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곤 감독은 한국영화가 성장하던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새로운 예술성을 보여준 연출자였다. 단편영화 작업들로 1990년대 말한국 단편영화제를 휩쓸고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거머쥐었고, 첫 장편영화 <꽃섬>(2001)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포함해 3개의 트로피를 거두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상실과 공포가 뒤얽힌 스릴러 <거미숲>(2004)은 언제 보아도 지극히 아름다운 작품이며, 소지섭 · 한효주 등이 출연한 <오직 그대만>(2011)에는 대중적 화법을 구사하려는 그의 결심이 새겨져 있었다. 송일곤 감독이 긴 침묵을 깨고 <여전히 찬란하게>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산골 소녀 순옥(박서경), 정임(최주은)의 일상과 꿈을 김혜자란 명배우의 시점으로 따뜻하게 감싸는 작품이다.
- <오직 그대만> 이후 오랜만에 극영화로 돌아왔다. 어떻게 지냈나.
<여전히 찬란하게> 속 대사처럼 “하루하루는 지독시리 안 가는데, 10년, 20년은 금방” 갔다. 이영애 배우와 <엄마는 저격수>란 액션영화를 3년간 열심히 준비했지만 ‘스톱’됐다. 이영애 배우가 무술 훈련을 다받고 스토리보드도 나오고 스태프도 다꾸렸지만 코로나 팬더믹이 터지기 3개월 전에 멈추게 됐다. 이후 사극 오컬트 스릴러 영화를 준비하던 중 <여전히 찬란하게> 시나리오를 만났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로부터 2025년 독립영화 제작 지원을 받고 투자가 잘이뤄져 이 작품을 먼저 완성했다.
- 영진위 지원 당시 제목은 ‘오래된 사과’였다.
‘오래된 사과’는 희곡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의 제목이었다. 이혜숙 작가가 중학생 딸에게 과거의 아픈 역사를 어떻게 전달할까 고심하며 쓴 희곡이고, 이혜숙 작가가 시나리오의 대부분을 썼다. 이야기에 담긴 감성의 결을 그대로 가져오되 짧은 시간내 표현할 수 있도록 영화적 장치를 녹여 내가 각색했다. 바뀐 제목은 내가 지었다. ‘찬란’이란 단어가 정말 좋았고, ‘여전히’도 과거와 현재를 잇는 뉘앙스라 맘에 들었다. 예쁜 말이고 밝은 느낌이 좋아 제목으로 삼았다.
- 오프닝 신에서 어린 순옥과 정임이 산등성이에서 노래를 부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가 맞을까 의아할 정도로 환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송일곤 감독 특유의 검은 숲, 그 속에 외딴집이 나타났다. 시체를 태우는 화장막이다.
<거미숲>에서 여주인공이 숲을 응시하는 뒷모습으로 오프닝을 열었다. <여전히 찬란하게>도 두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듣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점점 카메라가 다가가며 관객을 두 여성의 이야기 속으로 초대하는 느낌으로.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숲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기에 아주 아름다운 숲을 찾고 싶어 지리산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리산 자락의 구례에 오픈 세트를 지었다.
- 전작 <거미숲> <마법사들>부터 신작 <여전히 찬란하게>까지 송일곤 감독은 왜 늘 숲에 매료되나.
폴란드 우치영화학교 유학 시절, 주말마다 트램을 타고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사과 몇알을 싸가서 산책을 하고 책을 펼쳐 읽고 낮잠을 잤다. 숲은 영감을 주는 동시에 사람을 정화시키고 에너지를 준다. 빛이 비치면 너무나 아름답지만, 어둠이 깔리면 으스스하고 비밀스럽기도 하다. 마치 2개의 세계가 숲에 공존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도 빛과 어둠, 숲의 두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순옥이 열나는 정임을 위해 나물을 캘 때 숲속은 어두컴컴하고, 두 소녀가 솔방울로 엮은 화관을 쓰고 자신들의 미래도 모른 채 두영(문성현)을 바라보는 장면에선 빛이 숲으로 들이친다.
- 순옥과 정임이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를 보고, 유행가 <이태리의 정원>을 부르는 등 시대 묘사가 두드러진다. 연출자로서 1942년을 어떻게 그리려 했나.
1942년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물자를 수탈했던 시기다. 가난했지만 새로운 예술이 퍼져나간 때이기도 하다. 당대 사람들은 최승희, 선우일선 등의 스타들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봤고 시골 소녀도 그들을 보고 꿈을 품었을 테다. <청춘의 십자로>는 몇 남지 않은 일제강점기 조선영화인데, 첫 장면부터 서울역을 비춘다. 소녀들이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설렜겠나. 무성영화가 마을로 오는 사건은 본래 시나리오엔 없었지만, 영화하는 사람으로서 애정을 담아 추가했다. 문명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 연출자로서 노년의 순옥을 연기한 김혜자 배우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지 궁금하다.
김혜자 선생님은 아주 긴 설득 끝에야 출연을 결심하셨다. 대사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연습에 연습을 계속하신다. ‘대배우라면 그냥 현장에 나타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론 수십번씩 연습한 끝에 그 캐릭터가 되어 현장에 오신다. 그리고 감독의 정확한 디렉션을 원하신다. 어린 정임과 만나는 환상 신을 찍을 때 연출자로서 현장에서 전율을 느꼈지만, 선생님이 만족하지 않고더 표현하고자 하셔서 몇 테이크를 더 갔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는 그림으로 따지면 인물화다. 추상화나 풍경화가 주는 감동도 있지만 좋은 인물화를 볼 때 우리는 그인물이 살아온 시간을 느낀다. 그래서 김혜자 선생님의 클로즈업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우주가 있었다. 시선 하나, 작은 미소가 어떤 서사보다 인간의 감정을 잘 머금고 있었다.
- 김혜자 배우가 장롱 앞에 이불을 펴고 앉아 모든 상황을 뒤집는 대사를 내뱉는 장면에서 진한 감동이 느껴졌다. 연출자로서 현장에서 특별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압도적이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김혜자 선생님이 평소 “배우는 항상 순수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많이 말씀하신다. “좋은 걸보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음악을 들어야 배우가 깨끗해지고 새 감정을 담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상투적인 연기를 한다”라고. 다른 훌륭한 배우들도 많지만 김혜자만이 주는 깊이와 결이 있다. 그가 실제로 구도자같이 생활하기 때문이다. 대본, 강아지, 본인 앞에핀 꽃들, 새들이 그의 전부다. 배우로서 새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본인의 마음을 순수하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 그래서 과장되지 않고 새로우면서 놀라운 연기가 나온다.
- 이전 영화들처럼 많은 감정이 담긴 배우의 얼굴로 서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배우의 표정이 기억되길 바라는 것 같다. 김혜자 선생님의 마지막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서사를 마무리하고, 엔딩 크레딧에는 정임이 달빛 아래에서 노래 부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넣었다. 처음 구상은 달랐으나 편집 과정에서 오프닝을 노래로 열었으니, 노래로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과 악보를 읽지 못했던 정임이 그 장면처럼 노래를 불렀을 수도 있고, 부르지 못한 노래를 관객이 보는 것일 수 있다. 그 장면을 통해 관객이 정임이란 캐릭터를 기억했으면 했다.
- 차기작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사극 오컬트 스릴러와 지난해 영진위 중예산 제작지원 예비 후보에 선정된 <여행사만가>가 있다. 다음달에 촬영했으면 싶을 정도로 많이 준비했다. 캐스팅까지 마쳤으나 잠시 멈추면서 다시 ‘셋업’해야 하는 상황이다. 투자라는 큰 산도 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