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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땅을 선택하는 여자 - <햄넷>이 비극을 받아들이는 방법

“큰딸이 숲속 마녀의 딸이라는 말이 있어.” “본 적 있어요. 혼자 길을 헤매더라고요. 팔에 매를 얹고서. 혼자 숲까지 데려가기도 한대요.”

새와 교감하고 숲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녜스(제시 버클리)를 둘러싼 소문이 무성하다. 이제는 여자아이들도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됐지만 홀로 세상을 탐독하는 여자에겐 여전히 이상한 풍문이 더해진다. 그런 아녜스에게 윌(폴 메스칼)은 계속해 질문을 던진다. 평가가 아닌 관심, 속단이 아닌 대화. 그간 가족에게도 받아본 적 없던 온기에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사랑에 빠진다. 숲에선 많은 비밀이 오갔다. 라틴어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사실은 남들과 대화하는 게 어렵다는 윌의 고백과 어머니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아녜스의 추억이 온화하게 뒤섞인다. 영화의 포문을 열던 첫 장면. 토양에 단단히 정박한 나무뿌리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외로운 아녜스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기로 그가 선택했다.

나는 나의 길을 선택했어요

<햄넷>은 아녜스가 서 있는 공간, 다시 말해 그가 머무를 땅을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완두콩을 손질하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아녜스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당사자 윌이 아닌, 윌의 가족들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온 가족이 윌을 비난한다. “어머니 집에서도 쫓겨났대!” 혼란 속에 모두가 동요하는 사이 혼자만 침착한 얼굴을 띤 아녜스가 정정한다. “집은 남동생 집이고요, 제가 스스로 나온 거예요.(I chose to leave)” 결국 결혼을 하고 뱃속에서 아이가 자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산하게 바람이 불던 날 아침, 아녜스는 직감한다. 오늘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집 밖을 나온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숲으로 향한다. 마치 대지의 인도를 받는다는 듯 아녜스는 자신이 위치해 있어야 할 나무뿌리 아래로 간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뜨거운 물이나 천, 가위나 붕대도 없이 그저 표효에 가까운 고성을 지르며 숲에서 아이를 낳는다. 혼자일지언정, 처음이라 서툴지언정 아이를 낳을 땅만큼은 내가 고르겠다는 날것의 의지만이 선연하게 남아 있는 채.

그러나 아이를 처음 안아든 윌은 제 삶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지 직감한 듯 깊이 팬 구덩이를 바라본다. 불안정한 눈빛과 얼굴. 실로 그랬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희극을 쓰던 그는 이제 장갑쟁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의 생명력은 조금씩 흐려져갔다. 욱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는 순간들이 잦아졌고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첫째 딸 수잔나와 아녜스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었으나 삶의 의지가 급격히 시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아녜스는 윌의 땅을 다시 선택한다. “그는 런던에 가야 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다 모이는 곳, 윌에게는 그게 필요해. 그가 이 작은 마을에 갇혀 있잖아. 여기 있다가는 망가질 거야. 그는 아버지와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해.” 결국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상태임에도 어린 수잔나와 아내를 두고 윌은 런던으로 떠난다. 꼭 런던에서 같이 모여 살자는 과장된 행동이 그의 미안함과 죄책감을 대변하지만, 영화는 그의 방황도 무책임도 명확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도리어 윌이 없는 상태의 아녜스만을 한동안 보여주며 혼자 서 있기를 선택한 아녜스를 추적할 뿐이다.

더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렇다고 아녜스가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둘째 쌍둥이들을 낳던 순간엔 강둑이 무너져 집 밖을 나갈 수 없었고, 아들 햄넷이 몸부림치며 역병을 앓을 땐 땅의 기운(약초)이 아무런 효용을 내지 못했다. 그와 평생을 함께한 매도 세상을 떠났다.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해야 하는 슬픔 앞에서 아녜스는 무기력하게 존재했다. 윌의 빈자리 또한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었기에 날 선 원망과 분노가 급격히 누적돼갔다. 다만 그의 곁엔 ‘숲속 마녀의 딸’을 달래듯, 그의 애수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여자가 생겨났다. 윌의 어머니인 메리(에밀리 왓슨). 둘째의 출산 당시 숲에 가지 못한 그에게 “네 남편이 이 방 안에서 태어났어. 저 창가에서 첫 숨을 쉬었어”라고 달래주던 유일한 사람. 쌍둥이 아이들이 전염병 앞에서 힘을 잃어갈 땐 이미 오래전 세명의 아이를 떠나보낸 아픔을 더듬어 함께 나누었던 삶의 동료다. 더구나 그는 아녜스에게 희미한 희망을 확장시켜주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낙담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게 하는 사람이었다. “네 엄마(아녜스)는 아이를 살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어. 하지만 실패할 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건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단다.”

그러니까 영화 <햄넷>은 (자신의 물리적·정서적 처소에) 선택 의지가 강한 인물이 더이상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그 불가항력의 비탄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담담히 보여준다. 아녜스는 저만의 외로움과 싸워온 남편 윌이 연극 <햄넷>을 완성했다는 소식에 결국 극장으로 향한다. 아들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연극 제목과 인물 이름에 순간적으로 분개해 소리 지르고 말았지만 아들 햄넷의 외형을 그대로 재현한 배우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그리고 아들의 얼굴을 한 인물로부터 그의 죽음을 함께 애도한 아버지가 조형한 대사이자 삶의 고통을 엿듣는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으로 우리의 정신과 육신이 겪는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말이다. (중략) 단검 하나로 이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없는데 누가 이 짐을 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갈 것이냐. 어떤 자도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땅.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을 견디게 한다.” 일순간 선명하게 올라가는 아녜스의 입꼬리. 경의에 찬 무의식적 박수.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미소는 무감함이나 조소로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는 어머니 메리가 누누이 말해온 것, 그러나 오랫동안 아녜스가 수행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 슬픔을 안아주기, 받아들이기, 하나 되기. 어두운 숲속에 아녜스의 누울 자리가 되어줬던 커다란 나무가 오랜 시간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흙을 발판 삼아 세상에 저항해서가 아니라 빗물과 천둥과 바람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제 아녜스는 안다. 그가 무엇을 통과해왔는지. 로즈메리 잎사귀를 매만지며 아이들에게 ‘기억력이 좋아지는 허브’라고 알려주던 그는, 무대에 선 윌이 아들 햄릿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언제든 끄집어낼 것이다. “나를 기억해주렴.”

사진제공 유니버설 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