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녜스는 ‘숲속 마녀의 딸’이라 불릴 만큼 마을에서 여성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매와 함께 생활하고 어둡고 깊은 숲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몹시 독립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여성이다. 영화가 아녜스를 묘사하는 방식은 명확해 보인다.
아녜스를 통해 그의 내면에 펼쳐지는 역동적인 풍경을 담아내고 싶었다. 그가 세상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매일매일 쏟아지는 생각과 사유, 고민과 모순 등을 그려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현대성이 있다. 아녜스를 오늘날의 사람으로, 가치관으로 표현하는 것. 이 세밀한 작업은 나 혼자 할 수 없어 각본 작업을 함께한 매기 오패럴과 아녜스로 탄생한 제시 버클리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다. 우리는 정말 긴밀하게 하나가 되었다. 아녜스의 조각을 찾기 위해 집중했고 제시 버클리에게서 피어나는 것들을 관찰했다. 다만 원작 소설의 아녜스의 결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따라갔다. 우리는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꾸며내려 하지 않았다. 하나의 상황과 틀이 주어질 때 배우와 캐릭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쫓아가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게 진짜 이야기다.
- 아녜스와 윌은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린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이나 시간을 비교적 길게 그리지 않는다. 결혼 이전의 이야기, 달콤한 연애의 시간을 축약하고 생략한 이유는 무엇인가.
A와 B가 서로를 향해 즉각적이고 강렬한 이끌림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건 종종 이야기의 원형적 연결이 된다. <햄넷>의 아녜스와 윌이 그랬다. 원작 소설 자체가 그 단계를 짧게 다루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가족이 되고 나서 본격적인 드라마가 펼쳐져야만 했다. 그전에는 숲속을 영원히 헤매는 것 이외에 다른 드라마는 없다.
- 숲을 잘 아는 여자는 본능적으로 나무뿌리를 찾아 그 아래서 첫째 아이를 낳는다. 푸르고 검은 나무 아래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녜스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강렬하다. 하나의 이미지로 정지된 장면엔 어떤 의도를 담았나.
영화에 다양한 시점을 담고 싶었다. 아녜스와 윌의 시점이 있는 동시에 전지적시점도 함께 존재하는 이유다. 뭐랄까, 대지의 신의 관점이랄까. 하늘에서 인물들을 내려다보는 구도들이 거기서 드러난다. 우리는 내적인 에너지가 폭발하는 장면을 두번에 걸쳐 담았다. 그중 하나가 첫 번째 출산이다. 아녜스가 자연의 에너지로 흡수되는 듯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원숏을 유지했고 무엇보다 포효와 울부짖음을 함께 담았다. 출산은 진동과 소리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사운드디자인을 세밀하게 했다.
- 나무 아래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딸 수잔나를 끌어안은 아녜스의 모습은 인간의 근원지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자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장면이다. 대지의 일부로 자연에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자연이다. 숲에 안긴 아녜스의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나. 우리는 살면서 단 한번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다. 그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로케이션을 찾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웨일스의 아름다운 숲에서 첫눈에 알아차렸다. 이곳이라고. 이곳에서 아녜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 출산과 육아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순간 모성애 이야기로 단순화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녜스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땅을 직접 고르고 선택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권한이 그의 손에 있다.
아녜스는 자신의 몸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테지만, 내 몸의 의지를 경청할 때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아차릴 때가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출산은 그렇지 않다. 타인이 가르쳐준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그건 당사자보다 사회적 편의를 위한 방식이 대부분이다. 아녜스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외부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몸과 계속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았기에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었다. 모든 여성이 궁극적으로 따라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
- 반면 둘째 쌍둥이들을 낳는 과정은 첫 출산보다 더 현실적이고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출산의 정신적·신체적 고통과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노출되는 와중, 얼굴 근육과 주름 하나까지 통제하는 제시 버클리의 연기가 돋보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지점은.
배우들이 정말 힘들어했다. 테이크를 갈 때마다 다른 각도로 촬영하는데 그때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계속 조율해야 했다. 다들 물리적·신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했다. 특별한 디렉션을 많이 주지는 않았다. 강도와 세기를 낮추거나 키워달라는 말 외에 모든 것을 배우에게 자율적으로 맡기는 편이다. 그래야 체화된 행동과 언어로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래도 이 장면은 단 하루, 8시간 동안 촬영해냈다.
- 8시간 만에? 어떻게 가능했나.
에이, 그래도 연출이나 셋업이 생각만큼 많은 장면은 아니다. 강도가 셀 뿐. 그 장면을 다시 보면 보일 것이다.
- 어린 아들 햄넷은 아빠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슬픔은 너무 슬픈 나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녜스가 그렇다. 영화 <햄넷>은 어떤 부류의 슬픔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나.
우리도 가끔은 슬픔에 마비될 때가 있지 않나. 그대로 얼어붙는다. 슬픔은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경계가 없고 모든 것을 집어삼킨 채 시간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관객이 두 가지를 기억해주면 좋겠다. 첫째, 슬픔은 우리를 상실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그릇이다. 인간은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 둘째, 슬픔은 사랑과 다를 바 없다. 무언가를 그토록 깊이 애도하는 것은 그 대상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애도의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과 같다. 만약 관객들이 <햄넷>을 통해 마음이 아팠다면 그건 이들의 사랑이 가닿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픔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 아들 햄넷을 연상하는 연극 <햄넷>을 본 아녜스는 비탄의 눈물을 흘리기보다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극에 적극적으로 빠져든다.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사실 아녜스가 연극배우의 손을 잡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아녜스는 좋은 관객은 아니다. 오히려 소란스럽다. 하지만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된 사람으로서 이제는 애도의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그 장면이 가진 힘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