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인간의 존엄, 예술의 윤리, 자연의 위기 - 장병원, 문주화 DMZ 프로그래머의 기획전 및 추천작 소개

<아다치 마사오 여권 사진을 찍다>(2026)의 도입에서 아다치 마사오는 여권 사진 촬영을 앞두고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새겨진 담배 ‘체’(Che)를 피운다. 금연하지 않으면 3년 안에 죽을 거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2갑씩 담배를 피우며 9년째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유를 그는 ‘체’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197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에 가담했던 아다치는 참혹한 고초를 당하고 있는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기 위해 미국 담배를 보이콧하고,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여권에 붙일 사진을 손에 쥔 채 ‘영원하라 체 게바라’를 외친다. 아다치의 기백과 체 게바라의 유산,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한 카말 알자파리의 정의는 이 인상적인 소품 안에서 저항과 혁명, 그리고 해방의 이름으로 병합된다.

집으로 가는먼 길

<고잉 홈>

제18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전작 회고전 ‘카말 알자파리: 영화적 정의를 위한 이미지 투쟁’의 주인공인 카말 알자파리는 팔레스타인영화의 현재를 대변한다. 회고전에선 예술학교 시절에 연출한 <이라크 방문>(2003)에서부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세계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고잉 홈>(2026)까지 13편의 전작이 소개된다. 알자파리는 자신의 고향인 자파(Jaffa)에서 촬영한 이스라엘 극영화들을 재작업하여 독창적인 영화 세계를 형성해왔다. 그의 레퍼토리는 로맨스와 액션이 어설프게 버무려진, 과장된 감정을 쏟아내는 B급 오락물이거나 호전적인 프로파간다 필름이다. 필름 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사라짐의 세계라는 두 세계를 살아왔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알자파리는 영화를 되찾음의 공간으로 변경한다. 존재와 정체성을 지우려는 시도에 맞서기 위해 그는 또 다른 지우기를 감행한다. 점령자들을 지우고 그곳에 거주했던 이들을 부활시키는 탈환의 과정을 통해 영화는 집을 닮아가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급격히 사라져가는 곳에 거주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된다.

카말 알자파리가 아다치 마사오를 기리는 이유는 일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억류에 대항하는 아다치의 행적이 ‘상상적 집의 재구성’이라는 그 자신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다치가 찾아가는 사진관도 일종의 집이다. 도쿄의 작은 사진관에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나이 든 사진사가 있으며, 부재한다고 선언된 존재를 증거하는 흔적들이 빼곡하다. 지우고, 되찾고, 재구성하고, 기억하는 것은, 점령과 약탈의 과정에서 추방당했던 본연의 존재, 바로 팔레스타인의 존재들을 그 풍경 안에 부활시킨다. 초점이 맞지 않고 어렴풋이 보일 뿐이지만, 이 정의로운 이미지 안에는 유년기의 친구들, 저녁 인사를 건넸던 노인들, 다정한 자매 그리고 프레임을 횡단하는 삼촌이 살아 움직인다. 지리적 공간과 상상 속 풍경 모두에서 사라져버린 것에 대응하는 재건축 행위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영화적 정의(cinematic justice)로 명명되었다.

바스마 알샤리프는 온라인 기획전 ‘바스마 알샤리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미지를 향해’를 통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조명하는 또 한명의 팔레스타인 영화감독이다. 노마드적 무빙 이미지와 인스톨레이션 작업에 기초한 디아스포라 예술가 알샤리프는 몰입감을 주는 혼합매체와 정교한 형식적 장치를 활용하여 실향의 경험과 식민주의가 초래한 세대간의 폭력을 탐구한다. 영화적 관습이나 특정한 형식을 불러온 뒤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적 코드를 만드는 방법을 찾는 알샤리프의 영화는 팔레스타인인으로서 겪은 경험, 그리고 폭력적 위기에 처한 세계에서 예술이 갖는 역할을 제기한다. 고통을 스펙터클화하거나 과잉 결정된 시각적 관습에 의존하지 않는다. 유예된 폭력의 상황을 윤리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알샤리프는 <가자 홈무비>(2013), <모닝 서클>(2025) 등의 대표작을 통해 팔레스타인 특유의 감정 구조와 디아스포라적인 확장성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두 팔레스타인 영화감독의 공통 의제는 그들이 장소에 관한 작업을 만든다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바깥의 먼 곳으로부터 뿌리를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이야기를 다루든, 스위스의 동네를 배회하든, 저들의 모든 작업은 팔레스타인의 지정학, 예술의 윤리와 연결 된다.

인간의 고향, 지구의 고향

<노래하는 사람>

고향을 찾으려는 애절한 운동은 기획전 ‘에코 다큐멘터리: 함께 불화하기’(이하 ‘함께 불화하기’)와 기획전 ‘목격자 드파르동 또는 삶을 보존하는 아키비스트의 영화’의 공통된 테마이기도 하다. 에코 다큐멘터리는, 환경 이슈와 기후 위기가 공론장에서 중요해진 2000년대 이후라는 시간, 역사적 맥락 안에 있다. 특별히, 다큐멘터리 실천 안에서 그것은 인간, 비인간, 그리고 (영화)기술간의 환경과 얽힘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함께 불화하기’에서 소개하는 15편의 작품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동시에 인간을 초월하는 만남을 촉진할 수 있는 잠재력에 주목한다. 영화적 집합체로 에코 다큐멘터리를 개념화함으로써 단순히 자연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일상적인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다큐멘터리의 비전을 조명하고자 했다. 특별히 2011년 동일본대지진 직후 연쇄적으로 이루어진 하마구치 류스케의 인터뷰 다큐멘터리 시리즈 ‘도호쿠 3부작’은 파괴와 재난의 풍경 속에서 ‘불화’의 의미 맥락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팬데믹을 전후해 엄정한 시청각 양식을 통해 전 지구적 생태의 존재 양식을 지도로 그려온 니콜라우스 가이어할터의 시도, ‘풍경’을 영화적 의제로 설정해온 제임스 베닝의 환경친화적 작업, 자연과의 일체화를 소망하는 여성의 경험을 담아낸 <꿈꾸는 강>(2026) 등 비인간 생명체와의 지각적, 정서적 상호작용에 관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에코 다큐멘터리의 광대한 지평을 보여줄 것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포토저널리즘에 헌신했다가 다큐멘터리스트로 전환한 레이몽 드파르동의 예술적 편력도 고향으로 향한다. 드파르몽은 사진가의 감각을 유지하면서 인물, 제도, 기관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길, 무엇보다 존재의 뿌리랄 수 있는 농경 세계의 소멸을 민족지적 사명감을 가지고 기록했다. 대상자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포착된 진실이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자전적 목소리가 담긴 드파르동의 영화는 절차적 명확성, 엄격한 개념화, 통제되지 않은 순간,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시적 진실의 공존을 장엄하게 제시한다.

<하제> Haje

황윤 | 한국 | 2026년 | 125분 | 개막작, 한국경쟁

<하제>는 미군기지 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 하제마을의 마지막 주민 전진현과 오래된 주민인 600살 팽나무를 지키려는 군산 시민들을 8년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물질적 혜택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나무에게 생각보다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특히 인간의 삶을 나무의 생애에 빗대어 말할 때가 그렇다. 누구나 태어나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듯 성장하며, 어느 순간 꽃이 만개하듯 정점을 누리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마을 주민들과 그 곳의 생태계를 품어온 팽나무는 분명 한 마을의 삶과 역사를 살뜰하게 키워낸 너그러운 주민이다. 황윤 감독은 자칫 사라질지도 모르는 팽나무를 보존하는 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마치 하제의 마지막 전입자가 된 것처럼 주민들과 시간을 함께 보낸다. 영화는 미군이 저지른 폭력의 역사를 인터뷰와 재연으로 재구성하고, 부조리한 역사와 권력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를 미세하게 관측하면서 대지의 진정한 주인들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감독은 8년의 시간을 거뜬히 이겨낸 뒤 팽나무의 울창한 수관과 우리를 다시 찾았다. 올해 영화제 개막작이다. /문주화 프로그래머

<니콜, 니콜> Nicole Nicole

로랑 달렌바흐 | 스위스 | 2026년 | 81분 | 국제경쟁

니콜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나이는 쉰다섯이다. 니콜의 언니는 지적장애가 있는 동생이 이제는 독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중년의 딸과 떨어져 지낼 미래를 두려워한다. 스위스의 신인감독 로랑 달렌바흐는 니콜의 조카이다. 감독은 니콜과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여든일곱의 할머니로 구성된 모계 가족의 세밀한 변화를 관찰한 홈무비이자 에세이인 첫 장편 <니콜, 니콜>로 스위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인 비지옹 뒤 레엘의 스위스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가족의 삶을 포착한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안에서도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 니콜에게 있다. 니콜은 아무런 의심과 망설임 없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다. 영화는 타자의 시선 속 니콜과 니콜 자신으로서의 니콜 사이를 오가며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방을 가져왔음을 증명한다. 니콜은 조카가 기획한 사진 소설에 동참하면서 영화와 픽션의 주인공이 된 자신과 마주한다. 소박하면서 위대한 도약. 이것이 내가 원제를 한국어 제목으로 바꾸면서, 두 니콜 사이에 기어코 쉼표를 넣은 이유다. /문주화 프로그래머

<고요한 밤의 환영> The Illusion of a Quiet Night

올가 체르니크 | 우크라이나 | 2026년 | 70분 | 베리테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나치의 학대 속에서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빅토르 클렘페러의 삶을 경유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벌어지는 일이 사유할 수 없는 것이었을 때 어떻게 이것을 사유하기에 성공할 수 있는가?’(<끝까지 증언하는 사람>, 2026, 워크룸 프레스) 전쟁을 다루는 무수한 다큐멘터리가 참상을 포획하겠다는 열망으로 앞다투어 매진하고 있을 때, <고요한 밤의 환영>은 클렘페러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몽타주한 영화다. 다만, 이는 한 사람의 일기가 아니라 2025년 7월 어느 날 밤, 일제히 카메라를 든 40명의 영화감독과 3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전역 64곳을 가로지르며 써내려간 기록이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쟁의 비극과 불안함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지킨다. 누군가는 춤을 추고, 기차는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은 애도하고, 슬픔 속에서도 생명이 축복받으며 태어난다. 이 거대한 몽타주 집적체는 하룻밤의 일상성과 다음날 해와 함께 떠오르는 생의 숭고함을 되새긴다. /문주화 프로그래머

사진제공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