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계가 주목하다
<가스인간>은 한일 양국의 협업 프로젝트 사례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성공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연상호 감독과 류용재 작가가 각본을 맡고 <실종>(2022)의 가타야마 신조 감독이 연출을 맡는 방식으로 각국을 대표하는 두명의 감독이 각본가와 연출자로 만나 시너지를 일으켰다. 일본 OTT 업계에서도 주목할 정도의 캐스팅 라인업도 화제인데, 오구리 슌, 아오이 유우, 히로세 스즈 등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데다 프로덕션디자인의 제작 규모도 남다르다. <가스인간>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일본 고전 특수촬영(이하 특촬) 영화의 색채가 느껴진다. 일본영화계를 대표하는 도호 스튜디오가 보유 중인 ‘특촬 영화’ 시절의 IP를 활용해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SF 장르나 특수효과 촬영 등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일본영화계의 입장에서 1960년에 만들어진 고전영화 IP를 창고에 쌓아두기는 꽤 아까웠던 모양이다. 연상호 감독에 따르면, 이번 기획은 도호 스튜디오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도호는 2018년 즈음부터 연 감독에게 여러 방식의 협업 제안을 해왔는데 그중에는 <고질라> 시리즈 극장판 기획도 있었다. 도호가 제시한 여러 제안 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이 <가스인간>이었다. “원작 영화를 보기 전에 ‘가스인간’이라는 아이디어 기획만 보고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후 영화사에 의사를 전달하자 원작 영화를 보내왔고, 곧바로 몇장의 각색 시놉시스를 써서 보냈다. 사실 처음엔 영화로 제작하려고 시작한 기획이었다.”
<가스인간>의 리메이크 작업은 첫 접촉 이후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구체화될 수 있었는데, 그러던 중 한일 두 나라 영상 업계가 모두 OTT 시대를 맞이했다. 연 감독의 제작사인 와우 포인트와 도호가 공동제작 형태로 기획을 시작했고, 넷플릭스 시리즈화는 이후에 대본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된 후에 결정됐다. 처음엔 연 감독이 연출을 맡는 방안도 이야기가 오갔으나, 드라마로 진행이 결정되면서 가타야마 신조 감독이 연출자로 합류하게 되었다.
일본 고전 IP를 현대적으로 각색하라
연상호 감독이 <가스인간>을 8부작 드라마로 각색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시대상과 어울리는 변화였다. “원작 영화의 주인공들간에는 요즘 시대엔 찾아보기 힘든 정서적 교류가 있었다. 일종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 관계를 걷어내고 보다 현대적인 멜로를 부각시켜보려고 했다. 사랑의 감정에도 다양한 결이 있듯이 남녀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를 지키려는 한 청년의 이야기, 애틋한 남매간의 이야기도 담아내려 했다.” 살인사건을 일으킨 가스인간을 추적하는 형사와 기자 커플은 원작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그외에 호러 유튜브 채널 운영자 남매나 가스인간의 과거에 얽힌 인연 등은 연상호 감독과 류용재 작가가 새롭게 살을 붙여 창조한 캐릭터들이다.
또한 그가 원작 영화에서 독특하다고 여긴 것 중 하나가 ‘극장형 살인’이라는 모티브였다. “각색 작업을 하면서 범인이 공개적인 살인 예고를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써, 하나의 세부 장르 규칙으로도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원작 영화에서 가스인간이 언론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런 요소를 현대적으로 고쳐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범죄 양상이나 추적 과정을 풀어냄에 있어서 또 떠올린 것이 오쿠다 히데오 작가의 <올림픽의 몸값>이었다. 그 작품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
연 감독이 언급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대표적인 일본 사회파 스릴러 장르 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품 중 하나로, 국가 발전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씁쓸한 분노와 안타까운 파국의 결말 등을 담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쓰모토 세이초 작가의 <모래그릇> 같은 완성형에 가까운 사회파 소설 계보 안에서 <가스인간>이 그 즈음 어딘가에 놓여 같이 언급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이야기를 설계해나갔다.”
<가스인간>의 간단한 도입부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공중파방송 프로그램 생방송에 출연해서 신연료 사업인 바이오매스에 관해 소개하던 대학교수가 공중에 몸이 떠오르며 터져버리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자신이 이 사건의 배후라며 공식 기자회견을 예고하는 가스 형태의 몸을 가진 ‘가스인간’의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대혼란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추적하던 오카모토 형사(오구리 슌)는 가스인간의 영상에서 다음 살인의 힌트를 찾게 되고, 그 대상이 야쿠자란 사실에 의아해한다. 정부 기관과 범죄 조직이 결탁한 지역 비리, 거기에 얽힌 사람들의 분노를 다룬다는 점 때문에 드라마 공개 이후 일본에서도 유사한 실제 범죄 사건이나 역사적 맥락에서 이 작품을 보려는 시도가 많다. 다만 연상호 감독은 가스인간의 과거에 얽힌 야마나시의 세계어린이평화박람회 같은 국가적 행사에 대해서는 “실제 역사적 행사를 연상시키는 묘사를 지양하려고 했다. 올림픽이나 엑스포 행사 같은 건 직접적인 연관성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가공의 새로운 행사를 디자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재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사적 복수를 다룬 작품들과는 분명하게 결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근 등장하는 사적 복수는 카타르시스가 중요하다. <가스인간>은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타야마 신조의 독특한 유머 색채가 덧입혀지다
8부작 구성을 토대로 가스인간의 정체를 추리해나가는 서사의 전체적인 톤 앤드 매너를 정리한 후에는 가타야마 신조 감독의 연출 색채가 덧입혀졌다. 가스인간의 정체를 추리하는 온라인 스트리머 남매의 이야기 중에서 지하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단서를 얻는다는 내용은 대본상에서는 간단하게만 언급했지만, ‘드림 서큐버스’라는 가상 그룹의 이미지, 굉장히 독특한 컨셉과 B급 유머 가득한 뮤직비디오 한편의 전체가 4화 엔딩에 실리는 등 비중 있는 묘사는 가타야마 감독이 전적으로 만들어 입힌 결과물이다. 대본 곳곳의 캐릭터 대사에서도 가타야마 감독이 덧붙였거나 배우의 애드리브에 의해 추가된 부분도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극 중 야쿠자 보스 아들의 “파피니를 해버리겠다”는 식의 대사는 가타야마 감독과 배우의 연기에 의해 만들어진 대사라고. 거창한 의미를 담은 대사는 아니지만 파피니의 정체에 대해 인터넷에서는 일본 시청자들의 많은 추측이 오가고 있다. 가스인간의 추격을 피해 자동차로 이동하던 야쿠자 보스가 “이거 방탄유리야”라고 외치는 대사의 경우 한국 시청자들은 <아저씨>의 대사에서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가타야마 감독이 추가한 대사라고 한다.
다만 드라마 전체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주제곡이나 다름없는 일본의 대표 록밴드 ‘사잔 올 스타스’의 노래 <사랑스러운 엘리>(いとしのエリー)는 연 감독과 류용재 작가의 아이디어로 선택됐다. “한국의 김광석이나 유재하의 곡처럼 일본 사람들이 알 만한 오래된 노래를 찾던 와중에 류용재 작가가 아이디어를 줬다. 노래를 들어보니 드라마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어서 쓰게 됐다.” 연 감독은 과거 <부산행>에서도 극 중 석우(공유)와 딸 수안(김수안)의 오염될 수 없는 부녀 관계를 상징하는 노래로 <Aloha‘oe>를 등장시켜 감정선을 고조시킨 적 있다.
아오이 유우의 연기 변신에 주목
연상호 감독은 <가스인간>의 캐스팅에도 일정 부분 관여했다. 모든 배역까지는 아니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배우가 바로 이 시리즈 전체를 이끌어가는 두 인물 오카모토 켄지 형사와 코노 쿄코 기자 역을 맡은 오구리 슌과 아오이 유우다. 특히 연 감독은 아오이 유우의 연기 변신을 주목해서 관람할 것을 추천했다. 두 배우가 한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춘 게 20여년 만이기도 하고, 특히 아오이 유우는 일본에서도 상업영화나 대규모 프로젝트 시리즈에 얼굴을 내비친 적이 별로 없다. 그녀는 현재 결혼 이후 40대가 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가며 활동 중이다. <가스인간>에서 이전에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 연기를 선사하면서 코노라는 인물의 페이소스를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기키 기린 배우의 손자이자 모델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배우 UTA(본명 우치다 우타)의 연기 데뷔작이라는 점에서도 이번 드라마 캐스팅을 주목할 만하다. 인간과 가스의 중간 형태를 오가는 독창적인 가스인간의 비주얼 VFX는 <고질라 마이너스원>으로 아카데미 시각특수효과상을 수상한 프로덕션 시로구미가 맡았는데, 선과 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UTA의 묘한 표정에 미스터리한 가스가 뒤엉키면서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연상호 감독 역시 “캐릭터 컨셉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완성된 퀄리티를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며 가스인간의 비주얼을 칭찬했다. 거기에 더해 히로세 스즈, 하야시 겐토, 다케노우치 유타 등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한국 관객에게도 친숙한 배우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을 향한 도호 스튜디오의 강력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꽤 오랜 기간 일본 제작진과 협업하면서 “자국 IP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며 소회를 밝힌 연상호 감독의 이번 작업이 넥스트 <가스인간>프로젝트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가스인간>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전편 공개 중이다.
원작 <가스인간 제1호>에 얽힌 이야기
도호 스튜디오가 과거에 제작했던 수많은 특촬 영화 중, 과학기술 발전에 의해 인간의 신체가 변형을 겪는 이야기를 다룬 <미녀와 액체인간>(1958), <전송인간>(1960), <가스인간 제1호>(1960) 세편을 묶어 ‘변신인간 시리즈’라고 부른다. 이 작품들은 도호의 전통 IP인 <고질라>시리즈를 처음 기획했던 전설적 인물 다나카 도모유키 프로듀서의 지휘 아래 제작됐다. 연출은 주로 혼다 이시로 감독이 맡았고, 당대 최고의 특수효과 촬영 대부 쓰부라야 에이지가 모두 참여했다. 그중 <가스인간 제1호>는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 작가인 존 메러디스 루커스의 원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스인간 제1호>의 이야기 발단은 우주 비행사가 되길 희망하던 주인공이 강인한 신체 육성을 위한 생체실험의 대상자가 되었다가 실험 도중 잠이 드는 바람에 육체가 가스화되면서 시작된다. 가스화된 그는 자신의 의지로 가스와 육체 변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며, 가스화된 상태에서 물리력도 행사할 수 있다. 평범했던 한 청년이 신체 변형을 일으키면서 성격이 변하고 강도 살인 범죄도 일삼다가 결국 폭주해버린다는 내용. 2026년판 드라마 버전은 신체가 가스화된 인간, 이를 추적하는 형사와 기자 커플 등 원작이 갖고 있는 캐릭터의 기본 뼈대를 토대로 작품의 배경인 현대 도쿄에 맞게끔 상당한 각색을 거쳤다. 일본에서는 이번 드라마의 소설판도 출간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