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소설을 에스파(aespa)의 노래로 해석해 영화로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철들 무렵>의 가족 이야기는 전통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이다. 아픈 아버지를 간병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커리어를 도약시키는 일이 중요하고, 어머니의 끼니를 챙기는 것만큼이나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는 것 역시 그렇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며 두 시간대를 동시에 사는 듯한 묘한 감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정승오 감독이 <이장>(2019)에 이어 두 번째 장편 연출작에서도 가족의 집 안으로 망원경을 들이밀었다.
- 각자의 집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아버지 철택(기주봉), 딸 정미(하윤경), 엄마 현숙(양말복)을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가족드라마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가족 안에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면서 간병과 작업을 병행해야 하는 시기가 있었다. 어느 쪽도 뜻대로 되지 않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우리 부자를 반영한 부녀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다시 들여다보는 동안 앞선 질문이 떠올랐다. 가족 전체의 삶 못지않게 자기 인생도 중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으니 보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철택네 3인 가족뿐 아니라 현숙과 철택의 형 관택(김종구)의 가족까지 등장시켜 그야말로 전 세대의 가족 사이를 종횡한다. 지금의 가계도는 어떻게 탄생했나.
가족 안 개인의 행복에 관한 질문보다 먼저 떠오른 게 있다. 과거라는 틀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특정한 시기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겪었고, 겪고 있고, 앞으로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순환적이고 넓은 차원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인 틀이 잡힌 뒤 디테일을 고민하다 보니 우리 집안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엄마, 아빠…. 각자가 겪은 곡절의 시기와 피로 연결된 사람들의 누적된 시간까지 다뤄보고 싶었다.
- 정미가 배우여서인지 정미와 철택은 일상에서 상황극을 하는 데 익숙하다. 부녀 관계에서 벗어나는 상황극 장면들이 환기가 되고 활력도 준다. 정미를 직장인으로 설정한 적도 있었나.
없었다. 처음에는 감독인 내 모습을 정미에게 대입했다. 그런데 앉아서 글만 쓰니 영 단선적이었다. 반면 배우는 운동성을 가진 직업이니까 재밌게 표현해볼 장면이 많겠다 싶었다. 이를테면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정미는 어쩔 수 없이 딸이 아닌 자식을 살리려는 억척스러운 엄마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런데 배우답게 그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맛깔나게 해낸다. 직업을 배우로 바꿨지만 정미는 여전히 내가 많이 투영된 인물이다. 단역일지라도 인물의 전사까지 상상하며 최선을 다하고, 더 큰 기회를 얻기 위해 애쓰는 정미는 <철들 무렵>을 준비하던 시기의 나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감독과 배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결과가 없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엎어져 실망이 클 때 잠시 모든 걸 내려놓는 시간을 가지면 다시 나아갈 힘이 생긴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는데, 그 깨달음을 정미의 시간에 녹이기도 했다.
- 현숙의 노모 옥남(원미원)의 낭독극을 활용해 풍부한 장면을 연출했다. 박완서 소설을 읽는 옥남의 목소리가 일제강점기와 민주화운동 시절의 다큐멘터리 푸티지, 현재의 일상 장면을 오갈 때 영화가 다루는 시간이 넓고 깊어진다.
우선 이 영화의 첫 번째 목표인 과거의 틀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상징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이 구순을 앞둔 옥남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인 옥남이 자신과 비슷한 곡절의 시기를 살아온 여성 작가의 소설을 읊는 동안 식량난을 겪던 시절, 소년일 때부터 일하고 있는 철택의 얼굴까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목표에 가까워질 뿐 아니라 묘한 재미도 발생할 거라 기대했다.
- 영화가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삽입된 한영애의 곡(<말도 안돼> <건널 수 없는 강> <달>)을 포함해 조였다 풀었다 하며 감질나게 하는 음악이다.
김지혜 음악감독은 <이장>도 함께 작업한 사이라 호흡을 맞추기 편했다. 전체적으로 레트로한 분위기에 블랙코미디 요소가 있으니 재즈와 뽕짝의 경계에 있는 곡이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방향성 정도만 주고받았는데 워낙 감각이 좋은 분이라 딱 원하던 곡이 나왔다.
- 그 블랙코미디가 현숙과 그의 형제자매가 옥남의 구순 잔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극대화된다. 얼른 끝났으면 하는 어머니의 속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만족해하는 자식들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쓰는 사람의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그랬다. 박완서 작가의 <나목>이 나왔을 때 30, 40대 여성 독자들이 ‘내 속마음이 여기 다 들어 있다’며 열광했다고 하더라. 나도 관객이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영화라는 가상공간에 각자의 속엣말을 다 끄집어내 던져보자는 생각으로 썼다.
- 반면 철택과 정미의 한달가량의 병원 생활은 실제 간병의 기억이 겹쳐 힘들지 않았나.
구순 잔치 때와 비슷하게 다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간병 첫날, 옆자리 환자의 가족이 화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너무도 빠르게 그 가족처럼 돼버린 나와 한뼘도 안되는 간이침대 생활을 견디는 것 모두 괴로웠다. 아버지의 고통은 내 몇배였을 거고. 퇴원 소식을 듣던 날, 무뚝뚝한 우리 부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마음속에 품은 말을 느꼈다. 간병 경험을 토대로 이 부분을 쓰는 게 쉽지 않았으나 내 안에서 뭔가가 정리될 수 있었다.
-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궁금한 인물들로 가득하다. 스핀오프로 자세히 다루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철택과 현숙의 러브 스토리.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대학 시절에 만나 졸업 뒤 결혼하고 정미를 낳기까지의 이야기를 써뒀는데 분량상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의 역사도 꽤 파란만장하다.
- 가족을 탐구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지만 그외의 이야기도 곧 볼 수 있을까.
차기작에선 처가댁을 다뤄서…. (웃음) 그렇지만 SF도 좋아하고 그 비슷한 장르도 준비하고 있다. 가족영화를 계속 만드는 명확한 이유를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세상의 흐름에 따라 가족의 형태와 성격이 어떻게 변하는지 호기심이 든다. 박완서 작품을 좋아하는 영향도 있을 것 같고. 곧 가족들이 <철들 무렵>을 보는데 어떤 후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