 자주 논해지고 나 역시 시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수혈받았다. 그래도 관객이 영화가 제공하는 낯섦에 몸과 마음을 열어두길 바란다.

- 무얼 지워가며 무의 상태를 만들수록 오히려 카메라의 존재감이 극대화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할 수도 있다.

크게 우려해본 적 없다. 초반에 말한 대로 내겐 작가적 자의식이 없다. 아니. 내게도 부지불식간에 작가적 자의식이 있겠지. 그런데 이를 의식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내적인 필연성을 달성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