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세계에서 벌어지는 연민 가득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삼각관계를 다루는 <영원>은 할리우드의 전통을 사랑하는 관객에게 단순한 로맨틱코미디 이상이 될 수 있다. 지하실에 잠들어 있던 장르, 필름 블랑의 부활을 의미해서다. 1940년대 초반 번성했던 일군의 할리우드 판타지영화들이 A24 신작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는지 탐구해보았다.
필름 블랑과 색채의 귀환
나란히 앉은 세 주인공의 뒤로 그들의 형상이 무한히 펼쳐지는 <영원>의 포스터는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1946년 걸작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묘사한 림보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1940년대 초반 흥행한 필름 블랑 장르의 대표작이다. 필름 블랑은 필름누아르의 정신적, 미학적 대척점 역할을 하는 영화들로 정의된다. 누아르가 배신, 복수, 도덕적 타락으로 점철된 사회의 어둡고 냉소적인 이면을 파헤쳤다면, 필름 블랑은 낙관과 용서, 사후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과 초월적 로맨스를 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러한 영화들이 등장한 것은 우연히 아니다. 필름 블랑은 대중의 해소되지 않는 슬픔을 감동적인 재회 서사로 변환시키는 감정적 프로파간다 역할을 했다. <영원>이 전후 시대의 로맨스를 왜 지금 다시 불러내는지 동시대의 풍경을 질문해 봄직한 대목이다. 극 중 영원과 대조되는 개념이 ‘공허’로 불린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할리우드가 공허에 맞서 유지하고자 한 밝은 환상은 잘 운영되는 관료제와 다름없는 천국, 영원한 사랑, 그리고 선한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위로다. 그 매력에 관해 작가주의 이론의 창시자이기도 한 비평가 앤드루 새리스는 “천국마저 문명화하는 힘”이라 일컬었다.
데이비드 프레인 감독은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제작사 아처스의 영향을 언급했다. 판타지를 활용해 지극히 인간적 진실의 문을 여는 접근법뿐만 아니라 미쟝센의 감각이 여러모로 닮아 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현실 장면을 과감한 테크니컬러로 물들였고 사후 세계를 은은한 진주빛의 단색조로 꾸몄다. <영원>은 전반적으로 채도가 낮은 현대영화의 색보정 트렌드에 반항하듯 레트로한 컬러 팔레트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기억이 디오라마처럼 재현되는 터널인 영원 속 아카이브 공간은 상대적으로 단색으로 눌러 질서를 표현했다. 환승장 호텔의 창밖이 인공적인 현수막 하늘로 펄럭이는 설정 역시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차용했다.
루비치 터치
<영원>의 시각언어가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면 그 심장은 에른스트 루비치의 재치와 빌리 와일더의 우아한 서사적 경제성으로 고동친다. “루비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1960), <뜨거운 것이 좋아>(1961) 등 빌리 와일더 감독이 사무실에 걸어둔 팻말이다. 스크루볼코미디의 대가로 알려진 에른스트 루비치는 확실히 필름 블랑의 계보에서도 선두 주자다. 사탄의 접수실에서 그동안의 방종을 고백하는 바람둥이의 이야기인 <천국은 기다려준다>(1943)는 도덕적 복잡성을 시험대 위에 올리면서도 결코 무겁게 다루지 않는 경지를 구사한다. 빌리 와일더가 그토록 편애하고 <영원>역시 올려다본 루비치 터치(Lubitsch Touch)란 과연 무엇일까. 와일더는 하나의 농담 위에 더 큰 농담이 섬세히 쌓인 “슈퍼 조크”야말로 루비치의 정수라고 칭송했다. 진지한 주제를 위트 있게 다루는 <영원>의 농담도 비슷하다. 영원 중 유일하게 조기 만석으로 판매를 마감한 곳은 ‘남자 없는 세상’이며 ‘나치가 100% 제거된 1920년대 바이마르 월드’나 ‘암이 당신을 두번 죽일 수는 없기에 이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흡연자 월드’ 등이 절찬리 판매 중이다. 현실을 지배하는 환멸, 허영심, 대가 없이 누리고 싶은 즐거움 등 다양한 층위의 욕망을 위트 있게 건드리는 루비치식 유머다.
구멍난 치즈 이론
에른스트 루비치를 사랑한 감독은 빌리 와일더만이 아니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눈에 띄지 않는 잡스러운 대화나 순간들을 쌓아가면서 인물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루비치의 서사를 ‘그뤼에르 치즈 이론’으로 일컬었다. 곳곳이 송송 뚫린 치즈의 모양에 빗대어 각각의 구멍이 “윙크를 한다”고도 표현했다. 여기서 구멍이란 거창하게 의미화된 장면은 생략하고 그저 일상적 짜증을 주고받거나 말다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출을 의미한다. 이 구멍들은 관객을 공모자로 초대하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틈새, 무의미함, 불완전함을 노출함으로써 인물들의 관계를 대체 불가능한 원본으로 만드는 세련된 방법론이다. <영원>은 오프닝부터 출산을 앞둔 손주 부부의 성별 공개 파티에 향하는 조앤과 래리의 속 좁은 논쟁을 가만히 지켜본다. 젊은이들에 대한 시답잖은 불만, 휴양지를 산과 바다 중 어디로 결정할지 같은 문제가 노부부의 짜증 섞인 칼칼한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아이젠하워, 케네디 시절의 연기
195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를 연기하기 위해 배우들은 자신이 서 있는 전통을 돌아보았다. 조앤을 연기한 엘리자베스 올슨은 죽은 뒤에도 현생의 삶이 절대적 영향력을 미칠 때의 곤혹을 포착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대사를 쏘아붙이는 제스처는 우아한 외모에 높은 목소리 톤, 속사포 같은 말투로 완벽한 코미디 타이밍을 구사하는 1930, 40년대 할리우드영화 속 여성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창의 나이에 박제된 루크의 매력은 이상화된 로맨스를 상징하는 동시에 일상적 어려움에 직면할 기회가 없었던 캐릭터의 미성숙함과 지루함도 드러낸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그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군으로 명료하게 칭송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그 영웅적 존재감이 빈약하게 묘사되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요컨대 루크는 시대에 희생된 고결한 개인들의 사랑이 각광받았던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 시절의 멜로드라마에서 당대였다면 우선순위가 살짝 밀려났을 법한 캐릭터다. 키아누 리브스와 흡사한 단조로운 연기로 지적받곤 하는 캘럼 터너지만, 이번 영화에선 바로 그 어색함이 제 역할을 해낸다. 한편 마일스 텔러가 연기한 래리는 더글러스 서크의 가정 멜로드라마를 거울처럼 비추는 초상으로 견고하고 가정적인 남성성의 대변자다. 한마디로 당대 관객에겐 확실히 구식 캐릭터인데 배우 마일스 텔러의 매력이 상투성마저 부드럽게 감싼다. 전남편의 그늘에서 살아온 언더도그, 결코 화려하지 않은 수십년을 함께 견뎌준 동반자, 열정보다 평범함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인물의 미덕은 배우에 힘입은 바가 크다. 기민한 관객이라면 진정한 영원이란 함께 늙어간 두 사람이 역사 속에 이미 공유되고 있었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일찌감치 알아차릴 정도로 <영원> 속 텔러의 연기는 확실한 준수함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