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철택(기주봉)은 딸 정미(하윤경)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가 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묻는다. 그럼 저… 사망입니까? 한편 야무진 딸 정미는 아빠를 챙기는 데 여념이 없다. 단백질도 먹고 술, 담배는 안되고 커피도 안되고. 할 수 있다. 파이팅! <철들 무렵>은 가족의 한가운데서 죽음이라는 묵직한 화제를 길어 올린 채 기묘한 활기를 동력으로 포문을 연다. 철택과 별거하는 현숙(양말복)은 공기 좋은 곳에서 평온한 노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녀가 홀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 옥남(원미원)을 떠맡기려 한다. 남편을 떠나자 엄마를 돌봐야 하는 아이러니. 단역배우 정미는 작은 역에도 자기만의 스토리를 덧입히며 최선을 다한다. 그러던 중 동료로부터 의외의 소식을 듣게 된다.
전작을 통해 꾸준히 ‘가족’을 탐구해온 정승오 감독이 두 번째 장편으로 돌아왔다. 그는 엄마의 병문안을 온 자매들에 관한 인상적인 단편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으로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묘 이장을 계기로 뭉친 오남매의 시끌벅적한 하루를 쫓는 으로 전주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상을 받으며 독립영화계의 신예로 주목받아왔다. <철들 무렵>은 가족극의 뼈대를 유지하며 그의 세계를 한 걸음 넓힌 작품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가족의 중심에 부상한 죽음이라는 화두다. 정승오의 작품에서 부모의 고난은 처음이 아니다.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입원한 부모의 초상에서 시작되며, <이장>은 병상을 넘어 묫자리로 향한다. 그에게 가족은 언제든 죽고 병들 수 있으며 그래서 역설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철들 무렵>은 이 화두를 밀고 나간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에서 시작된 영화는 철택의 암 선고로 이어진다. 현숙은 구순을 앞둔 엄마의 말년을 고민한다. 가장 자연스럽지만 끝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두 가지. 가족과 죽음. 영화는 이 둘을 이어 붙여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진폭의 파장을 몸으로 견딘다. ‘철들면 죽는다’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죽음의 언저리에서 식구를 돌아보며 제자리를 더듬는다. 하지만 <철들 무렵>은 우울에 빠져 있는 작품이 아니다. 죽음은 영화를 흔들어 인물을 움직이는 하나의 축일 따름이다. 오히려 가족의 마지막 앞에서 이들이 자각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끊어지지 않는 연결성이다. 정미는 철택 앞에서 흡사 할머니(철택의 어머니)라도 된 듯이 푸념한다. 암은 대를 물린다더니만 우리 어매가 암만 안 걸렸어도…. 장난인지 꿈인지 빙의일지 모를 이 숏은 할머니와 정미를 하나로 이으며 핏줄을 따라 흐르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싫든 좋든 우리는 끈끈하게 얽혀 있고, 정승오는 그 실을 당겼다 풀기를 반복하며 가족이라는 촘촘한 조직의 질감을 감지한다.
그렇기에 <철들 무렵>은 가족 부양과 간병의 문제로 나아간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은 이 지점을 관통하며 부담과 책임으로 전환된다. 철택의 병상 옆자리를 잠시 머물다 사라진 남자는 자식들의 고생을 지켜보며 “살아 있는 게 죄스럽더라”라고 고백한다. 그래서인가. 철택은 “파이팅”을 외치던 정미의 변화가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부양은 때로 가족구성원간의 선택을 부추긴다.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쓸 것인가. 철택의 친형 관택(김종구)은 동생이 걱정스럽지만 여전히 자기 “새끼(아들)랑 새끼 새끼(손주)”가 소중하다. 지친 자식과 죄스러운 부모 사이를 해결할 돌파구로 언급되는 ‘효도 계약서’는 가족간의 부딪힘을 비용으로 환산해 법적으로 봉합하려는 웃지 못할 시도의 흔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결정적 장면이 등장한다. 가족들은 병상에 모여 참아왔던 말을 터뜨린다. 딸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딸에게, 동생은 형에게 눌러둔 감정을 뭉쳐 정면에다 내던진다.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원한 시퀀스는 해방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부끄럽고, 유쾌한 동시에 조금 서글프다.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병상의 난투극.
정승오에게 병상이란 그런 곳 같다. 내 가족과 살을 맞댄 채로 앓는 소리부터 배변까지 모두 받아내야 하는 곳. 내 손으로 길러낸 존재에게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곳. 그래서 옆에 있어주고 싶지만, 또 있어주길 바라지만 함께하는 것이 진절머리 나는 곳. 이토록 뜨겁고 비좁은 한줌의 공간에서 가족의 가면은 하나둘 탈락한다. 이제 와 말하기 새삼스럽지만, 그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실이 거침없이 솟구쳐 오르는 이곳은 정승오의 영화가 뿌리내린 삶의 현장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난장 앞에서 어떠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건 전작에서부터 이어온 정승오의 태도다. 거센 파도는 한명 한명 집어삼켜 진심을 토하게 만든 다음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그러고 나면 이들은 다시 한번 삶의 격정을 겪어냈다는 듯 조용하다. 그걸로 끝이다. 해결된 건 없지만 모두 해소된 기이한 순간. 가족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번 영화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어린 소년이 모든 순간을 묵묵히 지켜본다.
하지만 <철들 무렵>의 마지막은 전작들과 분명 다르다. 정승오의 영화는 종종 홀연히 길 떠나는 가족의 초상으로 끝맺곤 했다. <철들 무렵>은 좀더 나아간다. 영화의 내레이션을 맡은 구순 노인 옥남은 가장 나이가 많지만 가장 철들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의 선택은 산뜻한 반전을 선사하며 영화의 흐름을 튼다. 그 여파일까. 인물들은 제각각 선택을 내리며 가족의 자장 안에서 한 걸음씩 내디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훌륭한 영화적 답변이다. <철들 무렵>에서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독특한 리듬이다. 영화를 나누는 5개의 장. 이들 가족과 한국사 질곡의 순간을 가로지르는 내레이션. 툭툭 끊어지다 계속되는 대화. 낯선 곳에서 중단되고 의외의 곳에서 이어지는 이 영화의 흐름은 투박한 동시에 흥미롭다. 이 리듬이 가족이라는 낯익은 소재에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멋대로 상상컨대, 소포모어징크스에 관한 부담과 부단히 싸우며 완성했을 <철들 무렵>은 정승오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만한 이유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