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민속적 요소가 어떻게 오싹해질 수 있는지 - <위커 맨>은 어떻게 <위커 맨: 파이널 컷>으로 돌아왔나

<위커 맨>

<위커 맨>의 제목이 가리키는 잔가지 인형은 영화가 끝날 때쯤에야 등장한다. 그것은 여느 ‘맨’(man)들과 달리 영웅도, 악당도 아니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남자가 악당에 맞서려다 기어들어간, 의인화된 미궁에 가깝다. 거인의 형상을 한 나무 감옥 안에 갇히는 건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무력해지는 인간과 사건의 영문 자체를 모르는 동물들. 그들을 잠재우는 화마의 이미지는 이제 포크 호러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추대받고 있다.

<위커 맨>이 최후에서야 제 이름 뜻을 밝히는 것처럼 작품에 명성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도 나중 일이다. 1973년 공개 당시에만 해도 이 영화는 실패작으로 묻힐 뻔했다. 광고계에서 인연을 맺은 감독 로빈 하디와 각본가 앤서니 섀퍼는 “종교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발상으로 <위커 맨>의 서머아일섬을 창조했다. “영화에 민요가 흐르면 더 흥미롭고 사실적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영국 민속음악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극작가이자 작곡가 파울 조반니가 전통과 현대 사이를 간질이는 멜로디를 다듬었다. 여기에 스며든 선정적인 가사는 곡의 가창자인 마을 주민들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증폭했다.

동시 상영작에서 컬트영화로

앤서니 섀퍼와 로빈 하디(왼쪽부터).

그러나 2016년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로빈 하디 감독이 더 끈질기게 회고한 건 제작사 브리티시 라이언 필름과의 불협화음이었다. 브리티시 라이언 필름을 EMI 그룹에 매각하고 싶어 한 임원들이 “기이한 영화”의 마케팅에 비협조적이었고, 편집에 관해서도 의견 충돌이 컸다는 것이다. 그때 <위커 맨>과 함께 브리티시 라이언 필름의 라인업에 있었던 작품이 니컬러스 로그의 <쳐다보지 마라>(Don’t Look Now). 딸아이를 잃은 부부를 연기한 배우 도널드 서덜랜드와 줄리 크리스티 조합을 홍보하는 것이 더 승산 있겠다고 판단한 제작사는 <위커 맨>을 <쳐다보지 마라>와 동시상영하는 조건으로 개봉시켰다. 우리나라의 영상물등급위원회에 해당하는 영국영화등급분류위원회(BBFC)는 자체 사례 연구 페이지에 그 사연을 이렇게 옮겨뒀다.

“<위커 맨>이 <쳐다보지 마라>와 더블빌로 상영됐을 때, 평단과 관객 모두 공포, 코미디, 섹스, 외설적인 노래, 암울한 결말이 뒤섞인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주저했다. 양쪽 다 이 영화가 편집 단계에서 심각한 훼손을 겪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는데, 브리티시 라이언 필름은 두편을 동시상영해야 한다는 실무적 압박으로 <위커 맨>의 러닝타임을 99분에서 87분으로 줄어버렸다.”

<쳐다보지 마라>

실망한 로빈 하디 감독은 대서양을 건넜다. 수년간 공들인 작품이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 사라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커 맨>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 한 주연배우 크리스토퍼 리가 그와 동행했다. 리는 외딴 섬의 지도자인 서머아일 경으로 분해 꺼림직한 마스크로 열연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속 괴물이나 <드라큘라> 시리즈의 뱀파이어와 같이 굳어진 캐릭터를 탈피하길 염원해온 리는 <위커 맨>의 탄탄한 시나리오에 매료돼 무보수 출연을 자처하는 등 제작 성사에 앞장섰다는 후문. 앞서 명시한 인터뷰에서 하디가 밝힌 바에 따르면, 리와 투어를 도는 동안 영화는 일명 ‘바이블 벨트’(Bible Belt)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기독교 교세가 강한 백인 위주의 남부 지역 말이다. 하디는 그곳 관객들이 영화의 종교적 색채를 무척이나 반겼고, “이 영화만이 부활의 의미를 진정성 있게 설명해준다”는 호평까지 들었다고 돌이켰다. 그로부터 입소문을 탄 <위커 맨>은 컬트영화로 등극했고, 하디는 자신을 “불가지론자이자 비교종교학도”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선택은 관객 몫이라고도 덧붙였다.

제 운명을 개척한 영화

<위커 맨>

<위커 맨>의 1인칭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하위(에드워드 우드워드)를 떠올려보자.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해왔다. 하위는 서머아일의 이교도들에게 희생당할 뻔한 소녀를 구해주려다 그 자신이 신의 제물이 되고 만다. 바이블 벨트의 관객들은 왜 자신과 닮은 인물이 처절히 실패하는 이야기를 두고 환호한 걸까. 개별의 감상은 알 길이 없으나 추측하건대 그들은 영화를 보며 자신들에게 신앙이 필요한 이유를 재확인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하위를 현혹한 이교도인들도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신앙인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불확실함 속에서 겸손히 신의 응답을 기다리기보다는 이방인을 꾀어내는 손쉬운 해결책을 공모했다. 반면 하위는 마지막까지 선을 추구하다 변을 당했다. 그런 이라면 주님 말씀대로 부활하리라는 믿음이 신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지 않았을까. 영국영화협회(BFI) 큐레이터 윌리엄 파울러가 ‘내가 <위커 맨>을 사랑하는 이유’(Why I love… The Wicker Man)라는 글에 적었듯, “현실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이 영화에서는 “권력- 심지어 서머아일 경의 권력조차도- 은 단지 무력과 환상이 뒤섞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어쩌면 하나님의 권능마저 그리 해석될 수 있다는 여지가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위커 맨>

로빈 하디는 그 모든 불미스러운 감흥이 온전한 판본으로 전승되기를 바랐다. 그는 브리티시 라이언 필름에 삭제 신들의 필름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자료가 이미 파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필름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매립재로 쓰였다는 루머도 접했다. 제작사가 의견을 구하기 위해 동료 영화인들에게 돌린 버전, 하버드대학교 필름보관소에서 찾은 버전 등 여기저기 수소문해 긁어모은 프린트로, <위커 맨>의 판권을 보유한 스튜디오카날과 하디는 ‘파이널 컷’을 구현했다. 그것이 현재 ‘로빈 하디가 직접 승인한 최종판’으로 불리는 2013년 판본이다. 그리고 2023년, 이 판본을 4K로 리마스터해 국내 최초로 개봉하는 것이 바로 <위커 맨: 파이널 컷>이다. 색 보정 및 복원 작업을 진행한 실버솔트 복원소(Silver Salt Restoration)는 35mm 네거티브의 물리적 손상을 수리하고, 먼지, 반짝임, 스크래치를 수작업으로 다듬는 데 500시간 이상을 들였다고 한다. 컬러 그레이드는 과거 로빈 하디가 승인한 그대로 재현했다. 서머아일만의 운치가 서린 화면이 특별한 위화감 없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노동의 진가를 8월19일부터 극장에서 마주할 수 있다. 신의 뜻을 거역하듯 제 운명을 개척해온 영화는 그렇게 고전의 이름으로 호흡하는 중이다.

사진제공 라이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