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국 347명. 죽어가는 태양으로 인한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과학자의 숫자다. 무수한 머릿수만큼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번뜩이면 좋으련만 현실은 예상과 달리 속수무책이다. 이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구에서 유일하게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를 실험·분석·번식시켜본 그레이스 박사(라이언 고슬링)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대규모 회의가 열린 뒤에야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존재를 설명받았고, 온오프가 망설여지는 회의 마이크 앞에서 대화는 원활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멀티 컬처의 사람들이 모이고도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정보 공백, 버벅거리는 대화. 소통의 부재다.
지금 지구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최근 적외광선 ‘페트로바선’이 태양에 나타나면서 태양열 또한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손놓고 있는다면? 30년 내에 기온이 10도에서 15도가량 떨어지면서 전세계에서 식량난과 기근, 무자비한 살상이 벌어질 것이다. 종국에 지구는, 아마도 멸망할 것이다. 학교 교사이자 과거 분자생물학 박사였던 그레이스는 인류의 단일한 희망인 것처럼 우주로 보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머리가 길었을 때 마침내 눈을 떴지만 허망하게도 그는 혼자다. 기억상실로 어떤 것도 짐작되지 않고, 함께 승선했던 야오 선장과 엔지니어 일류키나 모두 사망했다. 새까만 우주를 광활한 무덤으로 만들어주고자 시신을 우주선 밖으로 내보낼 때, 백지 상태의 생존자는 혼잣말을 한다. “두 사람 다 있었으면 혼자가 아니어서 좋았을 텐데.”
그런 그의 조종석 레이더망에 광점 A가 탐지된다. 그 정체는 기이하리만큼 압도적으로 큰 비행선이다. 연이어 광점 B가 탐지된다. 헤일메리호를 향해 내던져진 통 하나.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랐는지 곧 튕겨져 나간다. 다시 새로운 광점 C. 이번엔 느리게 오는 통. 결국 선외 활동을 감행해 미지의 물체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그레이스는 그 안에서 형이상학적인 조각을 발견한다. 삐죽한 막대기 위로 원형 모형이 매달려 있는 조각. 머지않아 그레이스는 그것이 행성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당한 위치에 ‘지구’ 표시를 색칠한 뒤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보낸다.
인류 역사 이래 최초로 이뤄진 외계 생명체와의 대화가 쪽지 던지기라니. 심지어 이들의 서신엔 문자언어가 없다. 다만 팽이버섯처럼 생긴 형상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성의껏 해석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레이스는 훌륭한 독자다. 모형에 담긴 맥락과 함의를 영리하게 해석해내기까지 한다. “너도 멀리서 왔구나? 나도 멀리서 왔어.” 결국 이들은 직접 만난다. 쪽지에서 만남으로, 만남에서 선물 교환으로 진화를 거듭하던 중 그레이스는 돌게같이 생긴 외계인으로부터 두 번째 선물을 받는다. 8개짜리 고리 2개의 모형. 산소다. 두 우주선을 연결한 다리이자 통로, 창구이자 복도를 만들어낸 외계인은 접견 지대에 무려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준 거다. 더 가까이 맞닿을 수 있고,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행성과 동료를 같은 이유로 잃은 두 과학자에게 소통은 시급한 문제였다. 특히 음파로 물체를 인식하는 외계인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레이스는 헬멧을 벗을 수 있어야 했다. 나를 위해 너를 먼저 생각하는 것, 그레이스와 외계인의 소통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산소 모형이 일련의 메시지가 된 경험 뒤에는 온갖 것이 두 과학자의 언어로 떠오른다. “수학은 우주 공통어”라는 믿음과 함께 줄자와 시계, 숫자로 공통 개념을 살피고, 움칫둠칫 우스꽝스러운 댄스를 따라하는 모방 행동은 나는 너와 다르지 않다, 라는 귀여운 안전 의지로 표현된다. 외계인에게 로키란 이름을 붙여주고, (정작 지구에선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계절을 스크린 영상으로 함께 간접경험한다. 심지어 음파를 인식하는 외계인의 특징을 반영해서는 둘만의 번역기까지 만들었다. 이제 두 친구는 더 길고 복잡한 대화까지 나눌 수 있게 됐다. 손짓과 발짓, 음성과 맥락, 원소기호와 과학 이론이 둘만의 언어가 되자 이들은 347명의 명망 높은 과학자가 고안하지 못한 최종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데 이른다. 타우세티 대기권에 아스트로파지가 증가하지 않는 현상을 보고서 그 안에 문제 세포를 잡아먹는 포식자가 있다는 희망적인 결론을 토론 끝에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친구가 언어를 맞춰가는 낭만적인 과정에만 빠져 있기보다 우주 재난을 다루는 영화가 제시한 근본적인 질문을 돌아봐야 한다. 인류 구원의 열쇠 찾기. 엘리트 과학자들은 불가능했지만 로키와 그레이스는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 속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이 손짓과 발짓, 공통의 기호를 동원하는 건 사실 너무나 익숙한 일인데 왜 과학자들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이 둘만이 해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레이스의 귀가를 소망하던 로키의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모든 구성원이 그레이스의 헌신(자결)을 촉구할 때, 로키는 자신의 아스트로파지 200만 킬로그램을 나눠줘서라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두 상황의 목적은 같다. 행성을 구하는 것. 하지만 목적을 위해 ‘너를 생각하는’ 로키의 태도는 행성만 구하지 않고 ‘너도’ 구하는 부가적 성과를 낸다.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함께 챙겨야 하는지 아는 이들은 조급하게 갈구하는 정답을 더 빠르게 찾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그레이스는 지구에 돌아가지 않는다. 뜨거운 작별을 한 뒤 로키의 우주선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행선지를 돌린다. 그레이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단 두개였다. 그냥 지구에 가는 것, 아니면 로키를 구하고 (우주를 떠돌다) 죽는 것. 하지만 서로를 생각할 줄 아는 두 친구는 결국 또다시 제3안을 고안해낸다. 에리드 행성에 안전하게 돌아가 함께 사는 것.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죽지 않았고, 무려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인공적으로 개발해내는 기술까지 연마했다. 이제 이들은 더이상 번역기를 쓰지 않는다. 에리드에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엔딩에서 스크린 위로 로키의 음성은 찌르르르 원형대로 흘러나오고 그 의미는 자막으로 떠오른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레이스는 로키의 언어를, 로키는 그레이스의 언어를 익혔나보다. 이민자가 된 그레이스가 또 말이 안 통하는 날이 온다면 그 또한 문제없다. 다시 말하면 된다. “우리 새 단어가 필요해.”
